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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백-66화 (66/185)

66화

오후 3시쯤 강우현 감독의 자택에서 시나리오 공부 모임이 있었다. 감독과 배우들이 모여서 각자 시나리오를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이야기하고, 함께 캐릭터도 분석하면서 의견을 나누는 자리였다. 드라마에서는 대본 리딩만으로 대체하는 부분이었지만, 영화에서는 이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감독들이 많았다. 특히나 강우현은 그런 성향을 가진 감독의 대표 격이었다.

배우들과 호흡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의 개성을 캐릭터와 작품에 반영하는 것이 강우현의 방식이었다. 배우를 계속해서 고민하게 만드는 방식이었지만, 그래서 그와의 작업 후에는 다들 배우로서 더욱 성숙해지기도 했다.

윤혜안은 조연이나 단역으로 영화를 몇 작품 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최홍서에게는 첫 영화였다. 그것 말고도 황지우 역할을 성공적으로 연기해야 하는 이유는 더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 영화가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완성되길 바란다고, 그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덥지도 춥지도 않은 쾌적한 기온에 햇볕은 살짝 따가울 정도였다. 덕분에 선글라스에 모자를 눌러쓴 차림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윤혜안의 몸으로 처음 눈을 떴을 때만 해도 매미 소리가 요란한 여름이었는데, 어느새 계절은 완연한 가을로 접어들어 있었다.

조금 서둘러 집을 나선 덕분에 최홍서는 여유 있게 첫 번째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강 감독의 자택이 있는 평창동으로 가기 전, 몇 가지 해결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일찍부터 집을 나선 참이었다.

우선은 통신사 대리점부터 들렀다.

대기 번호를 받아야 할 정도로 꽤 손님이 있는 편이었다. 누군가의 명의를 도용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긴장이 돼서, 번호표를 계속 구겨대면서 초조하게 순서를 기다렸다.

배정된 창구에 앉아 선글라스를 벗자마자, 상대는 윤혜안의 얼굴을 알아본 것 같았다. 드러내놓고 티를 내지는 않아도, 상기된 표정으로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핸드폰을 바꾸고 싶으시다구요. 번호는 그대로 사용하시구요?”

“네.”

윤혜안의 전화를 그대로 사용하는 게 계속 마음에 걸렸었다. 어쨌든 최홍서에게는 ‘남의 전화’였으니까. 게다가 이해성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앞으로는... ARA 핸드폰만 쓸 거예요.’

그에게 그렇게 약속했었고, 그 마음은 진심이었으니까.

“생각해둔 기종이 따로 있으신가요?”

“그게... 한 1년 전쯤 나왔던 모델인데, 지금도 있을까요? ARA 핸드폰이요.”

창구 너머의 직원이 책자를 뒤적여 어느 페이지를 보여주었다.

“1년쯤 전이면 아마 이 모델일 것 같은데.”

“네, 맞아요!”

베트남 호찌민으로 출국하기 전, 이해성이 숙소의 지하 주차장으로 찾아와 선물해 주었던... 똑같은 기종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최홍서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저도 모르게 큰 목소리를 냈다.

의아해하는 직원의 시선을 보고서야 멋쩍음에 괜히 손등으로 입가를 문지르면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ARA 핸드폰으로 보시는 거면, 바로 2주일 전에 최신 기종이 나왔거든요. 그것도 한번 같이 보시겠어요?”

“괜찮습니다. 이걸로 할게요. 이게 좋아요.”

윤혜안처럼 잘 알려진 연예인이 왜 굳이 구형 모델을 고집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직원의 얼굴에 잠시 떠올랐지만, 곧 절차대로 일을 진행해 주었다.

“역시 윤혜안 씨 맞으시구나...”

신분증을 받아본 직원은 신분증상의 사진과 앞에 앉은 고객의 얼굴을 번갈아 힐끔거리면서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네.”

“너무 반갑네요. 제 창구에 배정되셨을 때부터 너무 잘생긴 손님이시다 생각은 했는데, 긴가민가했거든요. 이럴 땐 아는 척 안 하는 게 매너라고 알고 있긴 한데, 제가 연예인 처음 봐서요. 정말 잘생기셨네요.”

이전까지는 애써 덤덤히 평범하게 대했던 직원은 윤혜안이라는 사실을 서로 확인하고 나서는 곧바로 태도가 달라졌다. 목소리도 말투도 표정도 명랑해지고 더 친근해졌다.

“감사합니다.”

윤혜안이라는 말에, 바로 옆 창구의 직원과 손님도 이쪽을 흘깃거리기 시작했다.

“그 사람 아니에요? 다리에서 뛰어내렸다가 살아난 사람.”

옆 창구의 손님이 자신의 담당 직원에게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자기 딴에는 목소리를 낮춘다고 낮춘 것 같은데, 그래봤자 고작 1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니 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최홍서 때부터 익숙한 상황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앞에 있는 연예인이 TV 속에 있는 것처럼 대하곤 했다. 조금 목소리를 낮춘 정도로 그들의 귀에 자신의 얘기가 들리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 수군거리지만, 누구나 그렇듯 자기 얘기는 더 귀에 잘 들리기 마련이었다.

이 경우에는 엄밀히 따지자면 최홍서 얘기가 아닌 윤혜안의 얘기였지만.

과도한 흥미와 관심, 친절 속에서 기기 변경을 마치고 대리점을 빠져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

“어디로 모실까요?”

탑승한 손님이 행선지를 말하지 않으니, 기사가 뒤를 돌아보며 먼저 물어왔다.

“...대학로로 가주세요.”

집을 나설 때부터 마음을 먹었음에도 그 대답이 쉽지 않았다.

마구 뛰기 시작하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창밖을 내다보며 심호흡을 했다. 하나, 둘, 셋, 넷... 손가락을 접으며 숫자를 네 번이나 되풀이해서 세어 보아도 좀처럼 긴장이 가시지 않았다.

현수.

현수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약속을 정한 것이 아니니 만나러 간다기보다는 보러 간다는 표현이 더 맞겠지만.

윤혜안으로 눈 뜬 후, 어느 정도 정신을 챙길 수 있게 되었을 때. 이해성 외에 소식을 알고 싶은 사람은 두 명뿐이었다. 정지인과 송현수.

정지인이 동경과 부러움의 대상이었다면, 같은 위치에서 더 동등하게 서로의 처지를 이해했던 건 현수 쪽이었다. 경로는 최홍서와 약간 달라도, 현수 역시 명 사장에게 착취당한 피해자였다. 가장 어두운 비밀을 나눠 가진 덕분에, 현수 앞에서는 그나마 조금 속을 드러낼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근황을 알아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드라마 <이터널 나이트>로 큰 성공을 거두었던 정지인은 놀랍게도 연극배우로 완전히 전향해 활동 중이었다. 그 때문에 이전보다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포털사이트에 정지인 세 글자만 입력하면 가장 최근에 공연했던 작품이나 근황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는 현재 장기 공연을 하나 마치고 휴식기에 들어가 있었다.

한두 달에 하나씩 드문드문 게시물이 올라오는 SNS에는 이탈리아의 바다를 배경으로 휴가를 즐기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업로드되어 있었다. 가족들 만나러 이탈리아에 갔었구나... 건강해 보이는 모습에 마음이 놓였었다.

무명 배우나 마찬가지로, 드라마와 영화판을 떠돌며 단역 오디션을 전전했던 현수는 대학로의 한 극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 소식을 접했을 때는 윤혜안으로 눈 뜬 이후, 처음으로 가장 환하게 웃었던 것 같다.

현수는 오랫동안 연기에 마음을 붙이지 못했었다. 악착같이 성공해 명 사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겠다는 희망만으로 살아갔던 최홍서와는 달리, 그는 체념하고 놓아버린 사람 같았다.

겉으로는 건들거리며 거친 말을 하고 잇속에 밝은 척해도, 속은 맹탕이었다. 약지 못하고 끈기가 없어서 제 밥그릇을 누가 채가도 욕이나 한번 푸지게 해버린 뒤에는 잊어버리는 놈이었다. 달려들어서 기어코 뺏어오려는 독기가 없는, 그런 놈.

그랬던 현수가 극단에 소속되어 제대로 연기를 하고 있었다. 그동안 연극 무대에도 꾸준히 올랐고,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점점 더 비중 있는 역할들을 맡고 있었다. 온라인에는 자그마한 팬 카페도 만들어져 있었다. 짜식, 얼굴 하나는 반반하니까. 인기 있을 만도 하지. 그 얼굴을 이용해 먹을 줄 몰라서 그렇지. 현수의 팬 카페가 생긴 것이 자기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뿌듯했었다.

현수가 극단 일을 하지 않을 때는 대학로의 한 바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도 그 팬 카페에서 입수한 정보였다.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알고 나니, 잘 살고 있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다. 오래 망설인 끝에 마음을 굳혔는데, 그런데도 좀처럼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어차피 현수에게 자신은 윤혜안일 뿐일 텐데. 긴장할 필요도 없는 일일 텐데.

이른 오후부터 영업한다기에 어떤 곳인가 했는데, 낮에는 카페, 저녁에는 바처럼 운영되는 곳이었다. 세련된 분위기는 아니어도, 단골들을 꽤나 거느리고 있을 것 같은, 내공이 느껴지는 아늑한 바였다.

자리에 앉아 직원에게 칵테일을 주문했다. 이곳에 오면 바텐더인 현수가 직접 만든 칵테일을 마실 수 있다는 정보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오늘은 현수가 출근하는 날이었는데, 녀석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불안해하는 중에, 녀석이 카운터 뒤에서 커튼을 젖히고 나타났다. 서빙 직원에게 주문 내용을 확인한 뒤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하는 모습이 제법 능숙했다. 그러고 보니 명 사장의 눈에 띄기 전에는 바에서 바텐더 보조로 일했다고 했었지...

주문을 받으면서 먼저 내준 물컵을 만지작거리면서, 모자챙 너머로 현수의 모습을 계속 힐끔거렸다. 그 시선을 눈치챈 건지, 녀석은 완성된 칵테일을 직접 테이블로 가지고 왔다.

“배우 윤혜안 씨, 맞죠?”

“...네.”

현수라면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올 거라고 예상했었기에, 속으로 피식 웃음이 났다.

“이런 데는 어쩐 일이세요? 빈말로도 우리 가게가 세련된 곳은 아닌데.”

“그냥 이 근처를 지나가다가 괜찮아 보여서요.”

“여기가요?”

“네.”

“취향 특이하시네.”

테이블 앞에 선 녀석이 검지로 목을 긁으며 심드렁하게 얘기했다. 껄렁거리는 태도가 예전과 똑같았다. 불량스럽게 껄렁거리는데도 만만해 보이는, 특유의 느낌이 예전과 똑같았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울컥, 뜨거운 것이 치받쳐서 최홍서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 빨대로 칵테일을 조금 마셨다.

“어때요, 칵테일? 제가 만든 건데.”

“맛있네요.”

“알콜은 적게 넣어 달라고 하셨다길래 신경 좀 썼어요.”

“네, 술이 적은데도 너무 주스 같지도 않고... 맛있어요.”

빈말이 아니었다. 맛을 잘 느낄 수 없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대충 만들어 내놓은 칵테일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현수가 이런 데에 재주가 있다는 것도 몰랐었다. 그때는, 서로 그저 살아남기 위해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으니까...

“저기, 이번에 <크림 맨션> 캐스팅되셨죠?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윤혜안 씨가 캐스팅된 그 역할요. 원래 맡기로 했었던 최홍서 배우가... 제 친구거든요.”

이런 말을 꺼내는 게 쑥스러운지, 녀석은 뒷목을 연신 문질러댔다. 이 얘기를 하려고 테이블 앞에서 서성거렸던 거구나, 최홍서는 알 것 같았다.

녀석의 입으로 ‘최홍서가 내 친구’라는 말을 듣자, 또 한 번 감정이 휘청거렸다. 미간이 찡하게 올라오고, 눈동자가 뜨끈뜨끈해졌다.

“아... 그러세요.”

차마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빨대로 칵테일을 저으면서 대답했다.

“뭐 안 믿으실 수도 있는데, 사실이에요. 그 친구가 정말 하고 싶어 했고, 열심히 준비했던 역할이거든요.”

“......”

“그러니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네가 뭔데 그런 부탁을 하냐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저한테는 그놈이 꽤 각별해서요.”

“......”

“그런 의미에서 이건 제가 살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잘 마실게요.”

목이 메어 그 말도 겨우 할 수 있었다. 카운터로 돌아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벌떡 일어나 ‘현수야!’ 부르고 싶은 충동에 강렬히 휩싸였다. 당장이라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그저 잘 사는 모습을 보기만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막상 현수의 모습을 보고, 녀석에게서 이런 말까지 듣고 나니까... 욕심이 생겼다. 지금까지 잘 버텨온 것 같은데, 갑작스럽게 이 모든 상황이 서럽고 억울했다.

내가 네 친구 최홍서라고. 믿기지 않겠지만, 나도 내가 미친 소리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나도 내가 미친놈이 아닌가 의심도 해봤지만, 그래도 내가 진짜 최홍서인 걸 어떡하냐고. 그 사람에게... 내가 홍서라고 말하고 싶은데 나 어떡하냐고.

현수를 붙잡고 울고불고하면서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었다.

현수라면 믿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부질없는, 대책 없이 낙관적인 꿈일 뿐이었다.

내가 현수였더라도 믿지 않았을 얘기였으니까.

현수가 만들어준 ‘블러드 메리’를 깨끗이 비운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이 최홍서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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