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그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최홍서는 무거운 몸을 반쯤 돌려 앉았다. 편하게 기대라고, 그는 무릎을 세워 등을 받쳐 주었다. 이 정도면 다정함도 특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을 만큼, 가끔 이렇게 그에게 놀랄 때가 있었다.
자라는 동안, 부모는 제대로 예의범절을 가르친 적이 없었다. 학교생활을 하면서, 사회에 나온 이후, 눈치껏 체득하며 살아왔었다. 이해성은 아무렇게나 자라 투박하기만 한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만나왔던 여느 VIP들과도 전혀 달랐다.
흉내를 내서라도 배우고 싶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그에게 돌려주고 싶었으니까.
찰방찰방. 그의 품 안에서 자세를 바꾸어 옆으로 앉은 최홍서는 팔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만졌다.
“잘하셨어요. 담배, 건강에 안 좋잖아요.”
뭘 하는 건가,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최홍서를 지켜보던 이해성이 뺨을 만지는 간지러운 촉감에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칭찬 듣는 게 오랜만이라, 굉장히 설레는데?”
“오랜만이에요?”
“날 혼내는 사람도 없지만 칭찬해 주는 사람도 없거든. 아부하는 사람은 많아도 그건 칭찬이 아니니까.”
그는 얼굴을 만지는 최홍서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예쁘고 신기한 것이라도 보듯 애틋하게 내려다보며 정성껏 어루만졌다. 그러고는 손끝에, 손톱 하나하나에 입을 맞췄다. 천천히. 각각의 모양과 색깔까지 전부 기억하겠다는 듯이. 마지막에는 아프지 않을 만큼 이에 힘을 주면서 손톱을 꾹, 깨물기도 했다.
그 행위에서도 최홍서는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그랬다.
이번에는 최홍서가 그의 손을 가져가 조몰락거렸다. 신장이 신장인 만큼 그의 손은 굉장히 큰 편이었다. 생김새가 단정해 언뜻 그리 커 보이지 않을 뿐, 막상 직접적으로 비교하거나 만져보면 손가락의 길이나 굵기, 손등의 폭이나 두께가 상당했다. 농구공을 아주 가뿐하게 한 손으로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크기였고, 그만큼 무겁기도 했다.
두 손으로 그의 왼손을 잡아 손끝에 입을 맞추고 손톱을 깨물었다. 그가 해줬던 것과 똑같이.
욕조 가장자리에 팔꿈치를 걸치고 관자놀이를 괸 이해성은 웃음 띤 얼굴로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 따라 하는 건가?”
“네.”
“내가 이렇게 귀여워?”
“......”
“두 손으로 잡고 그러고 있으니까 꼭 호떡 먹는 애기 같네.”
귀엽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가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졌으면 해서 흉내 냈던 건데. 아무래도 실패인 것 같았다.
물에 젖어 무거워진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자, 그가 다시 꼼꼼히 이마 뒤로 넘겨주었다. 그리고 해면 스펀지에 샤워젤을 짜내 거품을 만들어 최홍서의 상체를 부드럽게 문질러 주었다.
정말 아기가 된 기분이었다.
이런 지극한 돌봄을 받아본 기억도 없거니와, 하물며 이렇게 해주는 상대가 이해성이라니. 직접 겪고 있는 분명한 현실인데도, 머리로 의식하려 할 때면 여전히 비현실적이었다.
어깨 위를 문지르는 그의 손길에 가만히 몸을 맡기고 있다가, 스펀지에서 흘러내려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거품을 손으로 떠 올렸다.
“이거, 아저씨가 가끔 쓰는 향수랑 향이 비슷해요.”
“내 향수가 마음에 들었나?”
“그때 남산에서 같이 걸었을 때... 집에 와서도 그 냄새가 계속 났어요. 며칠 동안.”
향기가 며칠 동안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각인되어 환후를 느꼈던 것일 뿐. 그 향기가 좋았고, 잊고 싶지 않아서 계속 떠올렸으니까.
“공적인 자리에 나갈 때는 향수를 안 쓰는데, 홍서 만날 때만 가끔 뿌렸지.”
잘 보이려고. 홍서 위해서.
귓가에 바짝 입술을 대고 덧붙여 속삭인 목소리에 어깨가 움츠러들면서 짜릿함을 느껴버렸다.
“무슨 향수예요?”
양팔을 번갈아 가며 들어 올리고 닦아주던 그가 손을 멈췄다.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쪽, 입을 맞췄다.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왜요. 몰래 똑같은 거 사려고?”
“사면... 안 돼요?”
“안 되긴. 내일 한 병 선물할게요. 파리의 조향사에게 주문한 오더 메이드라 시중에선 구할 수가 없거든.”
“그렇게 귀한 건데 저 주셔도 돼요?”
싱거운 얘기를 다 들어본다는 듯 그가 짧게 웃었다.
“너보다 귀한 게 어디 있어.”
“......”
직접적인 애정 표현에 귀가 화끈거렸다.
고개를 숙이고 얼굴의 열을 가라앉힌 최홍서는 용기를 내서 스펀지를 쥔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제가 해드릴게요.”
몸을 더 돌려 마주 보고 앉아서 그의 목과 어깨를 정성껏 문질렀다. 간지러워서인지, 흐뭇해서인지, 그의 얼굴에는 계속 웃음이 걸려있었다. 넓고 단단한 가슴 위를 문지를 때쯤, 그가 자신의 가슴에 묻은 거품을 최홍서의 코끝에 슬쩍 묻혔다.
“전에... 내가 진짜 비밀 말해주겠다고 했던 거, 기억해?”
“네.”
“사실 카메라를 모으는 취미만 있는 게 아니라, 사진을 찍기도 하거든.”
“......”
중요한 얘기가 시작되는 것 같아서, 최홍서는 손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옆에 와서 기대어 앉으라고, 그가 오른팔을 벌려 틈을 만들어 보였다. 그 열린 품 안으로 기어가면, 길고 튼튼한 팔이 어깨를 안아주었다.
고개를 기울여, 최홍서의 관자놀이에 입술을 묻으면서 그가 이어 말했다.
“그동안 외국에서 전시회도 조그맣게 서너 번 열었었어. 일부러 작은 도시를 고르고, 매번 갤러리를 바꿔가면서.”
“......”
“물론, 가명으로.”
“아...”
“그래서 나름대로 사진을 못 찍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셀카가 나를 좌절시켰지.”
그는 일부러 더 진지하게 얘기하면서 고개를 젖혀 욕조 가장자리에 뒷머리를 기댔다.
“아... 셀카는 그냥 사진하고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었어.”
엄살 피우는 그를 바라보던 최홍서는 손을 뻗어 푸르스름한 턱 끝을 쓰다듬었다.
“아저씨는 얼굴이 잘생겨서 셀카는 못 찍어도 돼요.”
“흠... 진짜?”
“진짜.”
“진짜 그렇게 잘생겼으면 키스해 줘.”
그가 자신의 입술 위를 톡톡 두드리며 키스를 요구했다.
욕조 틀에 뒤통수를 기대느라 최홍서보다 눈높이가 낮아져 있었고, 갸름하게 뜬 눈으로 올려다보는 젖은 얼굴이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그가 늘 해주는 것처럼 두 손으로 얼굴을 쥐고, 고개를 숙여 가까이 다가갔다. 물에 젖은 따뜻한 입술에 여러 번 정성스럽게 입을 맞췄다. 그는 만족스러워 보였다.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는 대신, 웃음을 참으려는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눈꺼풀을 내리뜬 채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물속에서 최홍서의 허리를 휘감은 그의 팔이 그대로 몸을 들어 올렸다. 다음 순간 최홍서는 그의 무릎 위에서 그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다음 전시에는, 홍서가 와줬으면 좋겠는데.”
“갈게요.”
스펀지를 쥔 손으로 그의 윗가슴을 꾹 누르면서 대답했다.
“진짜?”
“꼭 갈 거예요.”
“......”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럼, 키스.”
재미있는 놀이라도 찾은 아이처럼, 그는 또 입술 위를 톡톡 두드렸다. 키스쯤 얼마든지 몇 번이라도 해줄 수 있었다. 신중하고 차가운 인상을 주는 섹시한 입술 위에 여러 번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가 입술을 열어 혀끝으로 최홍서의 윗입술 안쪽을 건드렸고, 입맞춤은 진한 키스로 발전했다. 거품으로 미끌거리는 서로의 몸을 껴안고, 조금 전까지의 정사가 없었던 일인 것처럼 다시 또 불붙는 욕정을 느끼며 오랫동안 키스를 나누었다.
진짜 비밀.
최홍서에게도 그런 것이 있었다.
순간,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그에게 낱낱이 이야기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라면, 이해성이라면,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까? 하지만... 그래서 더 그에게 잔인한 일이 되지 않을까?
카메라를 모으기만 하는 게 아니라, 가명으로 전시도 열면서 사진을 찍고 있다고. 나의 비밀도 그런 종류였더라면...
그날 밤, 그의 파자마를 입고, 그의 침대에 누워, 그의 품에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한참 더 나누었다.
가족과는 그다지 가깝게 지내지 않는다는 말에 그는 더 이상 자세히 묻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정지인과 현수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현수는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정지인에게는 조만간 소개할 수 있을 거라고. 소개하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희망을 얘기하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그렇게 자기 얘기를 길게 떠들어본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약간은 수다스럽게 재잘거리던 최홍서의 목소리는 점점 느려지고 힘을 잃어갔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자신의 하잘것없는 역사를 그와 나누면 나눌수록,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 같은 께름칙함이 점점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다.
잠든 거냐고, 그가 두어 번 목소리를 낮춰 물었고, 최홍서는 잠든 척 눈을 감은 채 대답하지 않았다. 잘 자, 이마에 입을 맞춰준 그가 먼저 잠들기를 기다렸다.
부연 어둠 속에 엎드려 그의 잠든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잠들어있는 그를 독점하며 마음껏 바라보는 것은 그와 서로 마주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 있었다. 그가 나만의 것이라는 착각을 만끽할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만져보기도 했다. 길고 진한 눈썹, 완벽하게 빚어진 코, 건강한 뺨, 남성적인 입술과 턱... 특이한 아저씨. 특별한 아저씨.
“......미안해요.”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의지와 무관하게 저절로 입술을 열고 나온 말이었다. 어떤 생각을 했던 것도 아니고, 무엇을 떠올렸던 것도 아니다. 그저 어느 순간, 최홍서의 뺨에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
제 3 부
눈가로 흐른 눈물이 관자놀이를 적시고 있었다.
이상하다. 눈물을 흘린 건 고작 한줄기뿐이었는데, 뺨과 베개가 흥건히 젖어있었다. 울음의 뒤끝을 추스르느라 어깨는 서럽게 떨리고 있었다.
“......”
그제야 최홍서는 자신이 잠들어있었고, 막 꿈에서 깨어난 것임을 알았다. 너무 길고 생생한 꿈을 꾸고 난 직후, 잠시 현실 감각이 돌아오지 않는 그 기분과 같았다.
마른침을 삼켜보았다. 입안과 목이 바싹 말라 있어 통증이 느껴졌다.
그제야 자신이 누워있는 곳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눈을 뜬 곳은 전혀 낯선 장소였다. 몸을 덮은 이불, 팔뚝에 꽂힌 링거의 주삿바늘, 다소 휑하고 청결한 공간... 이해성의 침실이 아니었다.
순간, 최홍서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어지러움이 일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해성의 침실일 리가 없었다. 최홍서였던 자신은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이곳은 분명 병원의 일인실이었다. 그런데 지난번에 윤혜안으로 눈을 떴던 그곳이 아니었다.
핸드폰, 핸드폰부터 찾아야 했다.
핸드폰은 침대 옆 서랍장 위에서 충전 중이었다. 충전기에서 핸드폰을 분리하는 최홍서의 손이 거칠었다. 불안함에 미칠 것 같았다. 까만 핸드폰 액정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윤혜안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최홍서는 일단 안도감을 느끼고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적어도, 다시 또 새로운 곳에서 다시 또 새로운 인물로 깨어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윤혜안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에 안도해야 하다니... 얼굴을 문지르는 최홍서의 손가락 사이로 비틀린 쓴웃음이 흘렀다.
땀에 젖어있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고, 포털사이트에 <크림 맨션>부터 검색했다. ‘황지우’ 역할의 배우를 새로 뽑는 오디션에 천 명이 지원했다는 기사가 가장 최근 항목이었다.
아... 그래, 아직 캐스팅 기사가 정식으로 나지 않았지...
그것만이라도 빨리 확인하고 싶어서 마음이 급했다. <크림 맨션>의 황지우 역할을 다시 한번 따냈다는 것. 아직 그를 지켜볼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다는 것. 그것만...
문 쪽에서 들려온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최홍서는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돌렸다.
“형!”
양손에 커피를 든 용재였다. 자신의 얼굴이 아직 윤혜안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만큼이나 용재의 얼굴도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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