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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백-52화 (52/185)

52화

“내일은 오랜만에 스케줄 깨끗이 빼놨으니까. 마음 편히 푹 쉬어도 돼. 당분간 해외 스케줄 많아질 수 있다는 거, 오해하지 않으시도록 잘 말씀드리고. 알겠지?”

명 사장은 손을 뻗어 팔걸이에 올려둔 최홍서의 팔을 슬그머니 붙잡으며 말했다. 친밀한 사이인 척하는 스킨십에 소름이 끼친 최홍서는 반사적으로 팔을 확 당겼다.

명 사장은 순간적으로 못마땅한 표정을 짓긴 했어도 최홍서의 행동을 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텐데.

이런 부분에서 새삼 이해성이 사회적으로 VVIP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최홍서는 쓴웃음을 숨기며 짙게 선팅 된 새 차의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기다리고 있다는 주상복합은 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이해성 측에서 미리 조치를 취해 놨는지, 입주민 차량만 진입할 수 있다는 지하 주차장은 별다른 확인 절차도 없이 ‘레이어드’의 새 스프린터에 차단기를 열어주었다. 뒤따라오던 사생팬들이 탄 몇 대의 차량이 입구에서 더 들어오지 못한 채 멀어져 갔다.

자동차는 지하 4층까지 내려갔다. 미리 접선 위치를 안내받았는지 매니저의 운전에 거침이 없었다. 지하 4층의 코너 자리에 정차해 있는 이해성의 세단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차를 발견하자 최홍서는 숨통이 트였다. 숨이 막히고 있는 줄도 몰랐는데.

“어? 홍서 형은 왜 여기서 내려요?”

“형은 이 새끼들아, 입국하자마자 또 일하러 간다. 형 고생하는 거 알면 니들은 연습실 가서 연습 좀 해. 영주 너, 호찌민에서 또 무대 실수했다며. 오른쪽, 왼쪽이 그렇게 구분이 안 되냐? 어? 그게 그렇게 어려워?”

이해성을 만나는 것을 ‘일하러 간다’고 표현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최홍서는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이해성이 지금까지의 VIP들과는 다른 관계를 원한다는 것을 알아도, 명 사장은 제 버릇 개 주지를 못했다.

명 사장이 멤버들을 타박하는 사이, 조용히 가방을 챙겨 차에서 내려섰다. 가방끈을 어깨에 추스르며 걸음을 옮기려는데, 드르륵, 순간 손안에서 짧게 진동이 울렸다. 당근판매자님의 메시지였다.

《뒷좌석 말고 조수석으로 와요^^》

그가 지켜보고 있으리라는 의식에 버킷햇을 더 깊숙이 눌러 쓰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어서 와요.”

조수석의 문을 열자마자 그의 밝은 얼굴과 인사가 반겨주었다. 직접 운전을 해서 왔는지 그는 운전석에 앉아있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라 조금 낯설고 신기했다.

“잘 다녀왔어요?”

“네.”

“가는 길에라도 데이트하고 싶어서 왔어요.”

최홍서가 제대로 착석하고 나자, 그는 완전히 몸을 돌려 엄지로 최홍서의 뺨을 쓸었다.

“얼굴 좀 보여줘요. 보고 싶어서 혼났네.”

얼굴을 보여달라는 말에, 최홍서는 이어폰도 빼고 모자도 벗은 다음 그를 향해 상체를 틀었다. 그리고 목을 앞으로 조금 길게 늘여 그의 손에 얌전히 얼굴을 맡겼다. 어느새 이런 정도의 스킨십은 자연스러워져 있었다. 자연스럽게 되었다는 것이 떨리거나 설레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었지만.

여기 있습니다, 라고 얼굴을 내어주는 듯한 최홍서의 행동에 그의 입술에서 낮은 웃음이 흘렀다.

“착하다.”

이 칭찬을 듣는 것이 좋아서 더 착하게 굴게 되는 효과가 있었다.

“지난번에 홍서 씨 방콕 갔을 때보다 이번이 더 힘들었어요.”

볼을 살살 계속 쓸어주면서 그가 이어 말했다.

“호찌민 도착한 날 이후로 홍서 씨 좀 풀 죽었었잖아요. 무슨 일 있는 건지 걱정도 됐고.”

이번에는 두 손으로 양 볼을 가만히 감싼 그는 최홍서의 얼굴을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자세히 살펴보면 최홍서의 고민이나 감정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아... 그게... 멤버들하고 조금 충돌이 있었어요. 제가 엄격한 구석이 있어서 가끔 부딪칠 때가 있거든요.”

실은 이서경 전무 때문이었다.

이서경이 자기를 찾는다는 얘기를 들은 뒤로 최홍서는 좀처럼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통화나 메시지에서는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도, 이해성은 최홍서의 미세한 감정 변화를 알아챘던 것이다.

“그랬구나. 그래도 일인데 엄격해야 하는 게 맞죠. 리더로서의 홍서 씨 역량, 난 믿어요.”

“......”

“뒤늦게 캐스퍼가 된 사람이지만 ‘레이어드’의 중요한 역사는 영상으로 전부 훑었잖아요. 홍서 씨가 얼마나 팀에 열심이고 진심인지, 아는 사람들은 다 알아요.”

그의 손바닥 안에서 최홍서는 엷게나마 웃었다.

그가 마주 웃으면서 얼굴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대신 최홍서의 왼손에 깍지를 꼈다. 최홍서의 손등에 그의 입술이 가만히 닿아왔다.

“웃는 얼굴 보니까 조금 안심되네. 계속 마음 안 좋았는데.”

그가 말을 할 때마다 입술의 움직임과 입김의 온기가 손등에 그대로 느껴져 간지러웠다. 그 간지러움만큼 마음속에 가라앉은 이서경이라는 이름이 거치적거렸다. 떨쳐내고 싶었다. 그와의 시간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최홍서는 다른 화제를 꺼내 보았다.

“근데요. 저희 차가 바뀌었던데, 혹시 그거 부사장님이 해주신 거예요?”

“아... 음...”

최홍서의 손등에 입술을 묻고 있던 그가 미간을 좁힌 채 먼 곳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웠다.

“이거 어떻게 얘기해야 홍서 씨한테 덜 미움받을 수 있을까.”

“안 미워해요.”

“진짜?”

“진짜요. 저 생각해서 해주신 건데 왜 미워하겠어요. 궁금해서 여쭤본 거예요.”

“요즘 스케줄이 너무 많잖아요. 공항을 급하게 왔다 갔다 하는 빈도수도 잦고. 걱정돼요.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좀 더 안전한 차로 바꿔주는 정도밖에 없으니까. 스케줄을 줄이라고 할 수도 없고...”

“......”

“홍서 씨가 더 안전한 차를 탄다고 생각하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준비했어요.”

어떻게 해도 금액 면에서 그와 동등한 가치를 주고받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받기만 하는 건 물론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뭐든 해주고 싶은 그의 마음도 알 것 같았다. 마음이 무겁다는 이유로 그에게서 그 즐거움을 뺏는 것이 더 옳은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최홍서에게는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그것도... 목도리나 장갑인 거예요?”

최홍서의 질문에 그가 풀썩 웃으며 대답했다.

“모든 가치를 그렇게 치환해서 무게를 달아보지 않아도 돼요.”

“......”

“얼마라는 값이 아니라, 그냥 마음으로 봐줬으면 좋겠어.”

“혹시 저희 사장님이 부탁드린 건...”

“으음, 그건 진짜 아니에요. 내가 홍서 씨한테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먼저 제안한 거지.”

“그런 거면... 감사하게 잘 탈게요. 멤버들도 엄청 좋아했어요. 진짜 톱 배우들이나 타는 차라면서...”

“맞잖아요, 톱 배우.”

그가 너스레를 떨면서 깍지를 낀 손을 들어 최홍서를 가리켰다. 바로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이서경 전무로 인해 부옇게 흐려져 무겁고 불안했던 마음이 거짓말 같았다. 이해성이 부리는 망각의 달콤한 마법에 취해 피식피식 웃던 최홍서는 문득 가방 속에 든 상자가 떠올랐다.

“아, 저도 선물 있어요.”

최홍서가 깍지를 놓고 가방을 뒤지는 동안, 이해성은 사탕 뺏긴 아이처럼 허전해진 손을 내려다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빈손에 최홍서가 다시 쥐여준 것은 짙은 자주색의 갸름한 상자였다. 같은 색의 리본이 정갈하게 장식된.

“쇼핑할 시간도 없어서 면세점에서 구입한 거라... 부사장님께 제가 받은 것들에 비하면 너무 소소한 거지만, 받아주세요.”

뜻밖의 선물에 그는 얼떨떨한 얼굴로 천천히 상자를 열어보았다. 내용물은 사선 스트라이프의 넥타이였다. 이해성은 한동안 푸른색 바탕에 연회색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넥타이를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아무 말도 없으니까 최홍서는 더 견디기가 힘들었다.

“이미 많이 가지고 계셔서 이거랑 비슷한 색도 있으실 것 같은데. 그래도... 이건, 제가 드리는 거니까.”

마지막에 덧붙인 말은 나름대로 제법 용기를 내본 것이었다. 남자 친구다운 말을 하기 위해서.

문득 이해성의 따뜻한 손바닥이 다가와 목뒤를 감쌌다. 이마와 코끝이 닿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그가 나직하게 물었다.

“나 생각하면서 고른 거예요?”

최홍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이 부드럽게 뒷목을 좀 더 당겼고, 입술이 스치듯 가볍게 닿았다. 최홍서의 윗입술에 짧게 입을 맞춘 뒤, 그가 다시 물었다.

“공항에서 일부러 면세점에 들러서?”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이번에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예뻐 죽겠다.”

탄식 같은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입술과 입술 사이의 빈틈을 채우듯, 그의 입술이 진하게 포개어졌다. 서로의 입술을 번갈아 가며 천천히 머금다 조심스럽게 혀를 나누었다. 입술 바로 안쪽에서 혀끝만 살짝 할끔거리던 그의 혀가 최홍서의 반응을 살피면서 조금씩 더 깊은 곳까지 따라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격렬해지지도 않았다. 혀를 사용하는 키스임에도 이마나 콧등 위에 하는 입맞춤처럼 성적이기보다는 애정이 담긴 키스처럼 느껴졌다. 적어도, 그렇게 느껴지도록 하기 위해 많이 애쓰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의 혀를 처음 머금어본 저릿함에 최홍서는 자기도 모르게 눈앞의 가슴팍을 꽉 잡아야 했다. 그런 방식의 키스는 처음이었다.

최홍서의 입안에서 아주 조금씩만 움직이는 그의 혀는 무척 예의 바른 손님 같았다. 그의 혀가 완전히 빠져나간 후에야 최홍서는 멍한 의식 속에서 뭔가를 알 것 같았다.

보통 사람들의 보통의 첫 키스는 아마도 대부분 이런 방식이리라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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