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그만들 해. 감독님도 부사장님도 그 일에 대해 하신 말씀 못 들었어?”
조원태가 나서서 엄한 목소리를 내자 서준영은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지만, 최홍서를 노려보는 날 선 눈은 여전했다.
최홍서 역시 서준영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받아주었다. 잘못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꼬리를 내릴 생각은 이제 없었다.
이해성의 말이 백번 옳았다.
서준영 같은 사람들 때문에 내내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데에는 바로 그 고통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었다.
진실에는 관심도 없이, 그저 타인을 소재로 자극적 드라마를 즐기고 싶을 뿐인 인간. 그런 인간들을 설득하려 했었고, 그런 인간들이 정의로운 양 떠드는 얘기를 겁냈었다는 게 부끄러울 정도였다. 지금이라면 이렇게 간단히 무시하고 맞설 수 있는데...
“우리 배우분들 분위기가 왜 이럴까? 감독이 걱정이 많이 되네.”
부드러운 말씨의 주인은 강우현 감독이었다.
술잔을 들고 배우들 테이블로 옮겨온 강 감독이 누군가 마련해 준 의자를 당겨 윤혜안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감독의 등장에 배우들은 억지로라도 얼굴을 풀어 보였다.
“여기 혜안 씨도 그렇고, 준영 씨도 그렇고, 새로 합류하게 된 주연 배우들이 잘 적응할 수 있게 다들 같이 애써 줘요. 눈빛만 봐도 뭘 원하는지 알 정도는 아니더라도, 서로 얘기는 통해야 작품을 같이 하지. 대본에 쓰여있는 대로 내 연기만 잘한다고 좋은 작품이 되는 게 아니잖아요? 작품 해봤으면 자기들도 알겠지. 감독하고, 또 상대 배우하고 교감이 안 되면 혼자 떠들어대는 장기 자랑밖에 안 돼.”
감독의 뼈 있는 말에 다들 슬금슬금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러고 보니까 동하 씨랑 혜안 씨는 같은 그룹 출신이었다면서?”
“네, 감독님.”
박동하가 나서서 명랑하게 대답했다.
“난 그 얘기를 오늘 들었네. 둘 다 지금은 그룹 생활은 안 하고?”
“네, 팀은... 몇 년 전에 해체가 돼서요.”
“그랬구나. 미안해요. 내가 가요계 쪽 상황은 전혀 몰라서. 이런 미남들이 있는 그룹이면 잘됐을 것 같은데 아까운 일이네. 우리 동하 씨는 시나리오 연구도 열심히 해오고 성실해서 뭘 하든 성공했을 것 같은데.”
강 감독의 칭찬에 박동하는 쑥스러운 듯 웃으면서도 기뻐 보였다.
“혜안 씨도 앞으로 잘해줄 거죠? 내가 엄청난 반대를 무릅쓰고 뽑은 만큼 앞으로 뭔가 보여줘야 돼. 안 그러면 우리 스태프들 앞에서 나 우스워져요?”
얼핏 온순하기만 한 인상 좋은 아저씨처럼 보여도, 강 감독은 무조건 좋은 말만 늘어놓는 사람은 아니었다. 해야 할 말을 할 때는 돌려 말하지 않고 곧바로 핵심을 건드렸다.
윤혜안이 업계에서 평판이 안 좋은 것도 사실이었고,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그런 평판이 형성될 만큼 윤혜안의 태도가 좋지 못했던 것도 사실 같았다. 감독이 그렇게 말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됐다.
“실망하시지 않도록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최홍서의 대답에 감독은 일단 만족스러운 웃음을 보였다.
“그럼 이제 준영 씨, 혜안 씨랑도 내가 빨리 친해지고 어떤 사람들인지 파악이 돼야 하는데... 음, 두 사람은 무슨 영화를 좋아하려나? 최근에 인상 깊게 본 영화 있어요?”
내 작품은 제외하고. 라는 조건을 덧붙인 강 감독은 서준영과 윤혜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뭐라고 대답할지 고민하는 서준영의 뒤쪽으로, 다른 제작진 몇몇과 함께 개별실을 빠져나가는 이해성의 모습이 보였다. 최홍서는 음료수를 마시는 척, 잠시 그의 옆모습과 뒷모습을 훔쳐보았다. 다들 담뱃갑을 한 손에 들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담배를 피울 장소를 찾아 이동하는 것 같았다.
그를 둘러싼 무리는 아주 즐거워 보였다. 그가 뭐라고 말했는지는 몰라도, 그의 말 한마디에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작 그는 웃고 있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잘 보이려 하는 사람들의 의도가 아부일 뿐이라고 말했었지만, 최홍서는 그것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ARA 그룹의 수장이 될 사람이라는 배경을 제외하더라도, 그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외모와 분위기만으로도 독보적이었고, 사람을 잡아끄는 부분이 있었다. 그런 인물 곁에는 사람이 모이기 마련이었다. 그를 둘러싸고 방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던 최홍서는 마시던 음료수를 내려놓고 술잔을 집어 들었다.
“최근에는 <크래시>를 흥미롭게 봤습니다, 감독님.”
고심 끝에 서준영이 내놓은 대답이었다.
“오... 그래요?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네, 평소에도 좋아하던 감독이라서요.”
“한국에서는 아주 잘 알려진 감독은 아닌데. 기괴하고 혐오스럽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은 편이고. <크래시>는 나도 끝까지 보는 데 실패했거든. 준영 씨는 <크래시>의 어떤 점이 좋았어요?”
“공포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주의 성향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감독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었고, 서구 사회를 지탱해 주는 자본주의적 가치관과 인간관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점에 쾌감을 느꼈습니다.”
“음...”
기다렸다는 듯이, 미리 암기하기라도 한 것 같은 감상을 줄줄 읊어대는 서준영의 얘기를 듣고 있던 강 감독은 애매한 소리를 내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혜안 씨는? 요즘 재미있게 본 영화 있어요?”
“저는 러브 스토리, 인상 깊게 봤습니다.”
윤혜안의 대답 뒤에 서준영을 포함한 몇몇이 슬그머니 비웃음을 흘렸다.
너무 통속적인 영화라고. OST를 잘 만난 덕에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을 뿐 뻔한 시나리오에 거친 연출, 특별할 것 없는 연기 등 완성도 높은 영화라고는 할 수 없다고. 그런 평들이 따라붙는 영화라는 건 최홍서도 모르지 않았다. 한마디로, 영화 좀 본다는 인상을 주고 싶을 때 언급할 만한 작품은 아니었다. 하지만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다. 마침 이해성도 자리를 비웠고, 있는 그대로 얘기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꽤 예전에 만들어진 영화라 젊은 친구가 찾아보기엔 지루할 수도 있을 텐데. 어떤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이론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빈 교정에 혼자 앉아있었던 라이언 오닐의 대사가 계속 기억에 남아서요.”
“25살에 죽은 한 여자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
강 감독이 빙긋이 웃었다.
“다들 러브 스토리 하면,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거라는 그 대사를 많이 얘기하는데... 혜안 씨는 특이한 부분에 꽂혔네?”
“......”
“작품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눈도 중요하지만, 아주 개인적인 관점에서 쪼개고 확대하고 탈락시키고 이어 붙이고... 그렇게 영화를 감상하는 것도 한 방법이니까.”
강 감독이 덧붙여준 해석은 자신의 단순한 감상에 비해 지나치게 멋진 것 같았다.
“앞으로 크랭크인까지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나를 보게 될 테니까, 열심히 친해져 보자구요. 응?”
가까이에 있는 최홍서의 등을 두드리면서 배우들을 둘러보던 강 감독은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허공을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 그러고 보니까 내가 그 얘기를 안 했네!”
그렇게 사람들의 집중을 모은 감독은 배우들뿐만이 아니라, 모인 모든 사람들을 향해 이야기했다.
“여러분! 이번엔 크랭크인 고사를 좀 서두르려고 해요.”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강우현 감독은 영화가 크랭크인에 들어가기 전, 떡 벌어지는 고사를 지내기로도 유명했다. 언론이나 외부 노출을 철저히 금한 채 내부적으로 치러지는 일이라, 대중은 잘 모르는 업계에서만 알려진 얘기였다. 지난번 최홍서로 캐스팅되었을 때는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제작이 중단되었기에 고사를 지내는 단계까지는 진행이 되지 못했었다.
“영화가 한 번 엎어질 뻔하기도 했고,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내가 워낙 그런 거에 집착하는 사람이잖아요. 이번엔 좀 서둘러 인사를 드려야 안심이 될 것 같아서 그러는데. 다들, 생각 어때요? 아, 부사장님도 마침 오시네!”
담배를 피우고 돌아오는 그를 강 감독이 불러 세웠다.
이해성을 가리키는 말에 최홍서는 잘못을 들킨 아이처럼 괜히 뜨끔했다.
“크랭크인 고사, 이번에 조금 앞당겨서 진행하려는데, 부사장님 생각은 어때요?”
기분 탓일까.
이해성의 시선이 강 감독의 옆자리에 앉은 ‘윤혜안’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감독을 향했다. 의미가 있는 시선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눈길을 옮기는 중에 그곳에 ‘윤혜안’이 있었을 뿐인지도. 하지만 분명 한순간 그의 눈이 꾹 누르듯 자신에게서 멈추었던 것을 최홍서는 확신할 수가 있었다.
“저야 그런 쪽은 잘 몰라서... 감독님 마음이 편하신 대로 진행하시죠.”
고사 얘기가 나오자, 회식 자리에 새로운 활기가 돌았다.
“그 유명한 강 감독님 굿판을 저도 보는 거네요. 기대된다.”
“굿이요? 그냥 절하고 끝내는 고사가 아니라?”
배우들도 이제는 다들 그 얘기였다.
“감독님하고 친분이 깊은 무속인이 와서 액땜 굿 같은 걸 한대요. 사고 없이 무사히 영화 잘 찍게 해달라고. 재벌이나 정치인들이 찾는 유명한 무속인이라는데... 영화 고사인데도 감독님이 사적으로 1억을 들여서 한다는 소문이 있어요.”
강우현 감독이 무속 신앙의 열렬한 신봉자라는 사실은 최홍서도 알고 있었다. 크랭크인 날짜나 영화 개봉일도 믿고 의지하는 무속인에게 받아온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무속인이 그저 그런 아마추어들하고는 확실히 다르더라고. 볼만할 거야. 전신에 소름이 돋더라고.”
“선배님은 강 감독님하고 전에도 작품 하신 적 있으시죠? 벌써 보셨겠구나.”
조원태의 목격담까지 더해지자 사람들의 기대감이 더 높아졌다.
1억짜리 굿판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최홍서뿐인 듯했다. 조금 전의 눈 마주침이 착각이 아니었는지, 이해성을 쳐다볼 때마다 높은 확률로 눈이 마주쳤다. 그 때문에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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