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컴백-76화 (76/185)

76화

내면의 시끄러운 생각들을 죽이려는 듯 담배를 폐부 깊숙이 빨아들인 이해성은, 어떤 동요도 드러내지 않고 윤혜안의 질문에 대답했다.

“월척을 낚으려면 먼 바다로 나가서 미끼를 드리우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죠.”

“......”

“그게 낚시니까요.”

윤혜안은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 얼굴을 구석구석 천천히 살피면서, 이해성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설명을 보충했다.

“내가 조사한 윤혜안 씨는 춤 연습과 연기 연습은 게을리해도, 새로운 스폰서를 물색하는 데에는 얼마든지 부지런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거든요.”

“...스폰서요?”

그런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다는 듯 윤혜안의 목소리와 눈빛이 떨렸다.

“그동안 윤혜안 씨를 거쳐 간 스폰서가 한두 명이 아니더군요.”

“......”

“이것도, 내가 틀렸습니까?”

“모릅니다.”

“모른다구요?”

이번에는 윤혜안의 얼굴에서 겁먹은 망설임, 조심스러움이 사라졌다. 그리고 억울하고 분한 빛이 올라왔다. 원망하듯, 노려보듯 바라보며 똑바로 말하려고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말했다.

“기억이 안 나니까... 제가 정말 어땠었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저도 알 수가 없습니다.”

“기억이 안 나니까... 그거 참 편리하네요.”

그다지 피우지 못한 담배를 마지막으로 한 모금 깊이 빨아들인 이해성은 재떨이에 필터를 꺾어버렸다.

윤혜안이 의식불명에서 깨어난 후 기억을 잃었다. ― 그것에 대해서도 알고는 있었다. 이미 연예 기사에서도 다룬 내용이었으니까. 그를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억을 잃은 척’이라고 받아들이는 듯했지만.

재떨이에서 손을 거두면서 윤혜안의 억울해 보이는 얼굴을 쳐다보았다. 자기 나름대로는 정당한 불만을 표시하려 하는 심각한 표정의 앳된 얼굴.

‘귀여운 표정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때 그 아이의 얼굴이 겹쳐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이해성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차가 아니라 술을 준비하게 할 걸 그랬다는 생각을 하면서, 곧바로 다시 새 담배를 찾아 불을 붙였다. 그리고 이제 모든 게 귀찮아졌다는 듯 피로한 목소리로 나른히, 읊조리듯 말했다.

“그래요. 소모적인 과정은 그만 생략합시다. 더 시간 끌 것 없이 서로 솔직해지죠.”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효율만을 고려하며, 이것이 비즈니스라고 생각하려 애썼다. 연기를 한 모금 들이마신 뒤, 정리된 내용을 윤혜안에게 전달했다.

“내가 원하는 건 두 가지입니다. 그 정보들을 어디에서 어떻게 알게 됐는지 밝혀주는 것. 그리고 다시는 최홍서에 대해서, 최홍서와 나의 일에 대해서 건드리지 않는 것.”

“......”

“윤혜안 씨의 요구 조건도 들어보죠. 뭘 원합니까? ARA의 광고 모델? 드라마나 영화의 주연? 그것도 아니면, 현금? 이례적이지만 협의해 줄 의향이 있습니다.”

“원하는 거... 없습니다.”

“원하는 게 없다?”

윤혜안의 말을 천천히 곱씹은 이해성은 재떨이 위에서 담배를 톡톡 두드렸다. 눈앞의 남자가 일을 어렵게 만들고 있어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원하는 게 없는데 왜 그런 행동을 할까요.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겁니까?”

재떨이 위에 드리운 이해성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윤혜안이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제가 딴사람 같아졌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제가 딴사람인 척을 하고 있다고 그래요.”

“......”

“하지만 전, 깨어나기 전의 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하지도 못하고... 그냥, 지금의 제가 느끼고 생각하는 대로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걸 두고 사람들은 다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해요. 어떤 사람들은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됐으니까 그걸로 됐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내가 연기를 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어떤 사람들은 내가... 누구를 흉내 내고 있다고...”

중간중간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끊어질 듯하면서도 목소리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을 향해 침착하게 나아가고 있었다.

상체를 숙여 양 무릎 위에 팔꿈치를 괸 채 이해성은 그런 윤혜안을 주시했다. 아니, 자기 자신에게만 살짝 솔직해지자면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최홍서를 흉내 내지 말라고 하셔도, 아마 그렇게 해드릴 수 없을 거예요. 저는 흉내를 내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요. 정보를 알게 된 적도 없으니, 어디에서 어떻게... 어떤 경로로 알게 됐는지 말씀드릴 수도 없구요.”

후우...

결론을 들은 이해성의 입술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릇을 깬 사람이 본인이라는 자백을 듣기 위해, 아주 고집이 센 아이를 달래고 있는 기분이었다.

“우연에 우연에 우연에 우연에 우연에 우연이 겹쳤을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라는 겁니까.”

“부사장님이 저를 그렇게 의심...하시는 이유는 충분히 알겠습니다.”

“......”

“하지만, 우연에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그게 더 이상 우연처럼 보이지 않더라도... 여전히 그게 다 우연일 가능성이 제로인 건 아니잖아요.”

“......”

“제가 부사장님과 최홍서 씨의 정보를 어디서 알게 됐다는, 그런 증거라도... 있으세요?”

겁을 먹었으면서도, 눈빛과 목소리가 떨리는데도, 윤혜안은 이해성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증거를 요구했다.

이해성의 눈썹과 눈밑살이 꿈틀거렸다.

“윤혜안 씨, 나는 바보가 아닙니다. 이런 우연이면, 법정에서도 정황 증거로 채택될 정도예요.”

“목적이 있어서 그랬던 거라면, 분명 부사장님께 뭔가 요구했겠죠!”

믿어달라고, 간절한 얼굴로 외친다. 소파의 끄트머리에 걸치고 있었던 엉덩이를 들썩거리면서. 시즌이 한참 지난 명품 가방의 끈을 꽉 붙잡은 채로.

이해성의 참담한 눈빛이 윤혜안의 가방에 잠시 머물렀다. 빚을 내서 명품을 사들일 정도로 사치벽이 있다 들었는데, 깨어난 후에는 쇼핑을 하지 않은 건가...

“앞으로도 부사장님께 뭔가를 요구하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절대로요.”

“......”

“만약에 제가 정말 뭔가를 요구한다면, 그때 가서 조치를 취하셔도 되잖아요. 부사장님, 그러실 수 있잖아요!”

“윤혜안 씨가 그 아이를 흉내 내고, 우리 기억을 휘젓고 다니는 걸 보면서 고통스러운 내 감정은요?”

“믿어주세요. 흉내가 아닙니다. 정말 정보도 들은 게 없습니다!”

“하... 계속 같은 자리고, 끝이 없네요.”

의자의 팔걸이에 몸을 기댄 채 이마를 짚어 얼굴을 가렸다.

대화는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직접 대면해 본 윤혜안이 예상과 달랐으니까. 더 여우처럼 굴 거라 생각했고, 그런 윤혜안을 가차 없이 파헤쳐 줄 생각이었다.

완벽히 토끼처럼 굴 수도 있는 게 진짜 여우짓이라고 생각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간절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이 남자가 토끼를 가장한 여우짓을 하고 있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 게 문제였다.

그 모든 게 다 우연일 뿐이라니.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게 명백한데, 더 꼼짝없이 몰아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게 예상과 달랐다.

팔걸이에 팔꿈치를 괴고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관자놀이를 짚은 채, 이해성은 미간을 좁히고 윤혜안을 건너보았다.

“아니면, 내 관심을 끄는 게 아니라, 나에게 타격을 주는 게 목적입니까? 그 아이와의 일을 폭로라도 하려고요?”

이제 떠올릴 수 있는 윤혜안의 목적은 그 정도뿐이었다.

“저 같은 일개 배우가 부사장님께 타격을 입힐 수 있다고, 생각 안 하시잖아요.”

“뭐,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요.”

“......”

“그래서, 정말 판이라도 짜려는 겁니까. 대체 나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서?”

윤혜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짓, 안 해요.”

“……”

“부사장님께 나쁜 말은 절대 안 해요.”

“지금, 뭐라고...”

이해성은 느슨하게 기대 있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믿기지 않는 충격적인 진실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그의 얼굴이 일그러진 채로 굳어졌다.

“그러니까, 믿어주세요. 지켜보시면 아실 거예요. 제가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다는 거, 그리고 정보를 알게 된 것도 아니라는 거... 다 아실 거예요.”

정보를 들은 게 없다고, 윤혜안은 말로는 부정하면서 실은 강하게 긍정하고 있었다.

“이런 얘기, 저한테 하셔도 되는 거예요?”

“왜요?”

“제가 퍼뜨릴 수도 있다고, 그런 의심은 안 하세요?”

“홍서 씨 그럴 거예요?”

“말 안 해요.”

“……”

“부사장님께 나쁜 말은 절대 안 해요.”

최홍서와 그런 대화를 나눴을 때, 그 공간에는 단둘뿐이었다.

이것도 우연이라고 할 건가? 우연에 우연에 우연에 우연에 우연, 거기에 하나가 더 더해진 우연이라고?

윤혜안이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 두 사람의 일을 알게 됐는지 몰라도, 그 정보의 최초 출처는 홍서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에 대해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고, 누구에게도 자세히 얘기한 적 없다고 생각했던 그 아이가... 어딘가에 기록을 남기거나, 누군가와 기억을 공유했었다면, 그 기록이 무엇인지, 그 대상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그 아이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 수 있는 단서가 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면, 이해성으로서는 그 가능성을 좇아가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외부에서 윤혜안에게로 정보가 흘러 들어간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윤혜안 내부에서, 윤혜안에게서 직접 답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증거를 찾으면, 그때는 내 요구에 응해야만 할 겁니다.”

윤혜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대답했다.

“증거가 있다면 그래야겠죠. 얼마든지 찾아보세요. 정말... 아무것도 없으니까.”

깊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침실에 틀어박혀 혼자 있고 싶었지만, 옥상에서는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만 올라갈까요? 윤혜안 씨는 다른 스케줄 때문에 미리 양해를 구하고 조금 늦은 걸로 돼 있습니다.”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이해성이 먼저 일어났다. 옥상으로 가기 위해 집 내부로 들어서니, 기다리고 있던 강 실장이 다가와 급한 연락이 도착해 있음을 알려왔다.

위층으로 이어진 계단 앞에서 멈춰 선 이해성은 뒤따라오던 윤혜안을 돌아보았다. 가슴 앞을 가로지른 가방끈을 꽉 붙잡은 그는 이해성의 입에서 이번에는 무슨 말이 나올까 불안해하는 얼굴로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표정이 만약 거짓이라면, 윤혜안은 절대 연기에 소질이 없는 게 아니겠지.

이해성은 그에게 작은 부탁을 하나 해보기로 했다. 더 이상 곤두서있을 여력도 없다는 듯 지친 목소리로, 이해성은 한숨을 쉬듯 말했다.

“2층 영화 감상실 소파 테이블 위에 블루레이 케이스가 하나 꺼내져 있을 겁니다. 윤혜안 씨는 그걸 가지고 옥상에 먼저 가 있어요. 난 통화를 하고 뒤따라갈 테니.”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는 윤혜안을 이해성은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윤혜안을 뒤따라가려는 강 실장의 팔을 붙잡았다. 계단을 올라가는 윤혜안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해성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냥 둬요.”

“......”

“영화 감상실이 어디에 있는지, 그것도 아는 것 같으니까.”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76)============================================================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