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이해성과 강 감독은 서로 악수를 나눈 뒤 창가로 이동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강 감독이 이해성을 다독거리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영화 제작이 중단되었다가 다시 시작되는 우여곡절을 거치는 동안, 그 두 사람은 이전보다 많이 가까워진 듯했다.
최홍서의 죽음은 이제 거의 1년 전 사건이었다. 그사이 이해성에게도, 그 주변에도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 자리에 앉아 주시면 곧 본격적으로 행사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도착하지 않으신 분 혹시 계실까요? 스태프분들, 배우분들 동료들이 다 도착했는지 확인 좀 해주시겠습니까?”
일제히 일어서 있었던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보는 사이, 제작부장이 나서서 노련하게 분위기를 정비해 나갔다. 최홍서도 그사이 서둘러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형 없는 동안 분위기 장난 아니었어.”
착석하기가 무섭게 박동하가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최홍서 욕했다고 이해성이 진짜 무섭게 화냈다니까? 누구 배우 하나 캐스팅 취소되는 줄 알았어.”
최홍서 역시 문밖에서 상황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지만, 박동하의 자리에서는 최홍서가 보이지 않았을 터였다. 얘기를 마치고 테이블로 돌아오는 이해성과 강 감독을 힐끔거리면서 최홍서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어색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회식이 시작되었다.
제작부장의 사회로 강 감독이 가장 먼저 인사와 소감을 발표했다. 새로 합류하게 된 배우들이 잘 적응하고 작품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동료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도와주기를 부탁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프리 프로덕션이 이전에 이미 어느 정도 이루어졌던 만큼, 본격적인 촬영까지 2~3개월밖에는 남지 않았어요. 그래서 새로 캐스팅된 주연급 배우들이 걱정이 많을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응, 앞으로 일주일에 한두 번씩 시나리오 리딩, 그리고 감독과의 개별 인터뷰를 통해서 작품을 십분 소화할 수 있도록 적극 도와줄 거니까...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세요.”
강 감독은 특유의 과장되게 온화한 말투로 이야기를 해나갔다.
“감독님, 무서워요! 스파르타식 아니에요?”
누군가 장난스럽게 외치자, 강 감독 역시 웃음기를 담아 농담으로 받아쳤다.
“내가 스파르타식으로 지도한다는 건 다들 알고 오디션 본 거니까, 응, 괜찮아요. 나랑 작품 하고 나면 왜 다들 연기가 확 느는지, 앞으로 몸소 체험하게 될 거예요.”
좌중에 잔잔하게 웃음이 일면서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언뜻 유약해 보이는 면이 있어도 역시 강 감독은 오랜 경력을 가진, 거장으로 인정받는 감독다웠다.
“그리고 조금 전 잠깐 얘기가 나오기도 했는데... 이전에 황지우 역할을 맡기로 되어있었던 최홍서 군에 대해서는 다들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으면 해요. 같은 업계의 우리 동료고, 대중의 편견이나 악플, 무책임한 소문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여기 있는 분들도 다 잘 알고 있는 분들이잖아요. 우리마저 이미 다 밝혀진 진실을 외면하고 고인을 칼질해서야 되겠어요?”
감독의 부드러운 회유에 다들 입을 꾹 다물었다. 몇몇은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했다.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인데, 사실 <크림 맨션>은 홍서 군 덕분에 만들어질 수 있었고, 홍서 군 때문에 중단되었다가, 또 홍서 군 때문에 이렇게 다시 제작에 들어갈 수 있게 된 영화나 마찬가지예요. 양연(良緣)이든 악연이든, 어쨌든 이 영화와 얼마나 질기고 깊은 인연이에요? 또 내가 그런 인연에 많이 연연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래서 <크림 맨션>을 홍서 군의 유작으로 여기면서 이 영화의 일부로 생각하고 만들어 나갈 작정이에요.”
강 감독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최홍서의 고개가 점점 수그러졌다.
최홍서 때문에 이해성이 투자를 결정했었고, 최홍서가 죽으면서 중단되었다가, 최홍서를 위해서라도 영화를 완성하기로 결심한 이해성이 투자를 이어가 준 덕분에 다시 제작에 들어갈 수 있었다. ― <크림 맨션>의 투자 유치를 위해 처음 만났던 이해성과 자신의 스토리를 알고 있는 최홍서에게는 그렇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크림 맨션> 최대 투자자이신 영화 투자사 ‘히읗시옷’의 이해성 님 말씀이 있겠습니다.”
그의 이름을 말하는 제작부장의 목소리에 최홍서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무감한 표정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소개받은 이해성입니다.”
지난번 최홍서로서 참석했던 식사 자리와 달리, 배우와 스태프, 투자자들까지 서른 명가량이 모인 자리였지만, 그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크림 맨션>은 각별한 의미가 있는 영화입니다.”
배우들도 스태프들도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ARA의 이해성에게 이 영화가 어떻게 각별한 의미가 될 수 있는지, 다들 호기심을 갖는 표정들이었다.
이해성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업을 따로 가진 사람이지만, 되도록 많은 제작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석해 배우분들과 스태프분들을 격려하고 지지할 생각입니다. <크림 맨션>이 반드시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완성될 수 있도록, 모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가 짧게 고개 숙여 묵례한 뒤, 다소 엄숙하고 조용한 박수가 이어졌다.
‘거기 가면 홍서 씨 볼 수 있잖아요. 그럼 가야죠.’
과거의 그는 그렇게 말했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최홍서가 없음에도 참석한 이유를 그는 암호처럼 얘기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각별한 이유, ARA의 부사장인 그가 이 영화의 제작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석하려 하는 이유, 이 영화만큼은 아름답게 완성될 수 있기를 바라는 이유까지... 모두 최홍서만큼은 알아들을 수 있는 암호들이었다.
다른 투자자들과 PD들, 각 부의 실장과 팀장들, 배우들... 이후 한 사람씩 짧게 소개가 이어졌다. 하지만 최홍서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초대받지 않은 자리에 투명 망토를 둘러쓰고 참석해, 비밀을 엿듣고 있는 죄스러운 기분이었다. 원래는 자신이 보고 들을 수 없는, 허락되지 않은 자리였으니까.
여전히 낯설기만 한 윤혜안의 이름으로 불렸을 때, 최홍서는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황지우 역할을 맡은... 윤혜안입니다. 우선, 감독님 작품에 함께할 수 있어 너무나 영광입니다. 뒤늦게 합류하게 된 만큼 작품과 캐릭터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더 성실하게 임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강 감독의 옆자리, 상석에 앉아 단단히 팔짱을 낀 이해성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습관처럼 얘기한 ‘성실’이라는 단어에 이해성의 미간과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상하게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 순간만큼은 훤히 알 것 같았다. 저 자리에 홍서가 있었는데, 홍서의 자리였는데... 그는 윤혜안의 존재를 통해 최홍서의 부재를 강하게 느끼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자신을 윤혜안으로 인지하고 거부하는 이해성을 통해 최홍서 본인이 자신의 죽음을 더 분명하게 느끼는 것처럼.
“성실... 풉. 두 번만 성실했다가는 영화 다 말아먹겠네.”
인사를 마친 최홍서가 자리에 앉는 사이, 맞은편의 서준영이 빈정거렸다. 안쪽의 상석까지는 들리지 않을 정도였지만, 바로 맞은편의 최홍서에게는 똑똑히 들리는 볼륨이었다. 서준영은 아마도 윤혜안과 작업하면서, 그 불성실함으로 피해를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용재의 걱정과 달리 최홍서는 그런 공격은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아주 사소한 문제처럼 느껴졌다. 이전과 달리.
본격적인 회식이 시작됐다. 앞으로 포스트 프로덕션1) 작업까지 길게는 1년을 함께할 사람들끼리 얼굴을 익히고 친분을 쌓는 것이 목적인 자리인 만큼, 인사와 소개 이후에는 평범한 여느 회식 자리처럼 떠들썩하게 흘러갔다.
술과 음식이 서빙되고, 고기를 굽는 냄새와 소리, 연기,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이야기 소리가 순식간에 공간을 가득 채웠다.
박동하가 아니면 말을 걸어주는 사람도 없었지만, 그것 역시 최홍서에게는 아무 상관 없었다. 오히려 조용히 그를 훔쳐볼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다행일 정도였다.
초반부터 그는 술잔을 비우는 속도가 제법 빨랐다. 권하는 대로 사양하지 않고 연거푸 들이켜는 모습이 조금 걱정스러웠다.
“근데 이해성 말이에요. 최홍서랑 뭐가 있었던 건가?”
중요 제작진들이 모여 있는 상석 쪽을 힐끔거리면서, 서준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소리에는 최홍서도 귀가 뜨일 수밖에 없었다.
“뭐가요?”
“아니, 너무 이상하잖아요. 자기랑 진짜 가까운 사람 일이 아니고서야 아까 그렇게까지 화를 낸다는 게... 솔직히 오버지 않아요?”
“좀 그렇긴 해. 무슨 자기 가족 욕이라도 들은 줄.”
서준영과 함께 이해성에게 직접적으로 한소리를 들었던 오인경이 맞장구를 치고 나섰다.
“그러니까요! 이해성이 최홍서를 그렇게까지 감쌀 이유가 없잖아요. 그렇고 그런 사이였던 거 아닐까요?”
“그렇고 그런 사이라니? 뭐, 스폰서? 그것도 동성끼리? 으으... 나 그런 거 진짜 별론데.”
대화를 듣고 있던 누군가가 고기를 집으려던 젓가락을 거두어가면서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진저리를 쳤다.
“최홍서가 X군이었잖아요. 이해성도 최홍서 밤손님이었을 수도 있죠.”
최홍서는 서준영의 억측을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최홍서를 감싸려던 게 아니라, 그냥 틀린 정보를 정정하고 싶으셨던 거겠죠.”
“......”
그 화제를 함께 떠들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최홍서를 쳐다보았다. 하나같이 누가 너한테 물어봤냐는, 탐탁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하지만 최홍서는 이 부분에서만큼은 조용히 찌그러져 있을 생각이 없었다.
이 사람들에게 최홍서는 불명예스럽게 목숨을 끊은 ‘지저분한 X군’이었다. 이해성이 아닌 그 누가 나서서 사실을 지적하더라도, 심지어 자신들이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들은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런 최홍서를 이해성과 엮어서 생각하길 원치 않았다. 이해성은 최홍서라는 이름과 아무 연관도 없어야만 했다.
심지어 스폰서라니.
그는 어떤 대가성 만남도 제의한 적이 없었다. 같이 자고 싶다고 먼저 유혹했던 것도 최홍서 본인이었다. 알지도 못하는 일을 왜 함부로 떠드는 거냐고 길길이 날뛰고 싶을 만큼 화가 났다.
떨떠름하게 쳐다보던 서준영이 턱을 치켜들면서 물었다.
“그걸 윤혜안 씨가 어떻게 알아요?”
“부사장님이 그럴 분으로는 안 보여서요.”
“그러니까 무슨 근거로?”
“추측해 본 겁니다. 선배님께서도 마음대로 추측하신 것처럼요.”
“기억 잃은 척하더니 싸가지 어디 안 갔네.”
서준영이 쥐고 있던 젓가락을 내던지듯 놓으며 중얼거렸다.
1) 포스트 프로덕션 : 영화의 촬영 이후 후반 작업. 편집, 사운드 믹싱, 홍보 등이 이 단계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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