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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백-60화 (60/185)
  • 60화

    “여태 붙어있다가 잠깐 담배 한 대 피우고 커피 사 왔는데. 그사이에 깨셨네요.”

    서랍장 위에 커피를 내려놓은 용재는 티슈를 두어 장 뽑아 최홍서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괜찮으세요? 웬 땀을 이렇게 흘리셨어요?”

    “괜찮아요. 고마워요, 용재 씨. 내가... 직접 닦을게요.”

    괜찮다고 말하는 최홍서의 입술과 얼굴은 핏기 없이 파리했다. 어째 잠들어있을 때보다 더 안색이 좋지 않은 것 같아, 용재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까까진 잘 주무시고 계셨는데. 악몽이라도 꾸셨어요?”

    아주 긴 꿈을 꾸었던 것 같다. 인생을 한 번 더 살아내기라도 한 것처럼 아주 긴 꿈이었다. 땀을 닦아내던 손을 무릎 위로 떨어뜨린 최홍서는 손안에서 티슈를 꽉 쥐었다.

    그를 만났고, 함께 남산을 걸었다. ARA의 부사장이 아닌 이해성 개인의 명함을 받았고, <러브 스토리>와 <시티 오브 엔젤>과 <이터널 선샤인>을 함께 보았다. 그의 VVIP가 되어 그의 손길과 입술에 사랑받았으며, 그의 전부를 느껴보았었다. 그의 품에서 잠든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았다.

    악몽...

    최홍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굉장히, 좋은 꿈을 꿨어요.”

    용재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좋은 꿈을 꿨는데 왜 꼴이 그 모양이냐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최홍서가 너무 지쳐 보였기에 자세히 물을 생각은 없었다.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앉아있던 최홍서가 용재를 휙 돌아보고는 팔을 붙잡았다. 눈에도 갑작스레 생기가 돌았다.

    “용재 씨! 나 오디션... 오디션 어떻게 됐어요? 내가 황지우 역할 맡은 거 맞죠? 확정인 거죠?”

    “까, 깜짝이야. 그럼요, 형이 무려 1,0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캐스팅되셨죠!”

    “하아... 다행이다...”

    최홍서는 그제야 비로소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윤혜안으로 깨어난 이후의 시간은 온전히 그대로인 듯했다.

    하지만 용재는 심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최홍서의 기색을 조심스레 살폈다.

    “의사 선생님이 특별한 이상은 없다고 하시니까 다행인데요... 이상이 없는데 그럼 대체 왜 쓰러지셨던 건지...”

    아무 이상이 없는데 기억을 잃고, 아무 이상이 없는데 쓰러져 의식을 잃는다. 의외로 병원에서는 그런 일들이 드문 현상이 아니었다. 병명과 원인, 치료법이 명확한 환자가 오히려 운이 좋은 케이스일 정도로. 이런 경우, 의사가 해줄 수 있는 말도 거기서 거기였다. 특별한 이상은 없다, 과로하셨거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생길 수 있는 일이다,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술·담배를 멀리하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조심하고...

    하지만 최홍서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쓰러진 것은 왠지 그런 두루뭉술한 일반론적인 이유 때문이 아닐 것 같았다. 쓰러지기 전의 감각을 되살려 보면,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낯선 종류의 두통과 구토감이었다. 몸속의 장기가 자신을 밀어내면서 몸과 혼이 서로 뒤틀리는 것 같은 감각... 굳이 설명하자면 그런 것에 가까웠다.

    윤혜안의 육체가 일으키는, 말하자면 일종의 부작용이 아닐까 싶었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자신의 추측일 뿐이었지만...

    “그래도 이따가 진료는 받아 보셔야 돼요. 아, 지금 가서 선생님 모시고 올까요?”

    “잠깐만요, 용재 씨!”

    최홍서의 다급한 목소리에 용재는 반쯤 돌아섰던 몸을 다시 되돌렸다.

    “근데 나, 어떻게 쓰러진 거예요?”

    “그건 제가 묻고 싶어요. 설마 또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세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어떻게 쓰러지게 된 건지가 기억에 없어서요.”

    용재는 심각해진 얼굴로 침대 주변의 의자를 끌어다 주춤주춤 자리를 잡았다.

    “하남에 있는 봉안당 가셨던 건요?”

    “아... 그건 기억해요.”

    “형 거기서 쓰러지셨어요.”

    “......”

    봉안당. VIP실에 안치되어 있던 자신의 유골. 팬들의 그림과 편지.

    그리고 적대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이해성의 화난 얼굴...

    ‘세상에 없는 아이라고 해서 당신 같은 사람들이 멋대로 이용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야. 알겠습니까?’

    그래, 두통과 구토감을 느낀 게 분명 그때쯤이었다. 그의 앞에서 쓰러지지 않으려 정신을 붙잡기 위해 소파의 등받이를 꽉 쥐었던 것도 기억이 났다. 그랬다. 분명 그가 보는 앞에서 쓰러졌다.

    최홍서는 이번엔 용재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럼, 여기에 저 데려다주신 분은요? 용재 씨 못 봤어요? 키 엄청 크고, 양복 차림에... 되게 보기 드문 미남인데. 누가 봤으면 분명히 기억하실 거예요. 접수처나 간호사분들이나...”

    지금이라도 병실을 뛰어나가면 그를 볼 수 있을 것만 같아서, 평소보다 말이 빨라졌다. 들썩거리며 흥분한 최홍서를 안정시키기 위해 용재가 의자에서 일어나 최홍서의 양어깨를 지그시 내리눌렀다.

    “데려다주신 분이라니요? 형 여기 구급차 타고 실려 오셨어요.”

    “구급...차요?”

    최홍서는 어깨를 누르는 용재의 가슴팍을 멱살 쥐듯 비틀어 쥐었다.

    “어떤 분이 신고를 해주셨대요. 천만다행이죠. 어쨌든 구급차에 실려서 혼자 오신 거예요. 전 병원 연락받고 달려와서 형 응급실에서 여기로 옮긴 거구요.”

    목숨을 살려줄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용재의 티셔츠를 꽉 붙잡고 있던 최홍서의 손이 느리게 아래로 떨어졌다.

    그래, 그렇겠지.

    왜 그가 나를 여기까지 직접 데리고 왔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에게 지금의 나는 최홍서가 아닌데.

    너무 바보 같은 착각이어서 피식피식 웃음이 새었다.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를 만큼 창피했다.

    “형... 괜찮으세요? 뭔가, 저승사자 같은 걸 보셨다는 건, 그런 건 아니죠?”

    공포에 질린 얼굴로 용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용재의 말에 최홍서는 더 웃음이 났다. 연거푸 고개를 저으면서 손등으로 입가를 문질러 닦았다.

    “아니에요, 용재 씨. 내가... 꿈이랑 착각을 했어요.”

    “아까 꾸셨다는 좋은 꿈이요?”

    “네, 좋은 꿈이요. 아주 좋은 꿈.”

    최홍서로서의 인생에는 그다지 좋은 일이 없었다. 몇 년을 무명으로 고생하다 ‘레이어드’로 얻은 얼마간의 인기가 그나마의 영광이었지만, 그때도 명 사장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었던 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와 보냈던 짧은 시간. 그 시간만으로도 이전의 삶은 가치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이전의 삶은 전부 좋은 꿈이었다. 다른 어떤 개 같은 일들도 감히 그 빛을 희석시킬 수 없을 만큼, 아주 좋은 꿈.

    “근데 형, 거긴 왜 가셨던 거예요?”

    “네?”

    “봉안당이요. 거기에 아는 분이라도 모셔져 있어요? 옛날 일이 기억이 좀 나신 거예요?”

    기대감에 찬 용재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곳에 ‘레이어드’ 최홍서가 안치되어 있다는 것을 용재는 전혀 모르는 듯했다.

    호스트바 출신의 X군이 최홍서라는 자극적인 최초 보도 내용은 전 국민이 알고 있었다. 그때껏 최홍서가 누구인지도 몰랐던 사람들까지도. 하지만 그 후에 추가로 밝혀진 진실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실은 그 X군이 재벌가 권력자에 의해 성폭력을 당했으며, 그것을 빌미로 협박 받아 끌려다니며 최초의 폭력자와 소속사 사장에 의해 착취되어 왔었다는 진실이 밝혀졌어도, 그것은 재판의 결과로서만 존재할 뿐 대부분의 대중은 여전히 최초 보도 내용만으로 최홍서를 기억하고 있었다.

    심지어 최종 재판 결과를 알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호스트바 같은 곳을 기웃거리니 그런 꼴을 당했다는 식으로 가해자의 책임이 아닌 피해자의 처신 문제로 몰고 가기도 했다.

    최홍서가 32층 건물에서 뛰어내린 ‘독한 놈’이라는 것은 전 국민이 알아도, 왜 최홍서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최홍서보다 ‘더 독한’ 그 배경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니 최홍서가 방콕의 32층에서 뛰어내린 것은 알아도, 그 후에 어디로 갔는지를 모르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현상이었다.

    용재의 잘못이 아니었고, 그에게 섭섭함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최홍서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냥... 최홍서 씨 역할을 내가 맡게 돼서, 그래서 한번 가봤어요. 작품 열심히 잘해보겠다고 인사라도 하려구요.”

    “아, 거기가 최홍서 묻은 봉안당이었어요?”

    봉안당은 사람을 묻는 곳이 아니었지만, 최홍서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방콕에서 죽었다는 것까지는 알았는데, 그러고 나서 어떻게 한국까지 시신을 가지고 왔었나 보네요. 절차 복잡했을 텐데.”

    죽었다, 시신... 그런 직접적인 표현들이 조금 힘들었지만 마른침을 삼키며 버텨냈다.

    “인정 있는 일 하신 건 맞는데, 그래도 형 몸을 생각하셔야죠. 깨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적응하고 계신 중인데. 더 큰 일이 생겼으면 어쩔 뻔했어요.”

    뉴스 속 철저한 타인과는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바라보지만, 자신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소중하게 여기는... 용재는 그저 선량한 보통 사람일 뿐이었다.

    “자, 형. 좋아하시는 아아예요. 금방 깨어나실 것 같아서 제가 형 것까지 사 왔어요. 특별히 이상 있는 게 아니어서 깨어나면 아무거나 드셔도 된다고 하셨거든요. 전 가서 형 깨어났다고 데스크에 말씀드리고 올게요. 사장님한테 전화도 하구요. 쉬고 계세요.”

    최홍서는 용재가 손에 쥐여주는 커피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었다. 문밖으로 반쯤 나섰던 용재가 다시 이쪽을 돌아보며 씩 웃었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또 저번처럼 오래 못 깨어나셔서 월요일 식사 자리에 참석 못 하시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진심으로 안도하는 용재를 보면서 최홍서도 최선을 다해 웃어 보였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긴 한숨을 내쉬었다. 꿈의 여운이 여전히 몸속에 남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도 그의 품에서 잠든 그의 얼굴을 만지고 있었던 것 같아서, 한참을 그대로 앉아 제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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