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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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객실에 들어서자마자 최홍서는 거의 달리다시피 자신의 침실로 직진했다. 그동안 해외 출장에서는 항상 멤버 2명에 매니저 1명씩 팀을 짜서 세 명이 일반 객실 하나를 사용했었는데, 이번엔 웬일로 침실 2개에 거실도 포함된 스위트룸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렇다 해도 스위트룸만으로는 부족해서 따로 객실을 하나 더 예약해야 했지만, 2인 1실의 쾌적한 환경에 멤버들과 매니저들도 모두 만족하고 있었다.

    침실 문을 걸어 잠근 최홍서는 문에서 멀찍이 떨어진 창가로 가서 이해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빠르게 연결되었다.

    [걱정쟁이, 또 안절부절못하고 있겠네.]

    전화를 받자마자, 그가 인사 대신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떡해요? 지금이라도 삭제할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아직 정식 발표도 안 한 폰을 제가 갖고 있으니까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막 추측하잖아요. 그래도 괜찮은 거예요? 아저씨, 회사에서 혼나는 거 아니에요?”

    [나 혼나요? 누구한테?]

    그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사람들 생각처럼 아저씨가 회사에서 무조건 맘대로 하는 게 아니라고, 지난번에 그랬잖아요.”

    [아… 음… 그것도 맞는데, 날 혼내는 사람이 없는 것도 맞긴 해요.]

    “……”

    [그리고 회사에서는 오히려 좋아하던데요? IT 인플루언서들한테 상품 제공하고 체험 후기 쓰게 하는 것보다 확실히 반응이 훨씬 즉각적이라면서. 우리 팀끼리 편하게 얘기하는 자리에선 홍서 씨를 모델로 CF를 한 편 더 제작하자는 얘기까지 나왔어요.]

    “진짜… 괜찮은 거예요?”

    [그럼요. 노출 금지였다면 내가 미리 홍서 씨한테 신경 써달라고 얘기했겠죠.]

    “그런 거면 다행인데…”

    최홍서의 목소리에서 부쩍 안도감이 느껴졌다. 그제야 창문 밖 경치도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구불구불 강이 흐르고 있었다. 사이공 강으로 흘러드는 작은 강줄기였다.

    [내가 혼날까 봐 그렇게 걱정됐어요?]

    “…..아니요.”

    [아니긴.]

    뒤늦게 침착한 척하며 걱정했다는 것을 부정해 보지만, 그는 속지 않았다. 귀엽다는 눈빛과 표정을 짓고 있을 그의 얼굴이 생생히 그려졌다. 생생히 그려지는데도 직접 보고 싶었다.

    창문 앞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높은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이제조금 여유를 가지고 그와의 대화를 즐기고 싶었다.

    “핸드폰이요. 멤버들이 엄청 부러워했어요.”

    지금 만약 시장에 내놓는다면, 돈 많은 얼리어답터들은 두 배가 넘는 가격을 주고서라도 사려고 할 거라면서. 멤버들은 호들갑을 떨었었다. 하지만 그 얘기까지는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팔지도 않을 거니까.

    [그래요? 정식으로 출시되면 멤버들한테도 선물해야겠네.]

    “안 그러셔도 돼요. 숙소만으로도 충분해요.”

    [핸드폰은 어때요? 사용하기 불편하진 않아요?]

    “제가 원래 핸드폰으로 전화, 메신저… 그런 것밖에 안 하긴 하는데, 그런 거 감안하고도 바꾸자마자 빨리 적응했어요.”

    [다행이네요. 원래 쓰던 게 손에 익었을 텐데, 내가 괜히 선물한 거아닌가 뒤늦게 고민했는데.]

    “되게 쓰기 편해요.”

    “……”

    “앞으로는… ARA 핸드폰만 쓸 거예요.”

    둘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 침묵이 간지러워서, 최홍서는 무릎 위를 괜히 손으로 문질러댔다. 무슨 말이라도 먼저 해볼까 하는 사이, 그가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진짜 귀여워 죽겠네.]

    “방금 한 말의 어디가 귀여워요?”

    [귀여워요. 화가 날 정도로.]

    “아저씨 때문이 아니라, ARA 폰이 편하니까… 그래서 쓰겠다는 건데요?”

    아저씨라는 호칭은 이제 제법 입에 붙었다. 말에는 참 묘한 힘이 깃들어 있어서, 부사장님에서 아저씨로 호칭을 바꾸었을 뿐인데 이후로 그가 한참 더 가깝게 느껴졌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더 쉬워졌고, 지금처럼 떼를 부리는 것도 더 쉬워졌다.

    둘 사이에서 ‘아저씨’는 사전적 의미와는 무관하게 특별한 애칭처럼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레이어드’의 최홍서 씨가 우리 핸드폰만 써준다니, 너무 든든하네. 인기 많은 애인 덕분에 홍보 효과 톡톡히 보겠는데요?]

    “아까는 최홍서한테 독점욕 강한 남친이 벌써 있는 것 같다면서요. 근데 지금은 또 아저씨가 최홍서 남친이에요? 세계관 오류 같은데요?”

    최홍서의 무뚝뚝한 농담에도 그는 아주 즐겁다는 듯 웃었다.

    [혹시 통화 조금만 더 할 수 있어요? 난 다음 회의까지 10분 정도 틈 있는데.]

    “네, 괜찮아요.”

    [지난번에 말했던 선물 구했거든요. 〈러브 스토리〉 오리지널 포스터. 자랑하고 싶었어.]

    “생각보다 빨리 구해졌네요.”

    [멕시코인가 브라질 옥션에서 구했다고 한 것 같은데… 아무튼 운이 좋았죠. 홍서 씨 귀국에 맞춰서 포스터도 도착할 것 같아요. 더 최근 영화인데도 오히려 〈시티 오브 엔젤〉이 구하기가 어렵네요.]

    영화 얘기를 하는 그가 즐거워 보여서, 최홍서도 핸드폰 걱정을 완전히 지우고 소리 없이 웃었다.

    처음으로 함께 영화를 본 이후, 이해성은 앞으로 함께 보는 영화들의 오리지널 포스터를 모으고 싶다고 말했었다.

    ‘앞으로 수십, 수백 편을 같이 볼 텐데 그걸 다 모을 수는 없을 거고… 할 수 있는 데까지만이라도 수집해 볼까요?”

    포스터를 모으면서 추억을 기념하자는 제안 그 자체보다, 앞으로 수십, 수백 편의 영화를 같이 볼 거라고. 당연하다는 듯 말해주는 그의 확신이 더 좋았다.

    〈러브 스토리〉이후, 그의 자동차 뒷좌석에서 〈시티 오브 엔젤〉이라는 영화를 두 번째로 같이 봤었다. 대강의 줄거리는 알았어도 자세한 스포일러를 찾아보지 않았던 터라, 최홍서는 그 영화 때문에 며칠이나 마음이 무거웠었다. 그냥 설정이 흥미로워서 고른 영화였는데…

    [홍서 씨는 뭔가 새로운 소식 없어요?]

    “매일 통화하고 메신저 하는데 새로운 식이… 있을…”

    [말이 느려지는 거 보니까 있나 보네.]

    “실은, 요즘 새로운 가사를 쓰고 있어요.”

    [그거 반가운 소식인데요? 나 홍서 씨 가사 좋아하거든요.]

    곡의 작사가, 작곡가가 누구인지까지 확인했다니. 그를 정말 명예캐스퍼로 임명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봤자 겨우 두 곡인데요, 뭐.”

    [몇 곡인지가 중요한가? 특히 ‘어른 되기’라는 곡을 좋아해서 차에서 자주 들어요.]

    “차에서요?”

    [응. 그 노래 듣고 있으면 웃음이 나거든. 긴장을 풀고 싶을 때나 불쾌할 때 들으면서 감정을 정화하는 거죠. 솔로곡이어서 한 곡 내내 홍서 씨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도 중요한 힐링 포인트고.]

    그가 캐스퍼 중 한 명 같은 말들을 할 때마다, 여전히 신기하고 재밌었다.

    [머리를 감으면서 처음으로 눈을 뜰 수 있게 됐을 때… 버스의 하차벨을 스스로 눌렀을 때… 혼자서 세탁기를 돌릴 수 있게 됐을 때… 그런 순간들에 우리는 조금씩 어른이 된 거라니. 아… 동의할 수밖에 없잖아요.]

    “아저씨는 버스도 안 타봤을 것 같고, 세탁기도 안 돌려봤을 것 같은데. 아니에요?”

    [자주 이용한 건 아니어도 버스를 타보기는 했고, 마찬가지로 여러번 만져본 건 아니지만 두세 번은 세탁기도 써봤어요.]

    최홍서는 소파 위로 다리를 끌어올렸다. 좀 더 편한 자세를 취하면서 핸드폰을 귀에 더 밀착시켰다.

    “와아… 우리 아저씨 버스도 타보셨구나! 대단하다. 칭찬해 드려야겠어요.”

    스읍. 그는 어린아이를 으르는 소리를 냈지만, 최홍서는 웃기만 했다. 하나도 무섭지 않았으니까.

    [생각해 보면 ARA 전자의 부사장이 됐을 때보다, 그런 순간들에 느꼈던 자부심과 뿌듯함이 훨씬 컸는데… 그걸 정말 오랫동안 잊고 살았어요. 마치 나는 처음부터 어른이었고, 처음부터 무거운 뭔가를 책임지는 사람이었던 것처럼.]

    “……”

    [그런 감정을 되살려주는 홍서 씨 가사가 좋아요. 잘난 척도 하지 않고, 멋있는 척도 하지 않고, 일부러 예뻐 보이려고 하지 않는 게…가사가 주인을 닮았거든.]

    “저를 좋게만 보시니까 그렇죠…”

    좋아해 주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못지않게 많았다. 동요 수준의 유치한 가사라고, 못 배운 티가 난다고, 꼴에 예술가 흉내를 내려 한다고…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는 그 말들을 떠올리자, 최홍서의 목소리가 저절로 기어들었다.

    “유치하다고 욕도 많이 들었는데.”

    [유치한 게 아니라 순수한 거예요. 내 취향을 무시하지 말아 줄래요?]

    “……”

    [사소한 것들을 순수하고 따뜻하게 바라보는 사람이구나… 난 한번 더 반했어요. 지금도 들을 때마다 다시 반하고.]

    그는 대단하다.

    수백, 수천 명이 주었던 상처를 단 한마디로 봉합할 수 있었다. 수백, 수천 명의 펄펄 끓는 악의도 그의 방어막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그가 할 수 없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지금 하고 있다는 작사 완성되면 첫 번째로 보여줄래요?]

    “……”

    [혹시 지금 고개 끄덕이고 있나?]

    “…네.”

    [그럼 됐어요.]

    대답을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그가 웃으며 말했다.

    툭, 툭, 툭.

    그는 정말 신기한 사람이었다.

    최홍서는 고개를 길게 빼고 문 쪽을 돌아보았다. 일반적인 노크 소리보다 큰, 주먹으로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최홍서, 홍서야, 인마! 문밖에서 매니저가 최홍서를 부르고 있었다.

    [밖에서 홍서 씨 찾나 봐요?]

    “네… 그런 것 같아요.”

    [또 연락해 줘요. 다치지 말고, 아프지 말고.]

    “네, 그럴게요.”

    문 쪽으로 급히 걸어가면서 통화를 끝냈다. 방문 앞에서 핸드폰을 손에 든 매니저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최홍서를 훑어보았다.

    “너 무슨 통화를 그렇게 해?”

    “메이크업 벌써 내 차례야?”

    매니저는 거실을 기웃거리는 최홍서의 가슴팍에 핸드폰을 떠넘겼다.

    “사장님이 너한테 계속 전화해도 통화 중이라고 나한테 거셨어. 받아봐.”

    “사장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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