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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백-68화 (68/185)

68화

그렇게 이해성에 대한 얘기는 일단락되는 듯했다. 자신들이 만나본 재수 없는 재벌이나 권력자들에게로 어느새 화제가 옮겨갔다.

그 틈을 타서 최홍서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 감독이 그것을 놓치지 않고 불러 세웠다.

“혜안 씨, 어디 가?”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어, 그래요. 복도로 나가서 오른쪽... 참, 아까 다녀왔었지?”

고개를 끄덕이며 가보라고 손짓하는 강 감독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해성이 화제에 오른 동안 살짝 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화장실 앞 널찍한 파우더룸의 세면대에서 찬물로 얼굴을 몇 번 씻어냈다. 물기를 매단 얼굴을 들었을 때, 거울 속에서 박동하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

최홍서는 페이퍼타월을 두어 장 빼내 얼굴의 물기를 닦으며 천천히 돌아섰다.

“형. 아까 그건 또 무슨 얘기야?”

“무슨 얘기요?”

“형 먹어도 안 찌는 체질이잖아. 숙소 생활할 때도 우린 스케줄 끝내고 배고파 죽을 것 같아도 굶고 잤는데, 형 혼자 야식시켜 먹고 라면 끓여 먹고 그랬어. 새벽 2시, 3시에도. 방문 틈으로 라면 냄새 맡으면서 울면서 잔 적도 있다니까?”

“......”

“근데, 먹으면 찌는 체질이라니. 차라리 기억을 못 하면 못했지 왜 그렇게 말한 건데?”

“그게...”

등 뒤의 세면대 가장자리를 집으면서 최홍서는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관리 중인데 음식을 권하셔서, 거절하려다 보니까...”

박동하는 여전히 시원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특별히 의심한다기보다는 기억을 잃고 이전과 달라진 윤혜안에게 혼란을 느끼는 것 같았다.

“형이 역할 때문에 관리하고 운동한다는 것도 적응 안 되는데... 운동 다닌다는 거 진짜였어? 나한테까지 거짓말할 거 없잖아.”

식당에서 이미 한번 물었는데도 다시 또 확인하려는 박동하에게 최홍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최홍서를 유심히 바라보던 박동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진짜.”

“......”

“우리 술 언제 마실까? 집으로 불러준다며? 형, 내 번호 갖고 있긴 해?”

“핸드폰에 저장이 돼 있긴 해서...”

“그거 예전 번호 아니야? 번호가 뭔데?”

최홍서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연락처로 들어갔다. 박동하가 불쑥 핸드폰 액정 위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어디 봐. 진짜 옛날 번호잖아? 그거 삭제하고 다시 입력해 줄게.”

“아니, 내가 직접 해도 되는데...”

핸드폰을 가로챈 박동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썰렁한 연락처네. 응? 뭐야? 웬 당근 판매자?”

낮에 핸드폰을 바꾸고 빈 연락처에 처음으로 저장한 게 이해성의 번호였다. 연락은 할 수 없더라도 적어도 핸드폰 속에 그의 번호를 가지고 있고 싶었다. 예전에 서로를 저장했던 것과 같은 이름으로.

누군가 ‘당근판매자님’이라는 저장명을 발견하더라도 결코 이해성이라고 의심은 못 하겠지만, 괜한 긴장감에 최홍서는 입술을 축였다.

“형이 당근을 해?”

“아, 그... 안 쓰는 명품들 정리를 해볼까 해서.”

“아무리 안 쓰는 물건이라고 해도, 버리면 버렸지 윤혜안이 당근을 한다고?”

전화번호를 입력해 준다고 한 것도 잊었는지, 박동하는 손을 늘어뜨리고 최홍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뭐야? 진짜 기억을 잃기라도 했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니. 예전 기억을 잃었다고 사람 본성이나 능력까지 바뀔 수가 있어?”

“......”

“그건 기억의 문제를 떠나서 그냥 다른 사람이 돼버린 거 아니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요?”

“시나리오 공부를 그렇게 꼼꼼하게 해오고, 캐릭터 분석 노트까지 만든다고? 형이? 그것도 감독님한테 칭찬을 들을 정도로?”

“......”

“애초에 이런 자리에 착실히 참석한 것부터가 윤혜안한테는 말이 안 되는 일이지. 아니, 캐스팅된 것부터가 기적 아니야?”

박동하는 상당히 혼란스러워 보였다. 얼굴을 한번 거칠게 훑어내고는 마른침을 삼키고 말을 이어갔다.

“형한테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우리끼리 툭 까놓고 말해서 형 연기력이 강 감독님 영화에 뽑힐 정도는 아니잖아. 기억을 잃었다고 능력이 갑자기 좋아진다는 게, 그런 게 가능한 거야?”

박동하의 혼란은 최홍서가 듣기에도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달리 해줄 말이 없기도 했다. 실은 내가 겉모습만 윤혜안일 뿐 최홍서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내가 일부러 기억 안 나는 척한다고, 동하 씨는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했어요?”

“솔직히... 그랬어.”

“동하 씨가 알던 예전의 나는... 전부 기억하면서도 기억 안 나는 척 연기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던 거죠?”

고민하는 듯 보였던 박동하는 마음을 굳힌 듯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뿐만이 아니라 아마 형을 아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할 거야.”

“......”

“근데 또 동시에 내가 이렇게까지 건드렸으면 못 참고 본성을 드러냈을 사람이기도 해. 그래서 너무 이상하다는 거야.”

“......”

“얼굴만 똑같지... 말투도 표정도, 그냥 완전히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말끝을 흐린 박동하는 시선을 피해버렸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그는, 섬뜩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어쩌면 금세 적응하고 받아들인 용재보다 박동하의 반응이 더 일반적일 수 있었다.

박동하는 쥐고 있던 핸드폰에 자신의 번호를 입력하고 최홍서에게 다시 건넸다.

“핸드폰도 ARA로 바꿨네? 안드로이드 폰은 절대 안 쓰던 사람이.”

핸드폰을 받아드는 최홍서의 손을 내려다보면서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파우더룸을 빠져나가다가 뒤따라오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뒤를 돌아봤다.

“형은 안 들어가?”

“먼저 가요. 좀 더 한숨 돌리고 갈게요.”

“왜 그래, 몸이라도 안 좋아?”

파리해 보이는 창백한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박동하가 미간을 좁혔다.

“아니요, 그냥 긴장을 좀 해서 그래요. 먼저 들어가요.”

박동하에게 추궁을 당해서일까.

식당에서보다 더 몸이 안 좋았다. 그나마 봉안당에서 쓰러졌을 때와 같은 극심한 울렁거림은 아니고, 식은땀이 나면서 등줄기에 힘이 쭉 빠지고 기운이 없는 정도였다.

혼자 조용히 한숨 돌리다 보면 좀 낫겠지.

파우더룸을 나온 최홍서는 식당 반대편으로 복도를 빠져나갔다. 거실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입구가 나오고, 오른편으로는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었다.

식당 쪽에서 한순간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난간을 붙잡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예의 없는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한 번만 다시 가보고 싶었다. 그를 처음 만났던 곳. 그리고, 그와 정식으로 연인이 되었던 곳.

침실이나 서재 같은 개인적 공간이 아닌 응접실이니까... 그러니까 잠깐만 다시 가보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스스로에게 그런 변명을 늘어놓으며 무거운 다리로 쫓기듯 계단을 올랐다.

응접실의 양문 중 오른쪽 문의 고리를 잡고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달, 칵.

“......”

고요함 속에서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는 그 공간은 과거의 시간 속에 그대로 묻힌 것 같았다.

벽에 걸린 미술품들과 오른쪽의 원형 식탁, 왼쪽 통창 앞에 꾸며진 소파 세트.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최홍서는 홀린 듯 천천히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과거의 환영들이 하나씩 되살아날 것만 같았다.

명 사장이 사전 협의도 없이 다른 배우를 데리고 나타나 불쾌해진 강우현 감독, 그런 강 감독의 곁에 앉아있던 선배 배우, 처음부터 끝까지 개수작뿐이었던 조 사장, 어느 재벌가의 이사님이었던 중년 여성,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권력자들 앞에서 비굴하게 굽실거리던 명도훈...

소파 세트 앞으로 걸어간 최홍서는 그날 섰던 자리에 멈추었다.

바로 맞은편은 일인용 안락의자가 놓인 상석이었다.

긴 다리를 겹쳐 꼬고 무릎 위에서 단정한 두 손을 깍지 낀, 액자 속 무기질 같았던 VVIP.

그의 모습이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 되살아날 것만 같았다.

한기가 돌면서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음악은 그만 끄죠.”

처음 들어본 그의 목소리였고,

“평소에 체호프를 즐겨 읽습니까?”

연기가 끝난 후 그가 최홍서에게 직접 물어보았던 첫 번째 질문이었다.

어느 한 부분도 잊지 않았다. 그날 이곳에 있었던 모든 인물들의 역할을 혼자 해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번 일이 잘 성사돼서 다시 뵙길 바라겠습니다, 최홍서 씨.”

돌아보면 그는 이미 그때부터 호감을 넌지시 표시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뵙길 바란다니. 의미 없이 겉치레로 그런 말을 덧붙일 사람이 아니라는 걸 지금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돌려 말하지 않았었다. 그는 어떤 것도 시험하거나 떠보려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나는 바보처럼 오랫동안 딴소리를 했던 거다.

아프게, 허탈하게 웃으며 터덜터덜 걸어간 최홍서는 강 감독과 선배 배우가 나란히 앉아있었던 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영화 제작 확정 파티가 열렸던 날, 이해성과 나란히 앉았던 의자이기도 했다.

서로의 손을 꽉 잡았었다. 그의 이마가 목덜미에 닿았었다. 그가 닿으니까 숨이 막혔었고, 숨이 막혀도 좋으니까 닿아 있고 싶었었다.

“나 좋아해요? 그냥 호감이 아니라?”

나란히 바로 곁에 그가 앉아있었던 자리를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어보았다.

그때는 분명하게 곁에 있었던 존재가 지금은 부재중이었다. 무엇을 잃어버렸고, 무엇이 빠져버렸는지, 그 상실이 뚜렷이 부각되었다. 이별한 뒤에는 연인과 함께 갔던 추억의 장소를 피하라고 하는 이유... 지금이라면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그가 앉아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손바닥 아래에 따뜻한 온기가 만져졌다. 물론 착각일 것이다. 그가 기대었던 소파의 등받이도 손으로 쓸어보았다.

어차피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거라면, 다른 사람의 몸으로 눈을 뜨는 것보다는 시간이 되돌려지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어리석은 순간들을 바로잡을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이것은 <기회>가 아니었다. 전능자가 일부러 이런 상황을 조작했다면, 그 의도는 <벌>, <단죄>였다.

미간이 찡하게 울리고, 눈시울이 후끈해졌다.

현수를 봤을 때도 억누른 울음인데, 이번에는 막을 새가 없었다.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떨면서 흐느꼈다. 목 놓아 울지는 않았다. 그런 울음은 울 수가 없었다. 입술을 꾹 물고, 소리를 삼키면서, 흐르는 눈물을 그대로 놓아두었다.

“또 그쪽이네요.”

“......”

“이 정도면 거의 운명 아닌가?”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기 위해 돌아볼 필요가 없었다. 과거에서 일어난 망령 따위가 아니었다. 과거의 그는 단 한 순간도 나에게 저런 금속 같은 목소리를 낸 적이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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