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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백-70화 (70/185)

70화

최홍서는 박동하의 손에서 가방을 빼앗았다.

“이럴 거 없어요. 용재 씨 금방 도착해요. 먼저 가볼게요.”

대문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가자, 긴장과 함께 다리도 풀려버렸다. 최홍서는 저택의 대문에 기대 바닥에 주저앉았다.

용재가 도착하려면 앞으로도 최소 20분은 걸릴 것이다. 그래도 저 집 안에 앉아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평창동에서는 택시도 잘 잡히지 않았다. 용재가 올 때까지만 어떻게든 버티면 된다.

열 때문에 입술이 바싹 말라 있었다. 혀로 입술을 축이면서 티셔츠 소매로 땀을 닦아냈다.

뒤풀이만이라도 참석하려고 왔던 것일까? 제작 과정에 최대한 적극적으로 참석하겠다고, 그렇게 말했으니까? 아니면... 윤혜안을 감시, 관찰하려고?

눈물 자국이나 겁에 질린 표정, 식은땀 따위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몰아붙여 가던 그의 낯선 표정과 목소리를 떠올리자, 다시 또 순식간에 눈물이 고였다.

“이깟 일에 왜 질질 짜는 건데? 네가 뭐 언제는 곱게 자랐어?”

스스로에게 욕을 퍼부으면서 손등으로 우악스럽게 눈물을 훔쳐냈다. 눈물을 훔쳐낸 손등을 다시 티셔츠의 옆구리에 아무렇게나 문질렀다.

최홍서를 흉내 내지 말라며 무서운 목소리를 내도, 최홍서가 아닌 다른 누군가인 척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영리하지 못했다.

최홍서를 흉내 내지 않기 위해서 그와의 추억조차 보듬을 수 없다면, 윤혜안으로 깨어난 이 삶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의 경고... 부탁을 들어주고 싶어도,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그냥, 혼자 조용히 그랬던 거잖아... 나 봐달라고 하지도 않았고, 흑, 사랑해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왜, 왜 그렇게... 흐흑...”

눈물이 멈추기는커녕, 이제는 서러움에 훌쩍거리기까지 하고 있었다. 말을 듣지 않는 얼굴을 세운 무릎 위에 묻어버렸다.

용재가 도착할 때까지 그대로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우는 것도 힘들었지만, 울음을 중단시키려 노력하는 것도 에너지가 요구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20분은 걸릴 줄 알았는데 능력 있는 매니저인 용재는 그보다 더 일찍 도착했다. 최홍서의 상태를 직접 확인한 그는 묻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다. 그런데도 일단은 아무것도 묻지 않아 주었다. 그게 고마웠다.

용재는 최홍서의 몸을 들어 올리듯이 부축해 뒷좌석에 앉도록 도와주었다. 이럴 때는 용재의 커다란 체격이 참 든든했다.

“형, 지금 바로 병원에...”

아니라고, 최홍서는 고개를 저었다.

“집으로 가줄래요? 나 좀 잘게요.”

그 말만 겨우 던져놓고는 용재가 덮어준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자동차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봐달라고 하지도 않았고, 사랑해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그가 윤혜안을 그렇게까지 몰아붙이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어떻게 모르겠는가.

최홍서가 소중하니까.

지금의 나에게 그와의 기억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원동력인 것처럼, 그에게도 아마... 비슷하기 때문이겠지. 윤혜안에게서 보이는 우연의 집합들이 그에게는 도무지 우연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현상일 테니까. 윤혜안을 조사했다면, 더더욱 안 좋은 쪽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겠지. 도무지, 좋은 소문은 단 하나도 들을 수가 없었던 윤혜안이니까. 윤혜안으로 깨어나기 전에도, 깨어난 후에도.

그러니까 이해성은 잘못이 없었다.

그는 나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아주 많이 사랑해 주고 있었다. 아주 많이, 아주 깊이. 지금도, 여전히.

“원망하듯이 말해서, 미안해요... 아저씨 아무 잘못도 없는데. 미안해요.”

담요 안에서 흘린 뜨거운 눈물이 관자놀이를 지나 땀에 젖은 머리카락으로 스며들었다.

윤혜안이 나가버린 응접실에서 이해성은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팬츠 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찌른 채 바닥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왜 여기에서 울고 있었지?

개인적으로 안 좋은 일이 있어서, 혼자 조용히 있을 수 있는 장소를 찾다가, ‘우연히’ 이 응접실까지 오게 돼서...

그럴 리가.

그렇게 우연과 우연과 우연과 우연과 우연이 연속으로 겹치는, 그것은 더 이상 우연일 수 없었다. 우연으로 받아들일 생각도 없었다.

문제는 그 사적인 정보들을 윤혜안이 대체 어디서, 어떻게, 누구를 통해 손에 넣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최홍서의 생전 신변과 윤혜안에 대해 다시 조사하게 했지만, 딱히 특별하거나 새로운 부분은 발견되지 않았다. 윤혜안이 상당히 지저분하게, 그리고 부도덕하게 살아온 인물이라는 점만 확실시되었을 뿐이었다.

사생활뿐만이 아니었다.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나 스태프들에게도 패악을 부려 문제를 일으켰던 사건이 한둘이 아니었고, 작품에 임하는 태도도 상당히 불량해 제작자들이 꽤나 애를 먹었던 것 같았다. 음주 운전으로 적발되었다가 누군가 윗선의 개입으로 무마된 흔적도 여러 건 발견되었다.

‘뒤늦게 합류하게 된 만큼 작품과 캐릭터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더 성실하게 임하겠습니다.’

식사 모임에서 윤혜안의 인사말을 떠올린 이해성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떨며 실없이 픽 웃었다.

그런 인간이 ‘성실’을 입에 담다니. 어불성설도 정도가 있지.

최홍서와 윤혜안은 굳이 따지자면, 연예계에서 서로 가장 거리가 먼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극악의 상황에서도 성실함과 끈기로 재능을 키우며 기회를 잡기 위해 발버둥 쳤던 최홍서와, 능력을 갈고닦는 것은 뒷전이고 스폰서를 잡는 쉬운 길을 택해 손쉽게 인기를 얻고 그것을 휘두르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던 윤혜안.

그런 윤혜안이 최홍서를 흉내 내려 한들, 과연 얼마나 갈 수 있을까.

이해성은 창가로 천천히 걸어갔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이어진 통창으로 어둠에 잠긴 정원과 저 아래, 더러운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별 무리처럼 반짝거리는 서울의 야경이 내려다보였다.

외부에서 조사하는 것만으로는 역시 한계가 있었다. 직접적인 인터뷰를 통해 더 세세한 정보를 끌어내야만 했다.

재킷에서 핸드폰을 꺼내 통화를 시도했다.

주말 저녁,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지 수신자는 신호가 몇 번 가기도 전에 곧 밝은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형님.]

“지인 씨, 한동안 못 봤는데 잘 지냈어요?”

[작품 끝나고 전 요즘 백수잖아요. 잘 지내고 있어요. 형님이 영화 때문에 바쁘시죠?]

“투자자가 하는 일이야 이리저리 참견하면서 사람들 귀찮게 구는 것밖에 없는데, 뭐.”

[형님이 그런 투자자가 아니신 거 다 아는데요.]

지인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 뒤로 ‘해성이 형이에요?’라고 묻는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한이, 같이 있나 봐요?”

[네, 편의점 심부름 보냈었거든요. 이제 왔네요.]

연인의 심부름으로 편의점에 다녀오는 한서 그룹의 이한을 상상하니, 이해성의 얼굴에 소리 없는 웃음이 흘렀다.

여전히 참 보기 좋은 커플이었다. 참... 많이 부러운 커플이었다.

[계열 분리 마무리까지 얼마 안 남아서, 형님 그것 때문에도 정신없으시죠?]

“그거야 워낙 오래전부터 차근차근 준비해왔던 일이라, 이제 남은 건 사인 정도뿐이라서.”

안부 인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이해성은 본론을 꺼내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다.

“지인 씨, 오늘은 다른 게 아니라...”

[네.]

“홍서...”

[......]

그 이름을 꺼내자마자 둘 사이에 서걱거리는 침묵이 잠시 감돌았다. 이해성에게도, 정지인에게도, 아직 최홍서라는 이름은 저항감 없이 매끄럽게 꺼낼 수 있는 얘기가 아니었다.

“홍서가 지인 씨 외에 내 얘기를 자세히 했을 만한 사람이 있을까요?”

[부사장님 얘기요?]

“나와의 관계나, 아니면 나와의 사이에서 있었던 세세한 추억 같은 것들.”

[......]

“나와 함께 봤던 영화, 함께 갔던 장소...”

[형님도 잘 아시겠지만, 그 녀석, 누구에게 속을 털어놓거나 의지하는 성격이 아니잖아요. 저에게도 형님과 만나고 있다는 얘기도 하지 못했을 정도니까...]

예상했던 답변이 그대로 돌아오자 이해성은 속이 갑갑해졌다.

“그래도 혹시라도 만약 누군가에게 얘기했다고 한다면, 떠오르는 사람 없어요?”

이해성의 목소리에서 초조함과 간절함이 묻어났다. 드문 일이었다.

[그럼 아마 저 외에는 현수밖에 없을 거예요. 적어도 제가 아는 선에서는 그래요.]

현수. 송현수.

물론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강 실장이 조사해온 최홍서와 관련된 정보들은 거의 빠짐없이 머릿속에 넣고 있었으니까.

“그래요, 고마워요.”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혹시 홍서 신변에 내가 놓쳤던 게 있었나 싶어서. 일은 무슨 일이 있겠어요. 영화도 다시 들어가고 하니까, 그 녀석 생각이 더 나서... 그래서 그러지.”

[바쁘시더라도 조만간 시간 좀 내주세요. 한이랑 식사 자리라도 만들게요.]

“그래요. 두 사람 만나는 거야 늘 좋지.”

통화를 끝낸 이해성은 문득 진한 피로감을 느꼈다. 창문 앞을 떠나, 소파로 걸어갔다.

조금 전 윤혜안이 앉아있었던 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조금 전 윤혜안이 앉았던 자리의 바로 옆자리였다.

이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최홍서는 말했었다.

‘그렇게 잘해주시는데 어떻게 안 좋아해요.’

그냥 좋아한다고 하면 될 것을.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그 아이다운 표현이었다.

그래도 그게 더 좋았다. 한마디도, 내 앞에서 진심이 아닌 말은 하지 않던, 약간은 긴장한 듯 늘 진지했던 표정. 그조차도 내 눈엔 마냥 귀여웠다는 걸 알면, 또 골내겠지. 귀여운 표정 하지 않았습니다, 라며 딱딱한 말투로.

최홍서가 앉아있었던 옆자리를 내려다보며 추억에 피식피식 웃던 이해성은 고개를 젖혀 등받이에 뒷목을 기댔다. 그리고 팔을 들어 눈을 가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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