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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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부
“논현동 오피스텔 나와서 여기로 왔다고?”
최홍서의 오피스텔 현관으로 들어서자마자 박동하가 꺼낸 첫마디였다.
너무 놀랐는지, 그는 신발을 벗을 생각도 못 하고 힐끔힐끔 집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용산으로 옮겼다길래 난 당연히...”
“한강 전망 딸린 비싼 집일 줄 알았지?”
용재가 박동하의 어깨에 툭 팔을 올리며 씨익 웃었다. 박동하는 말없이 그를 멀뚱히 쳐다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혜안이 형 완전 딴 사람 됐다고.”
“아니... 영화 주연 계약도 새로 했고... 난 당연히 더 좋은 데로 옮겼을 줄 알았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리면서 박동하는 신발을 벗었다.
“영화 계약금으로 회사에서 쓴 선불금부터 다 갚으셨다는 거 아니냐? 딴 사람 수준이 아니라 새로 태어나셨다니까?”
캔맥주가 든 비닐 봉투를 조리대 위에 내려놓으면서 용재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방탕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완전히 개과천선한 아들을 바라보는 부모와도 같은 얼굴이었다.
가방을 벗어 내려놓는 동안에도 박동하는 볼 것도 없는 좁은 집안을 계속 둘러보았다.
“윤혜안이 여기서 산다고? 말도 안 돼... 이 오피스텔 안에 몇 개 더 빌려놓은 거 아니야? 이 집은 옷방, 이 집은 침실, 이 집은 거실... 내 말 맞지, 형?”
두 사람이 사 온 맥주를 냉장고에 정리해 넣던 최홍서는 박동하를 돌아보았다. 확신에 찬 그의 앳된 얼굴을 보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그 많은 명품은 다 어쨌어? 설마... 진짜 당근에 팔았어?”
“형 당근 거래도 하세요? 그런 건 위험해서 안 돼요! 하실 거면 저를 시키시던가 하시지!”
당근이라는 말에 용재가 펄쩍 뛰었다. 시간 맞춰 주문해 놓았던 치킨을 소파 테이블로 가져가면서 최홍서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말했다.
“그쪽에서 내가 윤혜안인 걸 알고 나오는 것도 아니고... 다들 그냥 매너 있고 좋은 분들이었어요.”
지금까지 괜찮았다고 앞으로도 괜찮을 거라는 보장은 없는 거라며 용재는 열을 냈다. 또 거래할 일이 생기면 그때는 꼭 용재에게 부탁하거나 동반하기라도 하겠다는 약속을 한 후에야 당근 소동은 잠잠해질 수 있었다.
“보이는 게 다인 집이라, 뭐... 구경시켜주고 말고 할 것도 없네요. 앉아있어요.”
최홍서가 권하는 대로 용재와 박동하는 주춤주춤 소파 테이블 앞에 자리를 잡았다. 소파도, 조리대에 딸린 접이식 식탁도 전부 2인용이라 바닥에 앉는 수밖에 없었다.
용재가 돕겠다는데도 거절하고, 손님 대접을 하기 위해 좁은 주방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최홍서를, 아니 윤혜안을 쳐다보던 박동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진짜 지금 뭘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고는 먼저 마시고 있으라고 내놓은 캔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뭘 보고 있긴. 새 삶을 살고 있는 혜안이 형을 보고 있는 거지.”
시간 맞춰 시켜놓았던 따뜻한 치킨을 크게 한 입 베어 물면서 용재가 간단히 대답했다.
“형은 이상하지도 않아? 어떻게 그렇게 적응이 빨라? 난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것 같은데.”
“안 좋게 바뀐 거면 몰라도 더 좋아지셨으면 그걸로 된 거지, 적응 못 할 건 또 뭔데.”
“하긴. 혜안이 형한테 제일 시달렸던 게 형이니까. 형한테는 진짜 다행스러운 일이긴 하겠다.”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용재는 박동하에게 표정으로 눈치를 줬고, 박동하는 내가 뭘 잘못했냐고, 똑같이 소리 없이 반항했다. 어차피 어떻게 해도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좁은 집이라, 최홍서는 전부 지켜보고 있었지만.
“전부 배달 음식이라 미안하네요.”
“원래 요리 못하잖아.”
신경 쓰지 않는다는 투로 얘기한 박동하가 최홍서를 힐끔 쳐다보면서 덧붙였다.
“요리 못 하는 건 똑같네.”
“당연한 소리를 해. 못 하던 걸 갑자기 어떻게 잘하냐?”
용재가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고, 박동하는 여전히 불퉁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연기는 갑자기 잘하게 됐잖아.”
치킨을 뜯던 용재의 손이 뚝 멈췄다. 그러고 보니 맞는 말이라는 표정으로 잠시 눈을 굴리던 용재가 잠시 후 자신만만하게 턱을 쳐들고 설명했다.
“그거야 원래 형이 재능이 있었는데 예전에는 연습을 게을리해서 그랬던 거고. 레슨을 받고 노력을 하시니까 숨겨져 있었던 재능이 딱 발휘가 된 거지! 형이 얼마나 열심히 하셨는데.”
“혜안이 형이 옛날엔 연습을 게을리했었다는 건 인정하는 거지?”
“뭐, 그거야... 형이 그렇긴 했었지만... 지금이 중요한 거니까...”
“음식 식겠어요. 먹으면서 얘기하죠.”
창과 방패의 싸움처럼 두 사람의 실랑이가 끝날 것 같지가 않아서 최홍서가 중재에 나섰다.
“그래, 형의 새 출발을 축하해 주려고 모인 건데. 자꾸 옛날얘기 들추지 말고. 자, 건배!”
제일 신나 보이는 용재의 주도하에 본격적으로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이사한 집에 초대해 달라는 박동하의 성화에 할 수 없이 마련한 자리였다. 윤혜안이 생전에 친하게 지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인 것 같아서, 어떻게든 거리를 두고 지내고 싶었지만, 윤혜안과 가까웠던 사람인 만큼 매몰차게 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형, 티파니는 어디 갔어요? 오랜만에 얼굴 좀 보고 싶은데.”
이쯤 되면 슬금슬금 나타날 거라 생각했던 고양이가 계속 보이지 않자, 용재는 캣타워를 돌아보고 몸을 낮춰 방바닥을 살폈다.
“아마 침대 아래에 숨었을 거예요. 시간 좀 지나면 나오겠죠. 억지로 불러내려고 하면 스트레스받을 수 있으니까...”
“열심히 공부하시더니 형 이제 고양이 전문가 다 되셨네요? 처음 티파니 데려오셨을 때는 사람이 먹는 우유 주셔 가지고 제가 식겁했었는데.”
용재가 또 한 번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최홍서를 쳐다보았다. 아니, 이번엔 거의 감격에 겨운 얼굴이었다.
“그런 기본적인 준비도 안 됐으면서 고양이를 데려온 사람이었지.”
“야, 박동하! 분위기 어색해지게 옛날 일은 왜 자꾸 끄집어내? 이럴 거면 가! 그만 먹어!”
박동하의 손에서 양꼬치를 빼앗으면서 용재가 화를 냈다. 양꼬치는 박동하가 좋아한다고 해서 일부러 주문한 음식이었다.
“혜안이 형을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게 내가 알던 윤혜안이라는 거야! 이상할 만도 하잖아! 나도 적응할 시간은 필요하다고!”
다시 시작된 두 사람의 다툼을 지켜보던 최홍서는 용재의 손에서 양꼬치를 회수해 박동하에게 쥐여주었다.
“동하 씨 말이 맞긴 해요. 용재 씨가 나를 그냥 지금의 나로 봐주는 건 많이 고맙지만... 나도 아직 나한테 적응을 못 하겠으니까요.”
최홍서에게서 양꼬치를 돌려받은 박동하는 맞은편의 용재를 향해 혀를 쏙 내밀어 보였다.
“내 말이 그 말이야. 내가 정상이고, 용재 형이 오히려 비정상이라고. 지금 이런 거, 우리 둘이 다투는데 혜안이 형이 나서서 중재를 한다는 거. 형은 이런 상황을 상상이나 했었어?”
“혜안이 형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지 말고, 지금부터의 혜안이 형은 그냥 다른 사람이라 생각해. 그럼 돼.”
그때까지의 태도와 달리 갑자기 진중해진 용재의 목소리와 표정에 이번에는 박동하도 입을 다물고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어차피 혜안이 형도 예전의 자기는 기억 못 하잖아. 이름이랑 얼굴만 같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네가 알고 있던 옛날 혜안이 형에 자꾸 끼워 맞추려고 하니까 혼란스러운 거잖아.”
늘 사람 좋게 웃는 모습만 봤지, 용재의 그런 모습은 최홍서도 처음이었다. 잠시 어색한 기운이 흐르는 중에 어디선가 우우웅, 진동음이 들려왔다. 조리대 위에 올려두었던 최홍서의 핸드폰이었다.
“먹고 있어요. 전화 좀 받을게요.”
발신인은 감독님, 강우현 감독이었다.
“네, 감독님. 윤혜안입니다.”
감독님이라는 말에 용재와 박동하가 음식을 먹다 말고 동시에 이쪽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지? 라는 얼굴이었다.
[어, 혜안 씨. 감독이 갑자기 전화해서 놀랐죠?]
강 감독의 웃음기 섞인 명랑한 목소리에 일단은 안심이 되었다.
“아닙니다. 언제든 하실 말씀 있으시면 편하게 전화 주세요.”
[응, 다름이 아니라 이해성 부사장이 몇몇 배우들을 집으로 초대하겠다고 해서.]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듣게 된 이해성의 이름은 골목 모퉁이를 돌자마자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불한당 같았다. 가슴이 뛰고 순식간에 입이 바싹 말랐다. 온몸의 땀구멍이 바짝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최홍서는 달싹이던 입술을 혀로 축인 뒤 겨우 마른침을 삼켰다.
[이건 내가 직접 전해야 할 것 같아서 전화했지. 이번 토요일에 시간 돼요?]
“몇몇 배우라면...”
[아, 그게... 아무래도 출연진을 죄다 부를 순 없으니까. 주연 배우 중에서만 몇 명 추린 모양이야. 아무리 우리 영화 투자자여도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 집으로 부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드라마에서 보는 재벌들보다는 털털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말고. 솔직히 ARA 이해성의 자택이라니, 우리 같은 사람들은 궁금도 하잖아?]
그렇게 얘기한 강우현은 호탕하게 하하, 웃어댔다. 하지만 최홍서가 궁금한 건 그런 얘기가 아니었다. 용재와 박동하를 등지고 슬그머니 돌아서면서 조리대 가장자리를 꽉 쥐었다.
“저도 초대를... 받았다구요?”
[응, 혜안 씨까지 해서 한 대여섯 돼. 왜? 토요일에 시간 안 돼? 다시 없을 기회일 텐데.]
“아니요, 그건 아닌데. 정말 저도 초대받은 게 맞나요?”
[그렇다니까. 오히려 혜안 씨는 꼭 와줬으면 하는 눈치던데?]
그럴 리가...
[오디션 때부터 이 부사장이 혜안 씨한테 조금 짓궂긴 했었잖아. 이제 혜안 씨 성실함도 알았겠다, 나름대로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는 거 아니겠어?]
정말 그럴까?
강 감독의 2층 응접실에서 ‘윤혜안’의 눈물 자국과 식은땀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그였다. 그게 불과 며칠 전의 일인데, 그사이 심경에 변화가 생겼을 리가...
[왜? 이 부사장 무서워서 그래? 그럼 혜안 씨는 못 간다고 전할까? 잘 돌려 말해줄게.]
강 감독의 목소리를 들으며 최홍서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등 뒤에서는 용재와 박동하가 치킨의 남은 다리 하나를 두고 다투고 있었다.
“아니에요... 가겠습니다. 꼭 갈게요.”
상처받을까 두렵다는 이유로, 그의 초대를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혹시라도 그가 눈에 뻔히 보이는 덫을 쳐놓고 기다리는 걸 안다고 해도, 그곳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어쩌면 그 역시도 ‘윤혜안’이 반드시 올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초대했을지 모른다는, 그런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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