7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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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저녁 옥상 정원에는 선선하고 보드라운 바람이 불었다.
바로 곁 서쪽에는 야트막한 언덕이, 동쪽으로는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강남의 빌딩 숲 야경이 펼쳐져 있어 전망도 아름다웠다. 빡빡한 서울 한복판에서 살짝 빗겨있는 듯 시야에 여유가 있었다.
해가 저물어가는 하늘에서는 푸른빛과 붉은빛, 보랏빛이 뒤섞여 시시각각 다른 조합으로 색을 펼쳐 놓았다.
처음 이 집에 와서, 이 옥상에 올라왔을 때.
그때는 해가 완전히 저문 한밤이었고, 여름이었다. 맥주를 한 캔씩 앞에 놓고 그와 단둘이서 이곳의 여름밤을 온전히 차지했었다.
그랬던 곳이 지금은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배우들 외에도 제작사에서 몇 명, 주요 투자자들 몇 명이 더 초대되어 손님은 모두 열서너 명쯤 되었다. 네다섯 명씩 그룹을 지어 테이블에 자리가 배정되었고, 한쪽에 따로 마련된 긴 테이블에는 샐러드나 따뜻한 요리 몇 가지가 뷔페식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메인 요리는 바비큐였는데, 이해성은 다른 셰프 두 명과 함께 커다란 그릴 앞에서 손님들을 위해 직접 고기를 굽고 있었다.
최홍서의 접시에도 그가 직접 구워 올려준 양고기가 놓여 있었다. 아주 작게 조각내서 씹고 있기는 했지만, 고기의 맛을 알 수 없었다.
실은 영화 감상실에서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내가 증거를 찾으면, 그때는 내 요구에 응해야만 할 겁니다.’
그것으로 당분간은 그의 추궁을 피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는 생각에 긴장을 놓았던 것일까.
영화 감상실에 들어가고 나서야 최홍서는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영화 감상실이 어디냐고 묻지도 않고 찾아간 것이다.
서로가 당연히 알고 있는 내용에 대해 얘기하듯 말을 꺼낸 그의 부탁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어떤 테스트일 거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에는 그의 부탁을 실수 없이 잘 이행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비장하기까지 했었다.
진짜 바보다. 진짜 바보야. 그가 얼마나 기막혀하고 있을까.
머리를 싸안고 감상실 바닥에 쪼그려 앉았었다.
최홍서가 아닌 척하거나, 윤혜안에 대해 철저히 연구해 윤혜안인 척하거나, 혹은 다른 누군가인 척하는 건 자신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요령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래 자책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블루레이 케이스를 가지고 돌아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을 때, 이번에는 추억이 최홍서를 덮쳐왔다.
<러브 스토리>.
처음으로 그와 함께 영화를 보았던 공간이었다.
‘근데 이거, 엔딩은 알죠?’
‘네, 알긴 알아요.’
‘뭐, 우린 해피 엔딩일 거니까.’
그곳에서 나누었던 대화, 음료를 가지고 온 강 실장을 대하기 어려워하는 자신을 놀리며 즐거워하던 이해성의 얼굴, 영화를 보는 동안 눈이 마주칠 때마다 부드럽게 웃어주던 미소, 배운 것도 없고 나이도 어린 자신의 어설픈 감상을 진지하게 들어주던 태도...
영화가 끝났는데도 헤어지기 싫어서, 둘 중 누구도 먼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미적거렸던 아쉬움까지.
그 순간의 전부가 그 방 안에 생생히 살아있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퍼부어지는 물살이 되어 최홍서를 덮쳐왔었다.
너무 오래 시간을 끌고 있을 수 없어서 블루레이를 가지고 방을 나왔지만, 감정적으로 에너지를 지나치게 소진했던 건지 그때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뱃멀미를 하는 것처럼 바닥이 울렁거리고 속이 더부룩했다. 그래도 봉안당에서나, 강 감독의 응접실에서처럼,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정신이 아뜩해지는 정도는 아니었다. 참을만했다.
음식을 먹으면 체할 것 같아서, 최홍서는 분위기를 해치지 않을 정도로 먹는 흉내만 내고 있었다. 힐끔힐끔, 물을 마시는 척, 주변 경치를 구경하는 척, 가끔씩 그의 모습을 훔쳐보면서.
“형은 무슨 고기 해부해? 야들야들하고 잡내도 하나 없고 얼마나 맛있는데. 양고기 못 먹었었나? 아니잖아.”
같은 테이블의 박동하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최홍서의 접시를 들여다보며 참견했다.
“먹고 있어. 맛있네.”
최홍서는 조각난 고기를 억지로 씹어 삼켰다.
용재와 셋이 집에서 술을 마신 날, 두 사람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최홍서는 말을 놓기로 했었다.
다른 손님들의 눈치를 빠르게 살핀 박동하가 최홍서 쪽으로 슬쩍 상체를 기울이고 작은 목소리로 은근하게 말했다.
“...내숭 떠는 거야? 작전?”
“......”
의미를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멀뚱히 쳐다보기만 하자, 박동하도 최홍서의 얼굴 구석구석을 꼼꼼히 살폈다. 거기에서 어떤 실마리라도 찾아내려는 듯 탐색하는 시선이었다. 그러다 원하는 것을 찾지 못했는지, 잠자코 다시 멀어져 갔다.
아마도 박동하는 ‘윤혜안이 기억을 잃은 척하고 있다’는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이쪽의 의심은 피하기 쉬웠다. 윤혜안과 관련된 기억은 정말로 아무것도 없으니, 일부러 기억을 잃은 척할 필요도 전혀 없었으니까.
최홍서에게서 시선을 거둔 박동하는 이번엔 고기를 썰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옥상을 어떻게 이렇게 꾸며놨지? 그냥 단독주택 마당 같잖아. 여기가 옥상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하겠어.”
최홍서도 이곳에 처음 올라왔을 때 똑같은 생각을 했었다.
“근데 집 구경도 좀 시켜줄 줄 알고 완전 기대했는데, 그냥 바로 옥상으로 데려오시더라?”
실망한 표정으로 중얼거린 박동하는 고기 한 점을 꼭꼭 심어 삼켰다. 그리고 다시 또 목소리를 낮춰 최홍서에게 말했다.
“아, 형 들어올 때 봤어? 집 들어가자마자 대뜸 거실부터 나오더라고. 거실 지나서 현관 나오고 복도 나오고 그러던데. 무슨 구조가 그래?”
박동하가 말하는 거실은 아마도 그의 접견실인 듯했다. 그가 진짜 친한 손님들을 응대하는 거실은 집 내부에 따로 있었다. 하지만 배우들은 아마도 접견실과 현관을 지나 계단을 통해 곧바로 옥상으로 안내된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집 내부를 자세히 모른다는 사실에, 최홍서는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여긴 접견실이라고, 외부에서 손님들이 오셨을 때 모시는 곳이에요. 그러니까...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들하고는 대강 여기서 뭐, 차도 마시고 하는 거죠.’
이해성은 최홍서에게 접견실을 그렇게 설명했었다. 그리고 최홍서는 접견실을 지나쳐 안쪽의 진짜 거실로 안내됐었다.
하지만 오늘 ‘윤혜안’은 접견실에서 그와 얘기해야 했다.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인 것도 모자라 의심과 의혹을 사고 있는 사람이니, 그가 진짜 거실로 들일 이유가 없었다.
장소는 같은데, 그 외 모든 것이 달랐다. 강 감독의 자택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이런 상황에서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집 내부를 공개하지 않은 게 무슨 대수라고... 나도 이젠 이 사람들처럼 접견실까지밖에는 허락되지 않는 사람인 건 똑같은데. 아니, 의심받고 관찰되고 있으니 이 사람들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이겠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은 최홍서는 천천히 물을 마셨다.
이해성은 여전히 그릴 앞에 있었다. 고기를 가지러 오는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중간중간 고기의 상태를 확인하는 그는 바비큐를 자주 해봐서 익숙한 느낌이었다.
차분한 컬러에 심플하고 우아한 디자인의 캐주얼 차림은 주말을 이용해 근교로 글램핑이나 소풍을 나온 유럽의 귀족 같았다. 적어도 최홍서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손님들에게 구워주기만 하고, 아저씨는 언제 식사를 하시지...?
나 상대하느라 많이 지쳐서 배고프실 것 같은데. 아니면, 나 때문에 입맛도 다 버렸으려나.
물 잔을 만지작거리며 이해성을 살피는 최홍서의 생각 속으로 박동하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파고들었다.
“참, 형 생일은 나랑 용재 형이 준비할 거니까 형은 그냥 장소랑 시간 말해주면 몸만 와. 알았지?”
“아니, 생일 같은 건 정말 됐다니까...”
“혜안 씨 곧 생일이에요?”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 중이던 배우 김이정이 관심을 보이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대답을 한 건 박동하였다.
“네. 다음 주요. 의식불명에서 깨어났으니 거의 기적이 일어난 건데 사람들이랑 같이 축하하면 좋잖아요? 근데 그냥 집에 있겠다고 고집부려서요. 생일 전후로 한 달은 파티하고 다니던 사람이.”
“예전에 내가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은 시기도 그렇고... 그냥 조용히 보낼게.”
“누가 뭐 난잡한 파티라도 열겠대? 그냥 가까운 사람들끼리 축하는 하고 넘어가자는 거지. 그리고, 예전하고 비슷한 상황에 자꾸 노출되다 보면 기억이 돌아올 수도 있잖아. 생일 파티는 아무튼 나한테 맡겨.”
왼쪽 가슴을 툭툭 두드리며 일방적으로 그렇게 얘기한 박동하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새 접시를 들고 그릴 앞으로 걸어갔다. 최홍서의 시선이 그 동선을 따라갔다.
“음식 다 맛있는데. 진짜 살 빼려고 관리 중이에요?”
“오늘 컨디션이 조금 안 좋아서요. 먹고 있어요.”
김이정의 질문에 최홍서는 억지로나마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우리 동갑이고 혜안 씨가 선배인데, 선배님이라고 꼬박꼬박 할까요?”
최홍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도 동갑끼리 그런 건 불편해서요. 편하게 대해 주세요.”
“모르는 척은 안 할게요. 기억을 잃어서 그런지, 혜안 씨, 듣던 거하고 많이 달라요.”
단도직입적인 그녀의 발언이 최홍서는 난감하기보다 오히려 깔끔하게 들렸다. 피식 웃자 그녀도 마주 웃었다.
“이정 씨는 소문 안 믿으세요?”
“소문보다는 내 눈으로 직접 본 게 더 확실하잖아요. 특히 이 바닥에서는.”
“......”
“혜안 씨가 동료 배우랑 싸우다가 뺨 때렸다는 얘기에는 좀 경악했었는데. 뭐, 아직은 내 뺨을 때린 것도 아니고...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때 다시 생각하려구요.”
“아...”
아마 윤혜안은 동료 배우와 싸우다 뺨을 때린 적도 있는 모양이었다. 알면 알수록 화려한 그의 과거에 한숨을 내쉬면서 최홍서는 그릴이 있는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박동하가 그릴 앞을 떠날 줄 모르고 이해성에게 계속 말을 붙이고 있었다.
아직 많이 어려서 그런지 박동하는 이해성을 어려워하기보다는 신기해했고, 호기심과 호감을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그리고 이해성은 고기를 굽는 중간중간 와인을 마시며 박동하를 상대해 주고 있었다. 질문 세례를 퍼부으며 꽤 귀찮게 구는 것 같은데도 그는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유도 없이 남에게 차갑게 구는 사람이 아니니까...
박동하가 이해성에게 가진 흥미가 연애의 의미인지, 단순히 쉽게 만날 수 없는 재벌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꾸 신경이 쓰였다.
이해성이 오늘 향수만 뿌리지 않았더라도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그에게서는 희미하게 향수 냄새가 풍겼다. 그것도 최홍서를 만날 때 뿌리곤 했던, 그리고 최홍서에게 선물해 주었던, 파리의 조향사에게 특별히 주문했다는 오더 메이드 향수. 그 향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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