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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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두 번째 샤워를 마친 이해성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전라로 곧장 욕실을 빠져나왔다.
습기를 싫어해 욕실 입구의 러그 위에서 물기를 닦아내는 것이 오랜 습관이었다.
습기를 싫어하기만 할 뿐, 싫어하는 습기를 스스로 관리할 필요가 없는 환경에 살았기 때문이라고. 이혼한 전처는 그렇게 얘기했었다. 비난의 의도는 아니었다. 그녀 역시 싫어하는 무언가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움직일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었으니까.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다.
환기 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도 샤워하는 동안 습기는 차오른다. 그 척척함이 싫어서 재빨리 욕실을 벗어난다. 물을 뚝뚝 흘리며 파우더룸을 돌아다녀도, 곧 누군가에 의해 거짓말처럼 다시 말끔해져 있을 테니까.
재미있는 점은, 정작 아내와는 욕실을 공유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아내도 이해성도, 누군가와 욕실을 공유한다는 것을 끔찍하게 생각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자신만의 욕실을 사용하며 자라온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렇듯, 그들에게도 욕실이란 침실보다 더 사적인 오직 혼자만의 공간이었다. 부부 침실조차도 계약에 의해 성립된 비즈니스의 연장인 공간이었으니까.
그런 중요한 공간인 욕실에서 최홍서와 함께 시간을 보냈었다.
첫 섹스 후 함께 욕조에 몸을 담그고, 서로의 몸에 닿은 채 무의미한 장난과 유치한 농담을 주고받았던 시간은 섹스만큼이나 달콤하고 황홀했었다.
그런 기억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욕실이었다.
머리카락을 닦아낸 타월 하나를 바구니에 던져 넣고, 새로운 타월로 몸의 물기를 대강 닦아낸 이해성은 마지막으로 가랑이 사이를 훔쳐내고는 세 번째 타월을 집어 들어 하반신에 두르면서 러그 위를 맨발로 벗어났다.
서초동 집에 머무르는 건 오랜만이었다.
주말은 물론이고 틈만 나면 틀어박혀 있었던 분당 집을 찾지 않은 건 더 오래됐다. 멀리 가지 않고도 자연 속에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 공들여 지은 분당 집이었지만, 유일하게 최홍서와의 추억이 없는 곳이다 보니 자연히 걸음 하는 일이 드물어진 것이다.
한남동 맨션은 최홍서가 마지막까지 지냈던 집이라는 면에서 의미가 컸고, 최홍서와의 추억이 더 많은 쪽은 서초동 집이었다.
어느 쪽이 더 소중하다고 견줄 수는 없었다. 주인이 사라진 최홍서의 방을 지키는 문지기처럼 살기를 택했을 뿐이었다. 이 집에서의 기억은 전부 함께한 추억인데, 한남동 맨션에서 최홍서는 혼자였으니까. 그곳을 지켜야 할 것 같아서...
어쩌면 한남동 맨션은 이해성에게 최홍서의 진짜 무덤과도 같은 곳이었다.
<크림 맨션>의 배우들을 그런 곳에 초대할 생각은 없었다. 욕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사적인, 거의 성스럽기까지 한 공간이었으니까.
스타일리스트가 갖춰준 루틴대로 간단한 스킨케어를 마친 이해성은 턱 부근을 넓게 쓰다듬으면서 드레스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업가나 경영인들의 외모와 의상 등 이미지와 관련된 전반적인 스타일링을 설계해 주는 전문가를 고용해 도움을 받고 있었다.
연예인도 아니고 외모를 가꾸는 게 비즈니스와 무슨 상관이 있냐던 이전 세대와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이해성 주변의 3세 경영인들 중에는 스타일리스트를 두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 덕분에 열두 살 연하의 연인에게 거부당하지 않을 수 있었는지도 모르지.
그런 생각으로 엷게 웃던 이해성의 걸음이 문득 느려졌다.
이런 식으로 어느 한순간, 그 아이의 죽음을 망각할 때가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 그 아이가 했던 말이나 행동이 떠올라 순수한 행복으로 웃었다가, 다음 순간에서야 그 부재를 떠올리고는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지금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멈춰 선 이해성에게 향수를 모아두는 장식장이 눈에 띄었다. 각양각색의 다른 모양을 가진 아름다운 유리병들이 빼곡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이해성은 천천히 그 앞으로 다가갔다.
일을 할 때는 향수를 뿌리지 않는다. 그건 어머니의 충고였다.
향기의 기준은 지극히 주관적이었다. 나에게는 향기인 냄새가 상대에게는 악취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일 외적인 부분에서 상대에게 불유쾌한 인상을 줄 수 있는 가능성 따위는 애초에 제거하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사생활에서는 기분 전환을 위해 가끔 향수를 사용했다.
자주 뿌리지 않아도 장식장에는 약 백여 개의 향수가 진열되어 있었다. 그의 주변인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컬렉션(collection)’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무엇이든 풍족한 세계에서는 풍족의 기준이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이해성은 그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 아이를 만날 때 가끔 뿌렸던 향수였다.
“무슨 향수예요?”
“왜요. 몰래 똑같은 거 사려고?”
“사면... 안 돼요?”
“안 되긴. 내일 한 병 선물할게요. 파리의 조향사에게 주문한 오더 메이드라 시중에선 구할 수가 없거든.”
“그렇게 귀한 건데 저 주셔도 돼요?”
“너보다 귀한 게 어디 있어.”
공중에 향수를 뿌리고, 그 향을 들이마신 순간, 그날의 대화마저 생생히 되살아났다. 그 아이의 붉어진 귓불까지 생생해서, 당장이라도 깨물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함께 섹스하고, 저 욕조에서 함께 피로를 풀고, 같은 침대에서 함께 잠들고, 함께 하루를 시작했던 기념비적인 날.
그날 이해성은 일정을 전부 취소하고 최홍서와 종일을 함께 보냈었다. 애인에게 푹 빠져서, 그 애인의 휴일에 맞춰 시간을 보내려고 갑작스럽게 일정을 전부 취소한 것이다. 크게 중요한 일정은 없기도 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해성에게는 전무후무한 이례적 사건이었다. 일정을 조정하라는 말에 강 실장이 두 번이나 되물으며 재확인했을 정도였다.
최홍서보다 먼저 잠이 깼지만 보채지 않고 그가 자연히 눈을 뜰 때까지 얌전히 안고 있었다. 늦은 새벽까지 괴롭힌 책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늘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어렵게만 대하던 그 아이가 조금씩 다양한 얼굴을 보여주고, 먼저 다가와 장난을 치기도 하고, 좋아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기도 하는... 그 변화의 행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런 아이가 자신과의 열정적인 잠자리 이후 품 안에 잠들어있었다. 제대로 느껴주고, 적극적으로 원해주기까지 했던 전날 밤의 기억을 몇 번이나 되짚으며 품 안의 사랑스러운 이의 벗은 어깨를 쓰다듬고, 이마와 머리카락 위에 수없이 키스했었다.
옆구리에 꼭 달라붙듯이 안겨있는 그 아이가 숨을 내쉴 때마다 맨가슴에 간지러운 숨결이 닿아왔었다. 잠결에 모르고 한 행동이겠지만, 이해성의 아랫배에는 팔까지 두르고 있었다.
자신의 곁에서 모든 긴장을 해제하고 곤히 잠든 얼굴은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그날 아침, 이해성은 그런 식으로 매일이 시작되는 삶을 그려보았었다.
연하의 연인이 놀라거나 겁먹지 않도록 천천히 실현해나갈 작정이었지만, 매일 서로의 곁에서 하루를 끝내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흥분되는 상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 침대에서부터 욕실까지, 욕실에서 파우더룸과 드레스룸을 거쳐 진짜 하루를 시작하기까지. 이해성은 최홍서의 몸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었다. 그 늦은 아침에 나누었던 키스만 하더라도 족히 수백 번은 될 것 같았다.
가벼운 애무를 곁들인 긴 샤워를 함께한 뒤, 바로 이 진열장 앞에서 그 아이를 등 뒤에서 끌어안고, 이 향수를 선물했었다.
‘이게 그 향수예요? 남산에서 같이 걸었을 때 아저씨가 뿌렸던 거?’
‘사용해 볼래요?’
직접 패키지를 오픈해 그 아이에게 새 병을 건네주었었다. 최홍서는 흔히들 하는 방법대로 양 손목의 안쪽에 한 번씩 향수를 뿌리고는 손목을 서로 비비고 마지막으로 그 손목을 귀 아래에 문질렀다.
‘그렇게 비비면 향 입자가 뭉개져서 향이 금방 날아가거나 변질될 수 있거든. 뿌린 그대로 두거나 톡톡 두드려주는 정도로만 해주면 본래의 향 그대로 더 오래 즐길 수 있어.’
‘어? 그런 건 몰랐어요.’
‘그리고 손목 안쪽보다는 접촉이 더 적은 바깥쪽에 뿌리는 게 향기가 더 오래간다고 하니까.’
샤워가운을 걸친 그 아이의 손목을 잡아 직접 바깥쪽에 향수를 짧게 뿌려주었었다.
‘진짜 아저씨 냄새다.’
손목을 코앞으로 가져가 향기를 맡으며 배시시 웃는 얼굴에 행복했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았고, 그 아이를 위해서라면 못 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연애가 처음도 아니었다. 사랑의 의미를 순수하게 바라볼 나이도 아니었고, 그런 성격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왜 그 아이에 대한 감정만큼은 그렇게 열렬했는지, 왜 그렇게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싶고 모든 것이 다 애틋하기만 했는지. ‘아웃포커싱’이니 뭐니, 그 아이 앞에서는 어떻게든 이유를 만들어 설명해 보려 했었지만... 설명될 수 없는 부분들이 훨씬 더 컸다.
그런 소중한 기억을 누군가가 훔쳐보았고, 훔쳐본 것으로도 모자라 그 기억을 이용하려고 한다.
누군들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해성은 무덤덤한 얼굴로 그 향수를 몇 군데의 포인트에 뿌려보았다. 과연 윤혜안이 이 향수에까지 반응을 할까? 이젠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하반신에 두르고 있던 타월을 벗어내고는 드레스룸으로 이동해 옷을 갖춰 입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은 재벌이 선망의 대상으로 살아갈 거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욕망의 대상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해성의 삶에는 그를 이용해 무언가를 손에 넣으려는 사람들뿐이었다. 그게 돈이든, 승진이든, 지위든.
수많은 남녀의 성적인 유혹은 일일이 말할 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그들은 이해성을 ‘일생일대의 기회’로 생각했다. 그러니 무슨 짓이든 못할 게 없었다. 자존심과 수치심을 내던지는 건 기본이었다.
계획적으로 접근해오는 사람도 있고, 덮어놓고 매달리는 부류도 있었다. 청순함을 어필하기도 하고, 섹시함을 어필하기도 한다. 무작정 옷을 벗고 덤벼들기도 한다.
그래서 오히려 이해성에게 그런 것들은 어떤 자극도 매력도 될 수 없었다. 아니, 그런 건 유혹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상대의 가치를 금액으로 환산해 스스로를 헐값에 내던지는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ARA의 이해성에게 본인의 욕망을 투영할 뿐이다.
윤혜안이 이해성을 통해 어떤 욕망을 투영해 바라보고 있는지도 대강 뻔했다. 사람들이 이해성을 통해 이루고 싶어 하는 건 대부분 거기서 거기였으니까.
그건 이해성에게 특별한 일도 아니었고, 그런 어린애가 자신의 관심을 끌기 위해 혼자 열을 올리든 말든, 아예 무신경하게 대처했을 것이다.
그 유혹의 도구로 최홍서를 끌어들이지만 않았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죽은 연인과의 추억을 자극해 환심을 사겠다니. 지금까지 경험해 본 적 없는 새로운 방식이기는 했다. 거울 앞에서 상의의 단추를 잠그던 이해성의 얼굴에 싸늘한 조소가 덧입혀졌다. 윤혜안이 그 대가에 대해서도 각오했기를 바랄 뿐이었다.
단추를 모두 채웠을 때쯤, 복도 쪽 출입문에서 강 실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비를 마무리해야 할 시간임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부사장님.”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10분쯤 후에는 다들 도착하실 겁니다. 말씀하신 대로 윤혜안 씨는 그보다 좀 더 늦게 도착하시도록 조정해 두었습니다.”
“그래요. 고마워요.”
전라에서 어느새 완벽하게 갖춰 입은 모습으로 탈바꿈한 이해성이 강 실장의 어깨를 두드리며 드레스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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