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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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도착한 배우들은 옥상 정원으로 안내되었다. 선선한 가을 저녁, 바비큐를 즐기면서 강우현 감독이 추천한 희귀한 영화를 야외 스크린으로 함께 감상할 예정이었다.
윤혜안이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건 약속 시간 5분 전이었다.
손님들을 안내한 후, 미리 옥상에서 내려와 대기하고 있었던 이해성은 인터폰 스크린 속 윤혜안을 직접 확인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엘리베이터로 마중을 나간 강 실장이 윤혜안과 함께 접견실로 돌아왔을 때, 소파에 앉아있던 이해성은 마시고 있던 차를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줘서 고마워요. 거절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건... 별거 아닌데, 빈손으로 오기는 죄송해서...”
긴장 때문에 경직된 얼굴로 윤혜안이 건넨 것은 작은 꽃다발이었다. 정사각형의 종이가방 속에 들어있는 소박한 부케를 잠시 내려다보던 이해성은 그것을 받아 들어 강 실장에게 건넸다.
“이런 것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데. 잘 받아둘게요. 이쪽으로 잠시 앉겠어요?”
이해성이 소파 세트를 가리키며 앉기를 권하자, 윤혜안은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이때쯤이면 대부분 도착했을 거라 생각한 다른 배우들이 아무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겠지.
먼저 자리에 앉으면서 이해성이 설명했다.
“다른 분들은 옥상에 있습니다.”
“......”
“윤혜안 씨와는 그전에 따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일부러 시간대를 다르게 초대했어요.”
가슴을 가로질러 메고 있던 크로스백을 천천히 몸에서 풀어내면서, 윤혜안은 불안한 표정으로 주춤주춤 자리에 앉았다. 소파의 끄트머리에 겨우 엉덩이를 걸친 그는 여차하면 바로 달려 나갈 수 있도록 경계하는 사람 같았다.
“음료는 어떤 걸로 준비해 드릴까요?”
“저는 물이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강 실장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윤혜안은 옆자리에 내려놓은 가방끈을 꽉 잡고 있었다.
보고받았던 영상 속 윤혜안과는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그룹의 멤버들과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윤혜안은 방송임에도 즐거워 보이는 표정 하나 짓지 못했고, 소극적이다 못해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다른 게스트들과 자막에 의해 그의 그런 태도는 시크함이나 엉뚱함으로 포장되고 있었다.
배우 활동 중에 가졌던 인터뷰 역시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과묵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배우를 노렸던 건지는 몰라도, 경력도 오래되지 않은 신인에 가까운 배우가 무표정한 얼굴로 생기 없이 임하는 태도는 성의 없어 보일 뿐이었다. 형편없는 춤 실력이나 노래 실력, 연기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윤혜안은 팬들에게는 ‘도도한 공주님’이었고, 온라인 속 절대다수에게는 ‘싸가지 없는 배우병 환자’였다. 그리고 보고된 일련의 영상들을 훑어본 이해성의 감상도 안타깝지만 후자에 훨씬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 이해성의 눈앞에 있는 윤혜안은 도도한 공주님과는 거리가 멀었다.
좁은 행동반경,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 꼭 다문 입술은 이해성이 짐작했던 윤혜안의 반응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강 실장이 접견실에 딸린 뒤쪽의 작은 주방에서 물을 가지고 왔고, 이해성은 윤혜안과 둘만 남도록 강 실장을 집안으로 돌려보냈다.
윤혜안의 일거수일투족을 말없이 관찰하고 있던 이해성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쨌든 앞으로 작품을 같이 해야 하는데, 그전에 윤혜안 씨와 몇 가지를 분명히 해두고 싶어서요. 난 이 영화가 정말 잘 만들어졌으면 좋겠거든요.”
“......”
“윤혜안 씨도 그렇겠죠?”
“...네.”
짧은 망설임 끝에 대답하는 모습도, 맹랑하고 당돌하게 나올 것이라는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그런 모습쯤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었다.
이해성은 차분히, 평소처럼 약간은 작은 목소리로, 하고 싶었던 얘기들을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제시카’에 갔었다구요.”
‘제시카’는 송현수가 일하는 대학로의 바였다. 그 이름 앞에서 윤혜안은 분명 동요를 보이고 있었다.
“반응을 보니까, 거기까지 내 귀에 들어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나 봅니다.”
“지나가다가 들른 적이 있습니다.”
예상했던 대로의 답변이었다. 놀라거나 언성을 높일 것도 없이 이해성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강 감독님 응접실에서는 왜 울고 있었습니까?”
“개인적으로... 안 좋은 연락을 받아서, 혼자 있을 만한 곳을 찾다가...”
흠.
이해성은 입술을 다문 채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다, 최홍서 군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일어난 일들이라는 겁니까?”
“......”
윤혜안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혼이 나서 시무룩해진 아이 같은 표정으로 이해성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강 실장의 보고서에 의하면 윤혜안은 자발적으로 스폰서를 찾는 연예인이었다. 더 나은 스폰서가 나타나면 이전 스폰서를 버리고 갈아타기도 했다. 풍기는 이미지만으로 보자면, 영상 속 윤혜안은 그런 행동을 할 만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실제로 마주 보고 있으면, 이익을 위해 육체를 이용할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강 실장의 보고서는 확인되지 않은 루머를 모아놓은 찌라시 따위가 아니었다. 보고서의 모든 내용은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눈앞의 윤혜안에게서는 그런 부류들 특유의 통속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미지에 대한 얘기였다. 보이는 인상만으로 사람을 판단할 만큼 이해성이 살아온 인생이 만만하지만도 않았다.
“윤혜안 씨.”
테이블 위에 차려진 찻잔과 주전자 따위를 내려다보고 있던 윤혜안의 시선이 천천히 이해성을 마주했다.
“지난번 일로 알았겠지만, 아니, 어쩌면 그전에 미리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
“최홍서 씨가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 상관도 없는 윤혜안이라는 사람에게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최홍서와의 기억은 더 이상 확장될 수 없었다. 아까워서, 조금이라도 자기의 몫이 사라지게 될까 봐, 누구에게도 함부로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해성은 아주 고통스럽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맞은편에 앉은 윤혜안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해 보이는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그런데 이제는 만날 수가 없게 됐죠. 만날 수 없게 된 과정과 원인도 나에게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화가 나고, 가슴이 아픈 일들뿐이었습니다... 이해가 됩니까?”
윤혜안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을 겪게 되면, 누구든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싶어집니다. 그 사람의 행동을 따라 하고, 그 사람과 나의 추억을 침범하려는 사람에게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목소리가 격양되고 있었다. 이해성은 팔걸이 위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잠시 말을 멈추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담배를 찾았다.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꺼내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뺨이 파이도록 필터를 빨아들인 후 한숨과 함께 연기를 내뱉기까지. 윤혜안은 큰 눈을 힘주어 뜨고 유심히 이해성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 대 피우고 싶은 건가? 이해성은 그에게 뚜껑을 연 담뱃갑을 내밀며 눈썹을 치켜봤지만, 윤혜안은 단호하게 고래를 저었다.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두세 모금 연기를 더 빨아들인 후, 이해성은 준비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윤혜안 씨는 최홍서 군과 ARA 이해성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어디선가 알게 됩니다.”
가늘게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너머에서, 윤혜안은 이어질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크림 맨션> 오디션에 지원해 최홍서의 습관을 따라 하고, 최홍서가 이해성 앞에서 처음으로 연기했던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선택해 오디션을 치른 거죠. 그리고 최홍서의 봉안당을 찾아갑니다. 친분도 없었던 사람의 봉안당에 찾아갈 만큼, 내가 조사한 윤혜안 씨는 인정 넘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영화의 첫 식사 자리에서는 인상적으로 본 영화가 무엇이냐는 감독님의 질문에 <러브 스토리>라고 대답했죠. 그날 자리가 파한 후에는 남산 소월로에서 멍하니 서울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감독님의 응접실에서, 그 넓은 저택의 2층에 있는 응접실을 굳이 찾아가서, 윤혜안 씨는 마치 그 공간이 자신에게 각별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곳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이해성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기를 기다리면서.”
“......”
“내 시나리오가 틀렸습니까?”
긴 이야기를 하는 동안 한 번도 피우지 않은 담배는 이해성의 손가락 사이에서 길게 타들어 가 있었다. 이해성은 눈 앞머리를 손으로 꾹 누른 뒤 회색 재를 털어냈다.
감정이 넘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해성은 일부러 평소보다 더 딱딱한 어투를 유지했다. 강 감독의 응접실에서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윤혜안을 맞닥뜨리고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었었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이 일을 매듭짓고 싶었다.
이 일로 더 이상 시간을 끌거나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누가 됐든, 어떤 이유 때문이든, 최홍서를 내버려 두길 바랐다.
우리 두 사람의 일이 그저 우리 두 사람만의 일이기를 바랐다. 새어나갈까 아까운 추억 속에서 그와 단둘이 조용히 침식되어 있고 싶을 뿐이었다. 그것이 지나친 욕심인가?
강 실장이 준비해 준 물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자신의 가방끈만 꽉 붙잡고 있던 윤혜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에 대해 조사하셨다고 하셨잖아요. 친분도 없는 사람의 봉안당에 찾아갈 만큼 인정 넘치는 사람이 아니라구요.”
“......”
“그럼, 부사장님이 조사하신 제가 그렇게... 치밀하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었나요?”
회색 재가 굴러다니는 재떨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얘기하던 윤혜안이 이번에는 이해성을 쳐다보았다.
“오실지 안 오실지 모르는데도, 미리 대기하고 상황을 연출하고 있을 만큼요?”
긴 속눈썹을 가진 촉촉하고 커다란 두 눈은 도저히 거짓을 말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 얼굴로 분명 상당한 이득을 보며 살아왔겠지. 믿어달라고 달콤하게 눈물이라도 흘린다면, 모두가 속아 넘어갈 만한, 순진하다 못해 순수하게까지 보이는 얼굴이었다.
영상 속 건방진 표정의 윤혜안과는 완전히 인상이 달랐다. 악인의 역할과 선인의 역할을 맡은 한 배우의 다른 작품을 보는 것처럼.
‘실제로 보니까 홍서랑 닮긴 닮았더라구요. 그래서 그런가... 소문처럼 그렇게 인간쓰레기로 보이진 않던데.’
문득 송현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윤혜안의 얼굴을 보면서 그 말을 떠올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 어쩌면 지금 이런 표정들까지도 최홍서를 흉내 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내면의 시끄러운 생각들을 죽이려는 듯 담배를 폐부 깊숙이 빨아들인 이해성은, 어떤 동요도 드러내지 않고 윤혜안의 질문에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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