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가게 오픈 전, 몇몇 선수들이 카운터의 마담 형과 지각비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최홍서는 그 주변을 맴돌다 적당한 타이밍을 봐서 마담 형에게 다가갔다.
“형.”
“어, 왜.”
“저번에 얘기하셨던 일 있잖아요.”
“어? 무슨 일?”
형은 장부를 기록하느라 최홍서 쪽을 보지 않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원양 어선 타는 거요. 예전에 선수였던 다른 형한테 형이 소개해 주셨다고... 그래서 그 형은 이제 선수 생활 접었다고 하셨었잖아요.”
그제야 형이 고개를 들어 최홍서를 보았다.
“아... 어... 그랬었지.”
“거기서 저 같은 초짜도 받아줄까요?”
형은 이번엔 펜까지 내려놓고 적극적인 흥미를 보여왔다.
“원양 어선은 갑자기 왜? 그거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야.”
최홍서의 심각한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던 마담 형은 주변을 슥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돈 필요해서 그래?”
생각해 보면 그때 마담 형의 눈 속에서 보인 것은 염려나 걱정 따위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드리우고 있던 낚싯줄에 드디어 입질이 왔을 때, 그 순간에 보이는 번뜩이는 희열에 가까웠다.
당시의 최홍서는 그런 낌새를 전혀 눈치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믿고 따르는 형이었다. 그 형으로 인해 결국은 호스트바에서 일을 하고 있었으면서도, 형은 내가 이곳에서 일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게끔 처음부터 아주 공들여 짜올린 판이었으니까.
최홍서는 마담 형에게 툭 터놓고 상의했다. 집에는 빚만 있다, 그런 상황에서 부모님이 이러저러한 가게를 인수하길 원하신다.
“부모님도 일하시잖아. 왜 너처럼 어린놈이 그걸 떠안으려고 해? 아버지 택시 운전하신다고 하지 않았나?”
“허리가 안 좋으셔서 지난달부터 쉬고 계세요.”
아버지는 원래도 한 직장에 진득이 붙어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1년이면 절반은 일이 없었고, 그것 때문에 어머니와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정정하시잖아.”
“가끔 단기로 알바 같은 건 하시는데 정기적으로 하시는 일은 없어서...”
친구들에게도 한 적 없었던 집안 사정까지 자세히 얘기했을 만큼 마담 형을 믿었었다. 당시의 최홍서에게는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었다. 부모보다 더.
“에휴...”
형은 공감과 동정의 표정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물론 전부 연기였지만.
“이놈아, 원양 어선 그거 처음 3~4개월은 출항 전이라 기본급밖에 못 받고, 15개월 내내 땅에 발도 못 붙이고 바다에 둥둥 떠 있다가 받는 돈이 1억이야. 그러니까 20개월 뼈 빠지게 일해서 1억 손에 넣는 거라고.”
“저 같은 놈이 큰돈 만지려면 그래도 그것밖엔 없다 싶어서요. 소개 좀 해주실 수 있으면...”
최홍서 나름대로는 며칠을 쥐어짠 아이디어였다. 세상사에 밝은 나이도 아니었고, 언젠가 마담 형이 얘기해 줬던 원양 어선밖에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저기, 홍서야...”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지, 마담 형은 최홍서를 불러놓고도 여러 번 입술만 달싹거렸다. 그러다 다른 선수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최홍서에게 바짝 붙었다.
“사실 너하고 2차 나가고 싶다고 사정사정하는 분이 계신데...”
“형.”
“알지, 알지. 너 절대 2차 안 나가는 거. 그래서 내 선에서 한 달을 커버 쳤어, 인마. 들들 볶이면서. 내가 뭐 너 2차 내보내려고 안달 난 인간이냐?”
“죄송해요. 그런 뜻이 아니라...”
마담 형은 아예 최홍서를 비어있는 방으로 데리고 갔다.
“나도 네가 돈 필요하단 얘기 안 꺼냈으면 이런 얘기까진 안 했어. 근데... 그냥 그런 손님이 아니거든. 한서 그룹 알지? 거기 아들이야. 구찌 손님도 이런 구찌 손님이 없다? 아니, 이건 구찌 정도가 아니지. 샤넬, 에르메스 급이지.”
“그런 문제가 아니라요...”
초조해 보이는 손으로 담뱃재를 턴 마담 형은 손가락 세 개를 들어 보였다.
“3천.”
“......”
“너는 절대 2차 나가는 애가 아니라고 내가 한 달을 내리 거절했더니, 아주 몸이 달았는지 3천을 부르잖냐. 내가 이 바닥 생활하면서 2차 한 번에 3천 받는 놈이 있단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
최홍서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시선을 떨어뜨렸다.
“전 괜찮은 선수 구해질 때까지만 도와드리기로 한 거잖아요. 돈이 급한 건 맞지만 그렇게까지 해야 할 정도는 아니에요.”
잠 한 번 자는데 3천만 원을 주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자체는 신기하고 놀라웠지만, 그래도 거기에 응할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도덕적인 기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저 순수하게 무서웠다. 돈을 받고 잔다는 게 무서운 일이었던 것이다.
마담 형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야 임시로 나오는 거니까. 그래서 나도 걔는 선수가 아니다, 나 도와주려고 잠깐 있는 거다... 그렇게 계속 거절했거든. 하... 근데 이 양반이 보통 끈질겨야 말이지. 재벌인데 사람도 순하고 좋아서 이런 쪽 경험도 별로 없는 것 같더라고. 늦게 배운 도둑질에 푹 빠진 모양이더라. 순진한 양반이더라고.”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개소리도 이런 개소리가 없었다. 그런 개소리를 마담 형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술술 늘어놓았다.
“여하튼, 내가 중간에서 계속 거절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그럼 아예 네가 만나서 딱 직접 거절하는 게 낫겠다. 얼굴 보고.”
“제가요??”
“솔직히 나도 중간에서 한 달을 시달렸으면 할 만큼 했잖냐.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내가 너를 빼돌린다고까지 하면서 억지를 부리시는데... 다음에 또 너랑 연결해 달라고 하면 이젠 거절할 소스도 없다. 본인한테 직접 거절을 들으면 그만 포기하겠지.”
“......”
“너 신경 쓸까 봐 나도 계속 말 안 하고 있었는데. 내가 그 손님만 상대하고 있을 수도 없고... 너무 시달리는 게 크거든.”
마담 형은 이런 말을 하는 게 미안하다는 듯이 얘기했다. 도움을 많이 받은 형에게 그 이상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네, 알겠어요. 제가 직접 거절할게요.”
“그리고.”
“......”
“돈은 내가 빌려줄게. 1억이면 되는 거야?”
“네? 아니에요, 형! 어떻게 형한테 또 신세를 져요? 괜찮아요.”
최홍서는 앉은 채로 펄쩍 뛰면서 손까지 내저었다. 하지만 형은 마음을 굳힌 듯 덤덤하게, 딱 잘라 얘기했다.
“네가 원양 어선 타는 거보다야 나아, 인마. 네가 그동안 가게 나와서 도와준 것도 있고, 그거 떠나서도 아끼는 동생인데... 네가 20개월이나 거기서 그 고생을 한다고 생각하면 형이 돼 가지고 마음이 편하겠냐?”
“......”
“가게 나와서 버는 거 아니어도 되니까 천천히 갚아. 너야 허튼 데 돈 쓰는 놈도 아니고, 여차하면 노가다 뛰어서라도 갚을 놈이라는 거 아니까 해주는 거야. 괜히 이러쿵저러쿵 말 나오니까 다른 놈들한테는 얘기하지 말고.”
“형... 감사합니다.”
목이 메었다. 감사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고개를 푹 숙인 최홍서의 눈에서 허벅지로 눈물이 떨어졌다. 돈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그렇게 아껴주는 마담 형의 마음이 최홍서를 감동시켰던 것이다.
그때 마담 형이 1억을 빌려주겠다고 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눈 딱 감고 재벌 손님과 2차를 한번 나가라고 설득하려 했다면.
그랬다면 아마 아무리 당시의 최홍서라도 형을 의심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더라도, 2차를 강권하는 형과 조금씩 멀어졌을 수도 있다.
그런데 마담 형은 돈은 내가 빌려줄 테니, 그 손님과는 그냥 네가 직접 만나서 거절을 하라고 했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훨씬 더 고차원적인 술수에 불과했다. 최홍서의 의심을 완전히 불식시키면서, 자신에 대한 신뢰와 믿음은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 사기를 당하지 않는다.
대상을 정한 사기꾼은 처음부터 상대에게 사기의 판을 늘어놓지 않는다.
우선은 호감을 주고, 좋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고, 결국에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 다른 사람은 다 나한테 사기를 쳐도 이 사람만큼은 그럴 리가 없는 사람이라는 수준의 신뢰까지 끌어내야 일급 사기꾼이었다.
사기를 당한 사람은 협박 한번 당하지 않고도, 생판 남에게 자신의 재산을 관리하도록 내주고, 돈을 빌려주고, 사업에 투자를 해준다.
마담 형이 최홍서에게 했던 모든 말, 모든 행동도 바로 그런 밑 작업이었다.
과거로 되돌아가는 상상을 수도 없이 해보았었다.
되돌아가서 바로잡고 싶은 순간이 너무 많았다.
마담 형이 말한 그 손님을 직접 만나러 가지 말았어야 했다. 마담 형에게 1억을 빌리지 말았어야 했다. 부모가 행복해 보인다는 감상적인 이유 따위는 잘라냈어야 했다. 급하게 머릿수만 채워달라는 마담 형의 부탁을 거절했어야 했다.
3월인데도 유난히 쌀쌀했던 그날, 가게에 와서 같이 놀자는 동창 놈의 제안을 딱 잘랐어야 했다.
그러나 그중 단 하나. 정말 단 하나의 순간만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 최홍서는 망설임 없이 선택할 수 있었다.
마담 형이 말한 손님. 그 손님을 만나러 가지 않을 것이다.
그 손님이 한서 그룹의 이서경 전무였고, 그 마담 형이 UB의 명 사장이었다.
■
세관을 거쳐 입국장을 빠져나오자마자 기자들과 팬들의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레이어드’를 맞이했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경호팀이 다가와 여섯 명의 멤버를 두 줄로 세우고 주변을 에워싼 뒤 인파 속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입국장에서 게이트를 완전히 빠져나가는 데에 5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공항 밖에서는 간이 사다리 위에 올라선 사람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멤버들을 따라 쏟아져 나오는 인파를 이기지 못하고 사다리가 넘어지면서 사람들이 쓰러지고, 그 때문에 ‘레이어드’는 이동을 잠시 멈춰야 했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나오세요! 다쳐요! 거리 유지해 주세요! 위험합니다!
경호팀의 고함 속에서 멤버들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고개를 숙인 채 경호팀의 안내에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안전을 위해 얼굴을 보여주거나 손을 흔들어주는 등의 팬 서비스는 절대적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그런데 게이트 바로 앞에 대기하고 있어야 할 차가 보이지 않았다.
경호팀과 매니저가 안내한 자리에는 늘 타고 다니는 익숙한 RV 차량 대신 대형 밴이 대기하고 있었다.
현장이 워낙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멤버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상태에서도 우선은 차에 올라타는 수밖에 없었다.
“뭐... 뭐야? 이 차 뭔데? 어? 사장님! 이 차 뭐예요? 우리 차예요?”
앞서 차에 오른 멤버들은 차 안에 타고 있는 명 사장을 발견하고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빨리 출발하게 일단 좀 앉아라, 이놈들아.”
운전석과 조수석을 제외한 뒷좌석에는 일곱 명이 앉을 수 있었다. 최홍서는 명 사장과 함께 그중 가장 앞줄에 앉았다.
“사장님! 이거 뭐예요? 이거 설마 우리 차예요?”
“이것들은 사장이 직접 마중을 나왔는데 인사도 하기 전에 차 얘기부터 붙잡고 늘어지네.”
“아, 진짜 뭔데요?”
“그래, 앞으로 니들이 쓸 차야. 호찌민 가 있는 동안 서프라이즈로 준비했다.”
“대박! 대박! 이거 톱 배우들이나 차는 타잖아요!”
“맞아! 윤주호 차 이거야! 나 봤어!”
“이거 타는 아이돌 국내에 우리밖에 없을걸요?”
“미친, 미친... 우리 진짜 성공했나 봐! 유엔빌리지 숙소에 벤츠 스프린터가 웬 말이야?”
“으이그 저 철딱서니 없는 새끼 저거 말하는 거 봐라. 홍서가 성공시켰지, 네가 성공했냐? 홍서한테 감사해! ‘레이어드’ 띄워보겠다고 몇 년 동안 혼자 생고생한 홍서 아니었으면 니들이 무슨 수로 이런 호사를 누려? 다 홍서 형이 해준 거다 생각하고 깨끗하게, 아껴서 타!”
하지만 이미 그들에게 명 사장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이해성이 준비해 준 게 아닐까?
최홍서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멤버들이 모두 있는 자리에서 물어볼 수는 없었다.
“홍서야, 그리고 저기 뭐냐... 요 근처에 영종도 빠져나가기 전에 너는 환승하자.”
“환승이라니요?” “거기 무슨 주상복합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계셔.”
“......”
“실은 마중 오고 싶어 하셨는데, 공항에는 기자들이며 쫙 깔렸으니까. 입주민들 차량만 들어갈 수 있는 주차장에 계시다니까, 거기서 사생들 잠깐 따돌리고 갈아타면 돼.”
이서경 전무가 기다리고 있다는 건가? 싶어서 한순간 식은땀이 쭉 배어 나왔던 최홍서는 간신히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명 사장의 태도로 봐서는 이해성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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