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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백-71화 (71/185)

71화

정지인도, 이한도, 강 실장까지.

주변 사람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안다. 죽은 이의 그림자를 너무 좇다 보면 이승의 생기를 잃게 되는 법이니까. 그래서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들 하는 거니까.

하지만 아직은 놓을 수가 없었다.

잊기 위한 노력은, 망령을 붙들고 그리움에 시달리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는 것을 이미 알기에.

언젠가 시간에 의해 자연스럽게 풍화된다면 그건 어쩔 수 없겠지.

그러나 감정이 그 아이를 원하는 동안에는 그저 충실히 따르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고 홀로 고통받으며 지독히 외로웠을 아이. 그런 아이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려 한다면, 이 세계에서 그 아이의 자리가 완전히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잊는다는 게, 잊으려 한다는 게, 저 세계로 가버리라고 그 아이의 등을 떠미는 행동 같아서. 그럴 수가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오랫동안 기억하고, 할 수 있는 한 가장 먼 미래까지 사랑하고 싶었다. 함께였다면 어차피 그랬을 테니까. 곁에 없게 되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그래서 사용하던 방도 정리하지 않았고, 이 영화에서도 손을 떼지 않았다. 이 세계에 존재했던 최홍서의 온기가 최대한 오랫동안 남아있기를 바라니까.

이해성은 두 손으로 얼굴을 훑어내면서 기대고 있던 머리를 세웠다.

그리고 여전히 비어있는 옆자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서서히 잃어간 것이 아니었다.

분명 손으로 쓰다듬고, 입과 눈을 맞추고, 체취에 코를 묻고, 팔 안에 안고 있었는데, 바로 다음 순간 어떤 예고도 없이 빼앗겨버렸다. 연기가 되어 날아간 것처럼.

어쩌면 그런 식으로 잃어버렸기 때문에, 더욱 미련이 깊은지도 모르지. 어떤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고,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실이었으니까. 조금씩 허물어져 가는 것과 단번에 송두리째 사라지는 것은 충격의 종류가 완전히 달랐다.

아직 더 사랑하고 싶었다.

짝사랑도 어차피 혼자 하는 사랑이었다. 세상에 없는 사람을 혼자 사랑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주지 못한 사랑이 너무 많이 남아서 어디에 둘 곳이 없으니, 소진될 때까지 그저 사랑할 것이다.

“음...”

신음 같은 한숨과 함께 이해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혼을 바닥에 질질 끌듯이 천천히 응접실을 가로지르는 그의 뒷모습이 대리석 바닥 위에 길게 그림자 졌다.

그는 마지막으로 실내를 돌아보았다. 달빛이 비쳐 드는 신비로운 빈 공간은 이곳에서 함께했던 기억들이 묻혀있는 무덤 같았다.

그는 한 뼘 정도 문을 열어둔 채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송현수의 최신 정보를 업데이트해 대학로를 찾아간 것은 며칠 후였다.

밤늦은 시간. 주말임에도, 대학로의 끄트머리쯤 자리한 바 주변은 한산했다. 목이 좋은 곳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바의 외양도 그다지 트렌디한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치형의 격자 창문으로 새어 나오는 오렌지색 불빛만큼은 꽤 아늑해 보였다.

“부사장님, 들어가 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조용한 목소리가 운전석에서 시간을 상기시켜 주었다.

창문을 통해 언뜻언뜻 보이는 사람들의 웃는 모습을 지켜보던 이해성은 담배 필터를 빨아들이며 고개를 돌렸다.

자동차 모니터가 새벽 1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반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꺾어버렸다. 일부러 이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15분쯤 후에는 송현수의 퇴근 시간이었다.

뒷좌석에서 내려 곧장 출입문을 향해 걸어갔다. 예상대로 문에는 작은 종이 매달려 있었다.

바의 내부 인테리어는 상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생각보다 넓다는 것과 생각보다 손님이 많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어서 오세요.”

R&B 뮤지션, 베이비페이스(Babyface)의 음악이 느긋하게 흐르는 실내에는 조명 대신 테이블마다 밝혀둔 티라이트 불빛이 실내를 비추고 있었다. 완벽히 90년대풍이군. 실내에 대한 감상을 짧게 마친 이해성은 이번엔 송현수를 찾았다. 바 카운터 안쪽에서 칵테일을 만들고 있는 그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해성은 카운터의 끝자리를 차지했다.

다가오는 이해성을 향해 영업용 미소를 지어 보이던 송현수의 얼굴이 한순간 다른 빛을 띠었다. 그 미묘한 변화를 보자마자 이해성은 알 수 있었다.

ARA의 이해성을 알아본 얼굴이 아니라, 세상을 등진 제 친구의 연인을 알아본 얼굴이었다.

“저희 가게에는 처음이시죠?”

그러나 그 표정은 찰나였을 뿐, 카운터 위에 메뉴 북을 내려놓는 송현수의 얼굴은 다른 손님들을 접객하는 태도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해성은 손때 묻은 얇은 책을 다시 송현수 쪽으로 밀어놓으며 말했다.

“추천해 주는 걸로 마시죠.”

손님의 옷차림이나 행동거지, 표정이나 말투를 통해 취향과 입맛, 그날의 기분과 컨디션까지 읽어내 그에 맞는 레시피의 칵테일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좋은 바텐더의 소양 중 하나였다.

“그럼 준비해 보겠습니다.”

여유 있는 얼굴로 즉답한 송현수는 지체하지 않고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카운터의 손님들과 대화까지 나눠가면서.

보고된 서류 속에서만 접했던 송현수를 실물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우리 홍서가, 그래도 정을 붙이고 지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

홍서가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홍서의 등골을 빼먹는다고, ‘레이어드’ 멤버들을 고깝게 보았었다는... 홍서처럼 명도훈에게 착취되었던 피해자. 송현수.

그런 이유들로 송현수를 애틋하게 바라볼 만큼 무르고 감상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그래도, 어딘가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누군가와 절친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대상에게 유한 감정을 가진다는 것.

그건 ARA의 부속으로서,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하도록 트레이닝 받으며 살아온 이해성에게는 처음 겪어보는 경험이었다.

이곳에 이미 없으면서도, 최홍서는 이해성에게 새로운 감정, 새로운 경험을 제공했다. 그런데 어떻게 잊으려 하겠는가. 아직 살아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런 생각으로 씁쓸히 혼자 웃는 사이, 바텐더가 코스터 위에 칵테일 한 잔을 내려놓았다.

“손님께 추천드리는 칵테일입니다.”

“......”

송현수는 칵테일 명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손님의 시음을 기다리는 듯 정면에 서서 떠나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투명한 연녹색의 칵테일을 살짝 맛본 이해성은 입술을 열지 않고 미소 지었다. 비웃음이나 냉소가 아니라 오히려 친근하고 편안해 보이는, 어깨에 힘을 뺀 웃음이었다.

“김렛(Gimlet)이네요.”

“진과 라임 주스를 1 대 1로 섞었습니다. 요즘엔 김렛을 상큼하게 만드는 곳이 많은 추세지만요.”

바텐더의 설명처럼, 알콜 도수 30도의 제대로 된 김렛이었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독한 술의 움직임을 느끼면서, 이해성은 앞에 선 송현수를 슬쩍 쳐다보았다.

“내가 송곳에 찔린 사람처럼 보였나 봐요.”

“그렇게... 즐거우실 것 같지는 않아서요.”

“그래요. 그렇지.”

턱 주변을 넓게 쓸면서 이해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렛은 T자형 자루를 가진 나사송곳을 의미했다. 송곳같이 날카롭게 찌르는 맛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송현수가 내놓은 김렛은 설탕을 추가해 달달하지도 않았고, 라임 주스의 비율을 높여 상큼하지도 않았다. 이름 그대로, 송곳으로 목구멍을 찌르는 듯했다. 지금의 이해성에게 잘 어울리는 칵테일이었다.

그의 연기는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분명 훌륭한 바텐더가 될 자질이 있어 보였다.

“내가 누구인지는 이미 아는 것 같으니까. 오늘 퇴근 후에 시간 좀 내주겠습니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송현수는 당황하지 않았다.

“10분쯤 있으면 퇴근이에요. 근처에 조용한 술집이 있으니까 거기서 기다려 주세요. 여기는 제가 일하는 곳이라 좀...”

김렛을 깨끗이 비운 후, 이해성은 먼저 바를 나섰다.

송현수가 일러준 술집은 더 외진 곳에 있는 레코드 바였다. 나이 지긋한 남성이 카운터 뒤쪽에 빽빽이 레코드를 꽂아놓고 혼자 바를 운영하고 있었다.

손님도 두 명뿐이었고, 돈벌이에 영 관심이 없어 보이는 주인은 단골 손님인 듯한 그들과 세상살이 얘기에 푹 빠져있었다.

이해성은 가장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 위스키를 한 잔 주문했다.

5분쯤 뒤에 송현수가 도착했다.

둘러메고 있던 커다란 크로스백을 벗어 옆자리에 내려둔 송현수는 이해성과 같은 술을 주문했다. 서로 안면이 어느 정도 있는지, 주인은 송현수 몫의 잔을 두고 가면서 그의 어깨를 한번 꾹 눌렀다.

“그다지 놀라지 않은 것 같네요.”

“ARA의 이해성이 찾아온 거요?”

아, 이해성 님이라고 해야 되나? 라고, 송현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을 덧붙였다.

“홍서한테서 내 얘기를 조금은 들었나 봐요.”

정지인에게 듣기는 했었다. 송현수는 대략적으로나마 이해성과 최홍서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고.

“네.”

“어느 정도나 알고 있죠?”

“......”

뭐 그런 걸 묻냐는 표정이었다. 이해성은 침묵으로 대답을 재촉했다.

“처지가 비슷해서 다른 애들보다는 마음을 터놓긴 했어도, 홍서나 저나 남한테 시시콜콜 떠드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위스키를 희석시키려 얼음이 든 잔을 빙빙 돌리면서, 송현수는 미간을 좁히고 기억을 더듬었다.

“카메라 앞에서나 생글거리지, 생전 웃음이 없는 놈인데 실실거리고 다니길래 제가 좀 귀찮게 물어봤었어요. 처음엔 시치미 떼더니 며칠 끈질기게 괴롭히니까 실토하더라구요.”

“......”

“연애하는 거 맞다고.”

미동도 없이 차분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해성의 시선이 갑자기 이곳저곳으로 어지럽게 흩어졌다. 무슨 말이라도 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거리고, 몇 번이나 이로 입술을 긁어댔다. 그러다 잔 속의 독주를 들이켰다.

후우...

잔을 내려놓으며 이해성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홍서가 자신을, 자신과의 관계를 뭐라고 얘기했었는지. 제삼자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어쩐지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 상대가 ARA 전자 이해성이라는 걸 알고... 솔직히 전 연애라고 생각 안 했지만요.”

“......”

“재벌하고 연예인 나부랭이잖아요. 어차피 진실이 뭐든 세상 사람들은 무조건 스폰 관계라고 할 거고. 전 스폰이든 연애든, 홍서한테 잘해주고 아껴주는 사람이면 재벌이라도 상관없다 생각했어요. 아니.”

단호하게 부정의 말을 뱉은 송현수는 이해성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발아래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둑한 바의 조명 아래, 송현수의 서글서글한 눈매가 촉촉했다.

“오히려 홍서한테 그렇게 잘해준다는 사람이 재벌이어서 더 잘됐다 싶었어요. 그런 사람 그늘에 있는 동안에는... 잠깐이라도 홍서가 편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을 하는 동안 송현수의 시선은 점점 아래를 향했다. 그와 함께 목소리도 점점 수그러졌다. 아직 충분히 얼음이 녹지 않은 위스키를 들이켠 송현수는 손등으로 입가를 닦아내며 툭 던지듯 덧붙였다.

“그놈이랑 다르게 저는 되게 계산적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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