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홀린 듯 이끌려 고개를 들었던 최홍서는 그의 무감한 표정 앞에서 다시금 무너져내렸다.
“아, 네... 죄송합니다...”
그러는 동안 등 뒤의 룸 안에서는 윤혜안의 연기력에 대한 비난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최홍서의 의식은 온통 눈앞의 그를 향해 있었으니까.
지금이 아니면, 오늘 그에게 말을 걸 기회는 더 이상 없을 것 같았다. 그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용기가 솟아났다.
“저... 부사장님!”
문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는 그를 불러 세웠다. 돌아본 그는 그대로 이쪽을 보고 서 있을 뿐, 무슨 일이냐는 되물음조차 하지 않았다.
“혹시, 하남에서 뵀을 때... 구급차를 불러주신 분이 부사장님이신가 해서요.”
“......”
긴장한 모습이 역력한 눈앞의 ‘윤혜안’을 잠자코 내려다보던 이해성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담담히 얘기했다.
“눈앞에서 사람이 그렇게 쓰러졌는데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으니까요. 윤혜안 씨가 아닌 누구였더라도 난 똑같이 했을 겁니다.”
“......”
“그 일로 감사 인사를 하려던 겁니까?”
“...네.”
“그래요. 그럼, 인사는 받아두죠.”
특별히 더 경계하거나 날카롭게 얘기하는 느낌조차 없었다. 그저 사무적이고, 무미건조했다.
네가 아닌 누구였더라도 나는 똑같이 했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강조하고 싶어 했다. 그 일로 더 이상 자신과 어떻게 엮여 보려는 생각 따위는 하지 말라는, 여지를 두지 않는 철저한 선 긋기가 느껴지는 화법이었다.
그에게서 더 강한 반응을 이끌어 낸 건 오히려 문 안쪽에서 들려온 얘기들이었다.
“근데 황지우 역할을 또 아이돌 출신으로 뽑으신 건 좀 그래요.”
‘크림 맨션’ 거주자 중 의사 역할을 맡은 남자 배우의 목소리 뒤에 조원태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아이돌 출신인 거야 상관없지만 말이야. 흠... 지난번 최홍서도 그렇고 이번 윤혜안도 그렇고.. 사생활 지저분한 배우들을 꼭 쓸 필요가 있나 싶긴 하네.”
‘또 아이돌’ 출신이라는 표현은 앞서 황지우 역할로 발탁되었던 최홍서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굳어지기 시작했던 이해성의 표정이 점점 더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미 앞에 서 있는 ‘윤혜안’은 안중에도 없는 듯, 그는 문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에 집중하고 있었다.
“윤혜안도 윤혜안인데 최홍서는 더 대단했잖아요. X군 스캔들인지 뭔지, 한창 영화 촬영하던 중에 터졌으면 어땠을지... 상상하면 오싹하다니까요.”
“호스트바 출신이라면서요? 그럼 어차피 그때부터 이미 2차도 나가고 했을 거 아니에요. 뭐, 협박을 당했느니 어쩌느니 하던데... 애초에 몸을 안 팔았으면 협박당할 일도 없었겠죠. 본인도 그걸 잘 알았으니 뛰어내린 거 아니겠어요? 자기가 백 프로 피해자라고 생각했으면 왜 뛰어내렸겠어요?”
그의 양쪽 턱 근육이 단단하게 뭉치고,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관자놀이에서는 힘줄이 꿈틀거렸다. 분노를 억제하느라 어깨가 들썩거렸고, 문손잡이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 순간에는 그를 말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최홍서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어깨로 손을 뻗었다. 생각을 거친 행동이 아니었다. 그는 거의 반사적으로 매몰차게 최홍서의 손목을 쳐냈다. 아주 더럽고 불길한 것이라도 닿은 것처럼. 그러고는 이쪽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미 온 신경을 문 안쪽의 대화에 빼앗겨 있었으니까.
내쳐진 손목의 아픔보다 그에게 직접적으로 거부당했다는 정신의 충격이 더 컸다.
얼얼하게 매운 손을 망연히 내려다보던 최홍서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룸 안으로 들어서는 그의 뒷모습이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다들 재미있는 말씀을 나누고 계시네요.”
“아... 부사장님 오셨어요...”
그의 등장과 함께 일순 방안이 조용해졌고, 배우들은 물론 제작진들까지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소리를 높이거나 흥분해 있지는 않았지만, 그는 온몸으로 불쾌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의 등만 바라보고 있는 최홍서에게도 분명하게 전해져올 정도였다.
“최홍서 씨는 몸을 팔고 있던 과거를 책잡힌 게 아니라, 가해자 측이 주장하는 그 첫 번째 성매매조차도 원치 않은 폭력에 의해 일어난 범죄였던 겁니다. 서준영 씨.”
호스트바 출신이니 어차피 그때부터 2차를 나갔을 거라고 넘겨짚었던 남자 배우의 앞으로 한발 다가서면서, 이해성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자신이 피해자임에도 그 폭력이 협박의 빌미가 되고, 그것으로 다음 접대를 강요받고, 다시 또 그 접대가 협박의 빌미를 살찌우고... 성범죄 특유의 끔찍한 악순환에 갇혀 고통받고 철저히 이용당했던 최홍서 씨를 재판부가 피해자로 인정했는데. 좀 전에 제가 들은 얘기들은 대체 뭘까요?”
말을 마친 이해성은 배우들을 슥 돌아보았다. 선생님에게 혼나는 학생처럼 다들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아, 다들 뉴스도 안 보시는 건가? 소문만 좋아하고?”
“......”
“아니면, 사건 당사자나 하물며 참고인조차도 아닌 본인들이 사건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하고 더 분명하게 진실을 가려낼 수 있다고 믿는 겁니까?”
“......”
“그렇게 오만할 정도로 멍청해요?”
문밖에서, 마치 연극을 관람하는 관객처럼, 한 발 떨어져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동안 최홍서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해성은 분명 최홍서의 명예를 위해 화를 내고 있었다. 최홍서가 괴롭힘당하면 화가 난다고 했던 그였으니까. 실제로 최홍서가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면 조용히 넘어가지 못했던 그였으니까.
그런데 왜 나는 이 상황을 지켜보기가 이렇게 힘든 걸까.
그는 분명 나를 위해 화를 내주고 있는데.
바로 몇 걸음 뒤에 서 있는 나를 알지 못하는 것도, 혐오스러운 종류의 벌레라도 되는 것처럼 내 손을 쳐내는 것도, 나의 겉모습이 윤혜안이기 때문일 뿐, 그는 지금도 저렇게 나를 아껴주고 있는데...
그가 다시 한번 서준영이라는 배우에게 다가갔다. 그가 어깨에 손을 올리자, 서준영은 경기라도 일으키듯 움찔 떨었다.
“최홍서 씨가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했으면 왜 뛰어내렸겠냐고 하셨죠, 서준영 씨?”
“아, 아니요, 부사장님, 저는 그게...”
“서준영 씨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 때문이었던 거 아닐까요?”
“......”
그의 말에 서준영은 변명하려던 입을 도로 꾹 닫아버렸다. 서준영의 어깨를 내리누르듯이 힘을 주다가 손을 떼어낸 그는 다시 한번 사람들을 슥 둘러보았다.
“본인들이 지금 가해자 측의 주장을 그대로 떠들고 있다는 건 압니까?”
“......”
“남을 욕하고 싶으면 철저히 신중해야 돼요. 요즘 세상에선 무식해서 떠든 얘기도 범죄가 돼서 대가를 치를 수 있거든요.”
“......”
“조심하셔야죠, 배우님들.”
여전히 목소리 한번 높이지 않고, 그는 자신의 분노를 효율적으로 전달하고 있었다. 강 감독의 응접실에서, 또 아래층 거실에서 조 사장에게 그랬던 것처럼.
“투자자로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괜히 트러블 일어나서 영화 도중에 하차하시게 되면... 제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잖아요? 상상하면 오싹해져서요.”
“......”
“그렇죠, 오인경 씨?”
X군 스캔들이 한창 영화를 촬영하는 중에 터졌다면 어땠을지 오싹하다고 했던, 그 여배우를 정확히 집어내면서 그가 말했다.
지금 모두가 침묵하고 있는 건 그가 이해성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걸 최홍서는 알 것 같았다. 적어도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들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할 말이 없어서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거운 침묵을 깬 것은 조원태의 진중한 목소리였다.
“후배들 앞에서 제가 발언이 경솔했습니다. 부사장님 말씀을 듣고 있자니 부끄럽네요. 진실이 밝혀진 일에 대해 제가 사적인 편견으로 고집을 부렸습니다.”
조원태의 인정과 사과 뒤에도 이해성의 기분은 그다지 나아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더 하고 싶은 얘기도 없는 듯 보였다. 그는 지쳐 보였고, 자신이 이렇게 분노해 봤자 결국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라는 좌절감으로 체념해버린 사람 같았다.
허리에 한 손을 짚은 채 하관을 넓게 쓰다듬는 그의 모습은 이제 최홍서의 눈에 외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다가가고 싶었다. 다가가서, 그의 팔과 어깨를 쓰다듬고, 두 손안에 뺨을 가두고, 눈을 맞추고 싶었다. 그를 껴안고 위로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몸에 손가락 하나 댈 수 없었다. 그에게 경계 당하면서, 그의 고독과 슬픔을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것이 윤혜안으로서의 자신에게 허락된 역할이었으니까.
직사각형의 열린 문은 이해성을 촬영하는 프레임 같았다. 고개 숙인 사람들을 배경으로 그 프레임 안에서 말하고 움직이고 감정을 표출하는 그는 배우 같았다. 문밖의 ‘윤혜안’은 관객처럼, 아무 연관도 없는 외부인처럼, 철저히 그의 관심 밖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최홍서가 아닌 윤혜안이라는 것을, 자신의 죽음을, 또 한 번 그로 인해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윤혜안으로 눈 떴다는 사실에 순탄하게 적응하면서 또 한 번의 기회를 얻은 것처럼 살아갈 수는 없을 거라고. 이쪽을 돌아보지 않는 그의 등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편안해진 사람도, 해방된 사람도 없었다.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그런 선택을 했던 것일까.
“부사장님, 그만하면 다들 알아들었을 거예요. 이리 들어와요.”
그런 이해성을 다독이며 분위기를 바꿔보려 나선 건 강우현 감독이었다.
“자, 다들 이해해 주세요. 최홍서 군이랑은 프리 프로덕션1) 단계까지밖에 함께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작품 준비하면서 정이 들었었거든. 부사장님은 또 홍서 군 연기를 보고 투자를 결심하시기도 해서... 저기, 애틋함이 있으시니까. 다들 그 부분은 인지를 해주시고...”
배우들을 등지고 돌아선 이해성이 강 감독이 자리한 상석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프레임 안에서 사라진 그를 찾기 위해 최홍서는 문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1) 프리 프로덕션 : 영화가 촬영에 들어가기 전의 준비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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