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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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호 부부는 분명히 각자 따로 애인을 갖고 있을 거예요.”
확신에 찬 말투로 그렇게 얘기한 건, ‘크림 맨션’의 입주자, 유명 정치가의 대학생 딸 역할을 맡은 배우 김이정이었다.
“배우자의 외모에는 서로 매력을 못 느끼겠는데 돈은 넘치게 있잖아요? 더 젊고 멋진 상대를 만날 수 있다는 걸 알았을 테니까, 바람은 정해진 수순 같은 거죠.”
김이정은 ‘크림 맨션’의 또 다른 캐릭터들인 유명 맛집을 경영하는 40대 부부를 상상해 보고 있었다.
강우현 감독의 자택에 모인 배우들은 세 시간에 걸쳐 시나리오와 캐릭터에 대해 열띤 의견을 나눈 직후였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지치기는커녕 여전히 열기가 뜨거웠다.
예쁜 얼굴로 무표정하게 얘기하는 김이정을 지켜보던 오인경이 흥미를 보이며 말했다.
“그럴듯한 얘기이긴 한데, 이정 씨는 나이도 어린데 세상을 보는 눈이 상당히 비관적이네?”
“저랑 만나고 싶어 하는 그런 아저씨들을 워낙 많이 봐서요.”
모두가 수긍할 수밖에 없는 답변이었다.
허리까지 오는 새까만 긴 생머리의 김이정은 청순하기보다는 도도하고 시크한 분위기였다. 실제로도 감독이나 선배들 앞에서 가식적으로 웃거나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 모습은 일절 볼 수 없었다. 그런 그녀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선배들도 있는 것 같았지만, 상냥하지는 않더라도 앞뒤가 다를 것 같지는 않은 사람이라고, 최홍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 C호의 남편이 이정 씨에게 치근덕거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최홍서가 의견을 보태자, 김이정이 휙 돌아보면서 눈을 크게 떴다.
“어? 그것도 괜찮겠네요. 입주자들 사이에 갈등 거리를 만들어 놓는 게 후반 전개에도 더 도움이 될 것 같구요.”
“우리 배우들이 너무 열정적이네. 감독이 아주 든든해요.”
스터디 후, 잠시 자리를 비웠던 강 감독이 술과 음식이 든 쟁반을 가지고 돌아왔다.
“스터디 끝났는데 아직도 캐릭터 얘기 중이야? 자, 이제부터는 먹고 마시면서 편하게 얘기하자구요.”
곧바로 뒤따라온 고용인도 식탁 위에 이런저런 요깃거리들을 내려놓았다.
“감독님, 스터디는 부수적인 거고 사실은 술자리가 메인이죠?”
누군가의 농담 섞인 질문에 강 감독은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디 안 그런 영화판 있나? 술이 없었으면 한국 영화의 80%는 세상 빛을 못 봤다구.”
강 감독의 취향대로 우선은 샴페인으로 술자리가 시작됐다.
이 집에는 최홍서의 몸으로 두 번 와본 적이 있었다. 스터디 후에 술자리가 벌어진 이 식당 공간은 처음이었지만, 활짝 열어젖혀 둔 폴딩 도어 너머로는 익숙한 정원이 내다보였다.
<크림 맨션>의 투자 유치 파티가 열렸던 날, 바로 저 정원에 젊은 남녀가 바글거리는 수영장이 설치됐었다. 그리고 영화 제작이 결정된 후에 축하 파티가 열린 공간이기도 했다.
그날, 당당하면서도 여유 있는 모습으로 축사를 발표하고 건배를 제의하던 이해성은 최홍서의 눈에 세계의 중심 같았다. 리더십과 매너, 부드러운 미소까지 갖춘 완숙한 성인 남성으로서의 그를 바라보며 분명 떨림을 느꼈었다.
조 사장의 추태에 그가 불같이 화를 냈던 것도 이 집이었다. 다섯 번의 만남을 다 채우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그를 남자 친구로 받아들였던 것도 이 집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집도 자신의 집도 아닌 이곳에 추억이 너무 많았다. 그게 참 묘하다는 생각에 남모르게 허한 웃음이 흘렀다.
“근데, 윤혜안 씨는 듣던 거 하고는 좀 다르네요?”
떠들썩한 술자리에서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있었던 최홍서는 윤혜안을 찾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강 감독의 곁에 앉은 제작사 대표가 흥미로운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워낙 불성실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실은 걱정이 많았거든요. 감독님이 혜안 씨 캐스팅하고 싶다고 하셨을 때 내가 반대도 많이 했었고. 근데 볼수록 소문하고는 다른 것 같아서요.”
“거봐요, 백 대표. 불성실한 사람한테서는 절대 그런 연기가 나올 수 없다고 했지? 비즈니스 문제에는 백 대표가 더 빠삭해도, 배우 보는 눈은 내가 더 정확해. 분명히 소문이 과장된 걸 거라니까?”
벌써부터 흥이 많이 오른 강우현 감독은 보란 듯이 으스대면서 말을 이었다.
“오늘도 그래. 시나리오랑 캐릭터 연구 꼼꼼히 해 온 거 봐. 벌써 시나리오가 너덜너덜하잖아. 저 정도면 평균 이상으로 성실한 편인 거 백 대표도 인정해야지?”
“사람을 뭐 두세 번 봐서는 알 수가 없죠.”
제작사 대표는 심드렁히 얘기하고는 샴페인을 마시며 딴청을 피웠다. 윤혜안이 소문과는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아직은 여지를 두는 것 같았다.
최홍서는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실제로 본 모습보다 형체도 없는 소문을 더 믿는 사람들도 많았으니까.
“근데 우리 혜안 씨는 음식에 전혀 손을 안 대네. 세 시간 동안 떠들었는데 배 안 고파요? 여기, 쿠키랑 머핀이라도 좀 먹어. 응?”
술만 조금씩 홀짝일 뿐 음식에는 손을 안 대고 있는 걸 언제 눈치챘는지, 강 감독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최홍서를 챙겨주었다.
“괜찮습니다, 감독님. 잘 즐기고 있어요.”
“단 음식 안 좋아하는구나?”
“아니에요, 좋아합니다. 근데 먹으면 찌는 체질이라서 관리를 해야 되거든요.”
“뭐? 그렇게 말랐으면서 무슨 관리?”
“황지우 역할은 지금보다 좀 더 마른 편이 좋을 것 같아서 3~4kg 정도 다이어트를 할까 하구요.”
“지금보다 더? 글쎄,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군살이라고는 전혀 없는 ‘윤혜안’의 긴 목과 턱선,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목을 쳐다본 강 감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감독님, 황지우는 연기만큼 외모가 중요한 역할 아니에요? 윤혜안 씨가 외모를 갈고닦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은데요? 최홍서 씨보다 몸매가 좀 볼품없어 보이기도 하고.”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빈정거리며 나선 것은 역시나 서준영 배우였다.
“그래서 최근에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뭐, 그 팔목으로 2kg짜리 아령이나 좀 드시나?”
서준영은 혼잣말인 척 비아냥거렸다. 그러고는 최홍서가 더 뭐라고 받아치기도 전에 옆 사람에게 말을 붙이며 화제에서 빠져나갔다.
하는 짓이 영 유치하기는 해도 서준영의 이번 지적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최홍서가 살펴본 윤혜안의 몸은 상당히 방치된 상태였다. 몇 개월간 의식불명 상태였던 탓도 있겠지만, 마르기만 했을 뿐 근육량이 부족했다. 황지우는 외모만으로도 신비로움을 끌어내야 하는 캐릭터였고,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도 예뻐 보이려면 마르기만 한 것으로는 부족했다. 잘 관리된 몸을 만들기 위해 최홍서는 전문가를 고용해 윤혜안의 몸에서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가고 있었다.
“형, 진짜 운동하고 있어?”
옆자리의 박동하가 팔꿈치로 최홍서를 툭 치고는 목소리를 낮춰 물어왔다. 최홍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한 지는 좀 됐어요. 한 달 정도?”
“그냥 한 말이 아니고? 형이 진짜 운동을 한다고?”
어지간히 의외였는지, 허허, 박동하는 헛웃음을 웃기까지 했다.
“감독님, 이해성 부사장님 얘기 좀 해주세요!”
누군가 이해성 얘기를 꺼내자, 박동하가 갑자기 눈을 빛내면서 최홍서에게서 시선을 거두어갔다.
“무슨 얘기를 해줘? 자리에 있지도 않은 사람을.”
“험담하자는 게 아니라요, 그 정도 재벌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잖아요!”
박동하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해성 얘기를 해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선배들 앞에서 대체로 얌전한 편이었던 터라, 박동하의 이런 적극성이 꽤 의외였다.
“실제로 보니까 배우보다 더 멋지시던데. 왜 재혼을 안 하신대요? 그래도 여자 친구는 있으시겠죠?”
“그런 사생활이야 나도 모르지.”
“연예계에는 도는 소문이 전혀 없는 것 같더라구요. 그런 거 보면 배우나 가수랑 만나시는 것 같진 않은데...”
“그사이에 소문까지 캐고 다녔어?”
강 감독이 박동하에게 눈을 흘기며 웃었다. 깜찍한 녀석이라고 귀엽게 보는 것 같았다.
박동하는 얼굴을 붉히면서 몸을 꼬았다.
“캐고 다닌 게 아니라요... 그런 분은 대체 어떤 사람이랑 사귈지 너무 궁금해서 그랬죠. 재력이랑 권력 가졌는데 외모까지 그 정도 레벨인 건, 그게 진짜 영화 같잖아요.”
중얼거리는 박동하의 변명을 다들 귀엽게 보는 것 같았다. 선배들에게도 미움 살 일 없이 싹싹했고, 출연 배우들 중에 가장 막내기도 해서 두루두루 원만히 지내는 편 같았다.
“투자 받으시면서 여러 번 만나셨을 거 아니에요. 회식 때 보니까 친해 보이시던데. 실제로 어때요?”
“ARA 그룹 회장 자리를 받을 사람이야. 투자 문제로 몇 번 만났다고 해서 나 같은 사람한테 속을 들킬까 봐?”
오인경까지 나서서 은근하게 물어도 강 감독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강 감독이 이해성에 대해 쉽게 입을 열어주지 않는 것이 최홍서로서는 퍽 고마웠다. 그가 흥밋거리로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서준영이 테이블 위로 깊숙이 상체를 숙이면서 목소리를 낮춰 은밀히 물었다.
“그럼 그것만 말해줘요, 감독님. 최홍서랑은... 무슨 관계였어요? 둘이?”
그때까지 온화하게 에둘러 거절했던 강 감독은 서준영을 지그시 힘주어 쳐다보았다. 입술 끝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있기는 했지만, 어딘가 차가워 보이는 미소였다.
“서준영 씨는 지난번에 나나 이 부사장이 한 얘기를 귓등으로 들었나 봐.”
강 감독이 샴페인 잔을 내려놓으며 이어 말했다.
“서준영 씨, 내가 조언 하나 줄게.”
“......”
“이해성 부사장, 보통 사람 아니야. 아마 준영 씨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사람보다 무서운 사람일걸?”
왜인지는 몰라도, 서준영뿐만 아니라 식탁에 둘러앉은 모든 사람이 강 감독의 얘기에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딴 게 아니라, 전지전능한 게 신인 거잖아. 지금 세상에서 이해성 부사장은 거의 전지전능하단 말이야. 하고 싶은 대로 못 할 일이 없으니, 절반은 신인 셈이지. 알겠어, 준영 씨? 반신(半神)이라고, 반신.”
“......”
“신을 노하게 했다가 화 입지 말고, 입단속해.”
말끝에 강 감독이 다시 싱긋 웃으며 샴페인 잔을 집어 들었다. 홀린 듯 감독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던 서준영이 순간 긴장을 풀면서 장난스럽게 눈을 흘겼다. 자기를 놀리려고 하는 얘기로 받아들인 듯했다.
“에이, 감독님 무속신앙에 너무 빠지신 거 아니에요? 아무리 재벌이라도 신이라고까지 하는 건 좀... 세상이 바뀌었어요. 재벌이라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나요?”
“세상이 바뀌었어도, 이해성 부사장이 준영 씨 하나쯤은 살리고 죽일 수 있을 것 같은데?”
“......”
그 말까지 듣고는 좀 오싹해졌는지, 서준영은 더 말대꾸하지 않고 상체를 슥 뒤로 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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