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그놈이랑 다르게 저는 되게 계산적이거든요.”
송현수는 스스로를 상당히 세상 물정에 밝고 약삭빠른 인물이라 평가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해성의 눈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많은 사람을 겪어보고, 그들의 가장 탐욕스러운 욕망에 노출되어 살아가다 보면, 싫어도 사람을 가려내는 안목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눈앞의 껄렁한 남자는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계산기를 두드리고, 죄책감 없이 남을 속이는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약점을 그대로 드러내고 다니는, 이용하기 좋고 허술한 빈틈투성이였다. 싸구려 간식 하나에도 마음을 열 만큼 정에 굶주려 있으면서도, 발톱을 좀 세우는 정도로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래, 그 쓰레기들은 일부러 이런 아이들만을 노렸던 거다.
위스키를 한 모금 더 마신 이해성은 감정을 억제하며 침착하게 물었다.
“더 자세한 얘기를 들은 건 없습니까?”
“자세한 얘기라니요?”
“나와 했던 데이트 얘기나...”
송현수는 곧바로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얘기를 왜 해요? 닭살 돋게.”
이번에는 이해성이 미간을 구겼다.
“얘기한 적이 없다?”
“......”
“나랑 무슨 영화를 봤고, 어디에서 처음 만났고, 어디를 갔었고... 어떻게 사귀었다... 그런 추억 얘기, 정말 들은 적 없습니까?”
유지하고 있던 침착함이 격렬히 흔들렸다. 송현수밖에는 없다고. 정보의 출처가 송현수일 거라고 확신했었으니까. 오늘 이곳에 걸음 한 건 그것을 직접 확인하려는 의도일 뿐이었다.
송현수가 윤혜안에게 직접 털어놓지는 않았더라도, 적어도 여기에서부터 새어 나간 얘기가 윤혜안에게 흘러 들어간 것이어야 했다. 그래야만 말이 된다. 그런데... 송현수에게도 얘기한 적이 없다고?
그때까지 이해성을 전혀 어려워하지 않고 얘기했던 송현수가 움찔, 위축된 모습으로 눈치를 살폈다.
“...없어요.”
“......”
“그냥... 너무너무 잘해주기만 하는 사람이라고. 자기가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껴주는 사람이라고. 그렇게만 말했어요. 그러니까... 걱정할 거 없다고.”
그렇게 말한 송현수는 두 손으로 술잔을 꽉 쥔 채 한동안 침묵했다. 아마도 눈물을 참는 것 같았다. 내리뜬 눈꺼풀 아래 씰룩거리는 뺨을 바라보면서, 이해성은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특별히 의롭다고는 할 수 없어도, 마음을 내준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무모한 짓도 서슴지 않을 인물이었다. 떠난 최홍서의 이름이 걸린 일에 거짓을 말할 리는 없었다.
정지인, 송현수.
두 사람 외에 최홍서가 사적인 얘기를 털어놓을 상대가 누가 있었을까?
이해성이 알지 못하는 어딘가에 최홍서가 상세한 기록을 남겨놓은 일기 같은 것이 존재했고, 윤혜안이 그것을 손에 넣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사고 후, 최홍서의 가족이나 소속사보다 더 빠르게 움직인 건 이해성이었다. 사장인 명도훈이 체포되어 혼란에 빠진 UB 엔터테인먼트는 물론이고, 최홍서의 가족 역시 ARA 이해성의 예의를 갖춘 제안에 최홍서 사건의 후처리와 그의 유품에 대한 권리를 일임하다시피 했었다. 너무도 간단하게.
그 덕분에 최홍서가 방콕과 서울에 남긴 모든 유품은 이해성의 확인을 거쳤었다. 수사에 도움이 될까 싶어 휴지 한 조각 버리지 못하게 했고, 재판까지 모두 종결된 후에도 최홍서가 남긴 전부를 그대로 소장하고 있었다. 그 안에 파묻혀 살아가고 있었다.
그 어디에서도 일기 같은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물론, 이해성의 손에 들어오기 전에 누군가가 먼저 손에 넣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는 했다.
하지만 최홍서는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글로 정연하게 기록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가사 작업을 위한 작은 노트 하나가 그 아이가 남긴 기록의 전부였다.
간단히 증명하고 해결될 거라 생각했던 일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해성은 그 이름을 꺼내 보았다.
“윤혜안이라고 압니까?”
송현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느리게 끄덕였다. 뜬금없이 그 이름은 왜 꺼내냐는 얼떨떨한 표정을 보자, 이 질문도 그다지 소득이 없을 것 같아, 이해성은 갑갑해졌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진 송현수의 말은 전혀 의외였다.
“당연히 알죠. <크림 맨션>에서 홍서가 맡았던 역할, 이번에 새로 캐스팅됐잖아요.”
“......”
“며칠 전에 우리 바에도 왔었구요.”
이해성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윤혜안이 그 바에 왔었다구요?”
“지나가다가 들어와 봤다는데... 아실지 모르겠지만, 알려진 이미지가 좀 뭐랄까, 사치스러운 연예인이었거든요. 지나가다가 들러도 우리 가게 같은 곳은 안 올 것 같은 이미지였는데. 의외였죠.”
송현수는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 분명했다. 어깨를 으쓱이며 그렇게 말하고는 코끝이 빨간 얼굴로 피식 웃었다.
“실물로 보니까 홍서랑 닮긴 닮았더라구요. 그래서 그런가... 소문처럼 그렇게 인간쓰레기로 보이진 않던데.”
역시 송현수는 쉬운 사람이었다.
친구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간단히 사람에 대한 인상을 바꿔 생각할 만큼.
“현수 씨가 보는 눈이 없네요.”
“......”
“닮았는지 전혀 모르겠던데.”
송현수는 이번엔 이해성을 보면서 히죽거렸다. 친구를 놀리기라도 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누가 홍서 닮았다고 하니까 기분 나쁘신가 봐요.”
이런 식으로 자기를 대하는 사람은 처음이라 이해성은 순간적으로 약간 당황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싫지 않았다. 세상을 떠나버린 친구, 최홍서를 위해서라면 아마도 위험한 일까지 마다하지 않을 이 칠칠치 못한 청년을 나쁘게 볼 수는 없었다.
이거 참.
친구와 닮았다는 이유로 금세 사람을 좋게 본다고, 그를 쉽다고 할 것도 아니군.
“근데 갑자기 윤혜안은 왜요?”
“현수 씨한테 홍서에 대해서 뭘 묻거나 하진 않았습니까?”
“음... 아니요. 제가 누군지 알고 그러겠어요.”
“......”
“오히려 제가 먼저 말 걸었어요. 그 역할, 홍서가 하기로 했던 거니까 잘 부탁한다고. 내가 홍서 친구라고.”
“그게 전부입니까?”
송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송현수가 정보의 출처가 아니라는 것, 윤혜안이 송현수를 찾아가서도 최홍서와 관련된 질문을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들은 분명 의외였다. 그러나 윤혜안이 최홍서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자기가 최홍서의 친구라는 걸 윤혜안은 몰랐을 거라고. 지나가다가 그 바에 들어갔다는 윤혜안의 말을 송현수는 그대로 믿는 것 같았지만, 이해성의 생각은 달랐다.
윤혜안이 우연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송현수를 찾아가기까지 했던 것을 보면 앞으로 더 적극적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해성은 케이스에서 명함을 꺼내 송현수에게 건넸다.
“홍서에 대해서 캐내려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이쪽으로 연락해 줘요. 내 비서하고 연결될 겁니다.”
“왜...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누가 홍서 해코지한대요?”
얼떨결에 명함을 받아드는 송현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해성은 그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확신을 담아 신중하게 얘기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약속하죠.”
ARA 이해성의 약속에 송현수는 곧바로 안심하는 기색이었다.
ARA 이해성 같은 사람은 못 할 일이 없다고, 송현수 역시 최홍서처럼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겠지.
못 할 일이 없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 아이의 이름을 더럽히는 짓거리를 두 번 다시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술을 마저 비우고 가겠다는 송현수를 두고 먼저 일어난 이해성은 계산을 한 뒤 바를 나섰다.
2층짜리 낡은 건물을 빠져나오자마자 담배에 불부터 붙였다. 어느덧 제법 쌀쌀해진 가을 공기를 연기와 함께 깊숙이 들이마셨다.
차가 들어올 수 없는 좁은 골목이라, 세단은 골목 입구에서 대기 중이었다. 이해성을 발견하고 운전석에서 내리는 수행원의 모습이 보였다.
“잠깐만요!”
자동차를 향해 걸어가던 이해성을 다급한 목소리가 불러 세웠다.
담배를 손가락에 건 채, 이해성은 무릎을 짚고 숨을 몰아쉬는 송현수를 기다려 주었다.
꿀꺽, 침을 삼키며 허리를 편 그는 상기된 목소리로 이해성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의지가 깃든 눈빛은 도전적이기까지 했다.
“저한테 질문 많이 하셨으니까, 제 질문에도 하나만 대답해 주세요.”
“나랑 딜(deal)을 하자는 겁니까.”
ARA 이해성을 상대로도 위축되지 않는 배짱만큼은 알아줘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실은 배짱 때문이 아니라, 순수함, 순진함 때문이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상대가 재벌이든, 정치가든, 왕이나 유명인이든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이해성은 웃었는데, 송현수의 얼굴은 진지하다 못해 비장하기만 했다. 머릿속으로 오직 하나만 생각하고 있는 어린애의 얼굴이었다.
“이서경.”
“......”
“죽이셨어요? ....죽였죠?”
그건 전혀 예상치도 못한 질문이었다. 손가락 사이에서 타들어 가고 있는 담배를 툭 쳐서 재를 떨어내면서 이해성은 태연히 되물었다.
“...그런 건 왜 묻습니까?”
“명도훈도 죽여 주세요!”
“......”
이번엔 이해성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송현수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음절 하나 더듬지 않았다. 깨끗할 정도로 단호하게, 누구를 죽여 달라고 소리쳤다.
이해성을 올려다보는 눈빛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누구의 생명을 살려 달라는 요청보다도 더 정의로운 요구를 하고 있는 것처럼.
“홍서한테는 명도훈이 이서경보다 더 개새끼예요! 난 그나마 돈이 덜 돼서 그렇게, 험한 꼴까지는... 안 당했지만, 흑... 호, 홍서는... 흐흑... 홍서는 돈이 되니까...”
입술을 실룩거리며 말을 이어가던 송현수는 결국엔 울음을 터뜨렸다.
“명도훈도 죽여 줘요! 그래야 홍서가 눈을 감아요! 홍서 사랑한다면서요! 그럼 그 개새끼 죽여 줘요! 죽이라구요!”
이제 그는 이해성에게 화를 내듯이 악을 썼다. 한 번 터진 감정의 둑을 그는 좀처럼 추스를 수가 없는 듯했다.
이해성은 감정이 격해진 송현수를 자신의 세단에 태워 보냈다. 집까지 잘 데려다주도록 수행원에게 송현수를 인계했다.
수행원에게는 택시를 타고 귀가하겠다고 했지만, 더 외진 골목으로 올라가 어두컴컴한 낙산공원을 오랫동안 쏘다녔다.
감옥살이 중인 명도훈이 이서경보다 더 개새끼. 적어도 동등할 정도의 개새끼라는 사실을 물론 모르지 않았다. ‘X군 스캔들’과 관련해 어쩌면 검찰이나 재판부보다 더 많은 정보와 진실을 수집했던 게 이해성 본인이었으니까.
‘홍서 사랑한다면서요! 그럼 그 개새끼 죽여 줘요!’
송현수가 절절히 부탁했다는 이유로 명도훈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범벅이 되어 울부짖던 송현수의 얼굴은 이해성의 가슴에 강렬한 무언가를 남겼다.
자신의 행동에는 아무 목적도 없다고 윤혜안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아무 목적도 없는 사람이라면 정보를 알았더라도 최홍서를 흉내 내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송현수가 있는 곳까지 찾아오는 짓은 더더욱 하지 않았겠지.
어디에서 정보를 얻어냈는지는 밝혀내지 못했어도, 이쪽도 손 놓고 기다리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서울의 동쪽 야경을 오랫동안 말없이 쏘아보고 있던 이해성은 마음을 굳힌 듯 한순간 걸음을 돌렸다.
휘황찬란한 빛 무더기 속으로 섞여 들어가는 그의 등에 어둠이 진하게 묻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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