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불안하다면, 내가 더 노력할게.”
“……”
“우리의 소중한 추억이 될 경험인데,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 버리진 말자. 응?”
그의 말이 옳은 것 같았다. 육체관계가 좀처럼 발전하지 않아서 불안한 게 아닐 것이다. 그리고 같이 자는 것으로 불안이 해소된다 하더라도 일시적일 뿐이겠지.
그가 이번에는 최홍서의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리고, 드러난 이마 위에 입을 맞추며 달콤하게 말했다.
“착하지?”
그의 가슴팍 위 티셔츠를 꽉 붙잡은 채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아주 착하게 굴고 싶었다. 그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가끔씩 해주는 착하다는 말도 좋았다.
어린아이에게나 해줄 법한 칭찬이었지만, 어린아이였을 때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부모조차도 관심을 두지 않고 방치하는 아이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어른은 없었다. 외모는 눈길을 끄는 편이었지만, 사랑받지 못한 아이는 성격에 귀염성이 없었다. 외모가 무기가 된다는 것을 깨닫기에는 늦된 아이였고, 그것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려 할 만큼 영악하지도 못했다.
다 자란 후에는, 무거운 비밀도 그 비밀에 대한 책임도, 혼자서 짊어진 채 묵묵히 여기까지 왔다. 그 누구의 앞에서도 어리광은 허락된 적이 없었다. 앓는 소리를 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그의 애정 앞에서는 달랐다. 혼자서 어떻게든 책임져야 한다는 독기가 녹아내리고, 최홍서 자신조차도 몰랐던 모습들 원하고, 질투하고, 불안해하고, 안심하는 다양한 감정들이 그 안에서 드러난다.
아주 귀한 아이를 대하는 듯한 그의 애정 앞에서만 최홍서는 ‘착한아이’일 수 있었다.
안은 팔로 어깨 끝을 둥글게 문지르면서, 그가 다른 팔을 길게 뻗어 독서등을 마저 꺼버렸다. 암막 커튼을 쳐둔 실내에는 어둠이 가득했다.
맞닿아 있는 그의 피부와 온기가 그만큼 더욱 생생했다. 지금껏 이렇게 편안한 어둠이 있었던가.
어둠 속에서 최홍서는 과감해질 수 있었다. 티셔츠 위로 그의 가슴팍을 쓸면서, 그의 호흡에 귀를 기울였다.
“저 궁금한 게 있어요.”
“네, 물어보세요.”
장난스러운 대답이 들려왔다.
“다른 분들하고 만날 때도 이랬어요?”
“어떤?”
“키스하는 데에만 몇 주씩 걸리는… 그런 거요.”
그가 피식 웃었다. 아주 작은 웃음이었는데도,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의 웃음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신기한 감각이었다.
“아니.”
그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나도 요즘 매번 나한테 놀라는 중이야.”
“……”
“나이 차이 때문인가… 홍서한테는 모든 게 다 조심스럽네.”
너는 예외라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러지 않았다고.
고작 이런 말이 이렇게 기쁜 거구나.
잠시 침묵한 그는 최홍서의 머리를 더 가까이 당기며 머리카락 위에 입을 맞췄다. 그는 정말 입맞춤에 후한 사람이었다. 얼굴에는 잘 해주지 않았지만.
“아직도 불안해?”
“아니요.”
고개만 젓지 않고 소리 내어 대답했다. 이 어둠과 이 공간 속에 그와 계속 단둘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이 순간이 편안했다. 신기하게도.
“생각해 보니까 아저씨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아까는 절대 싫다고 하셨잖아요.”
“그렇긴 한데, 뭐가 됐든 부사장님보다는 나은 것 같아서.”
그렇게까지 부사장님이라는 호칭이 싫은 거구나. 최홍서는 어둠 속에서 작게 웃었다. 그리고 얼굴의 위치를 조금 바꾸어 그의 품에 더욱 파고들었다. 에어컨이 적정 온도로 가동되고 있는 침실에서, 그의 옆구리는 깃털로 만든 둥지처럼 포근했다.
“저는 아저씨가 섹시한 것 같아요.”
“……”
“이해성 아저씨는 섹시해요. 이해성 아저씨랑은 키스도… 하고 싶고.”
“홍서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이젠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야. 아저씨라는 말이 진짜 섹시한 것 같고 그런데?”
그와 밀착한 상태로 과연 잠이 들 수 있을까 싶었지만, 머리카락을 만져주는 손길과 규칙적인 호흡, 어깨를 둥글게 쓰다듬는 온기, 향기와 체취까지… 닿아 있는 그의 모든 것이 최홍서의 긴장을 무르게 하고, 단꿈으로 이끌었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게, 녹아내리듯이 잠이 들었다.
얕은 잠 속에서, 그가 사랑한다고 속삭여주는 꿈을 꾸었다.
@
잠에서 깨었을 때, 침대에는 최홍서 혼자뿐이었다.
그는 아마 최홍서를 깨우지 않으려고 일부러 아주 조심해서 방을 나간 것 같았다.
일찍 일어나서 같이 나가려고 했는데… 최홍서는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가 없는 이 집에서 강 실장을 비롯한 고용인들의 도움과 배웅을 받으며 출근하는 건 상상만으로도 어색했다.
다행히 아직 그가 집을 나섰을 시간은 아니었다.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려고 전화를 걸어봤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거리다 조심스럽게 문을 나섰다. 아래층은 주로 공용공간이었고, 위층에 그의 개인적 공간이 모여 있으니 일단은 위층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는데, 복도를 빠져나가기 직전 어느 고용인과 마주쳐 버렸다. 다행히 그는 최홍서에게 인사를 하거나 말을 걸지 않았다. 한쪽으로 비켜서면서 묵례를 할 뿐이었다. 쭈뼛거리며 마주 인사를 하고 서둘러 지나가려던 최홍서는 생각을 바꾸었다.
“저기, 죄송하지만 부사장님 어디에 계신지 아시나요?”
“2층 드레스룸에 계세요.”
“제가 가봐도… 될까요?”
“네, 그럼요.”
“감사합니다.”
고용인과 다시 서로 공손히 맞절을 하고, 이번에는 지체 없이 위층을 향했다. 계단을 두세 개씩 뛰어올랐다.
어제 그와 함께 넥타이를 골랐던 드레스룸은 2층의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침실과도 연결되어 있었고, 복도에서 중문을 한번 통과해 들어갈 수도 있었다.
중문을 두어 번 두드리면서 최홍서는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다. “부사… 아저씨.”
조용히 그를 불러보았다. 드레스룸과 중문 사이의 작은 공간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귀를 기울여보니 더 안쪽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최홍서는 조용히 중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드레스룸으로 연결된 문이 열려 있었고, 내부에서부터 빛과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앞으로 홍서는 실장님이 직접 케어해 주세요.”
분명 그의 목소리였다.
최홍서는 저도 모르게 순간 걸음을 멈췄다. 그가 혼자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강 실장과 함께 있는 것 같았다.
그냥 돌아갈까…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열린 문 앞에서 망설이는 사이, 대화는 계속되었다.
“집에 고용인이 있는 분위기를 불편해하는 것 같으니까 너무 정중하게 대하지 마시고… 편하게 대해주세요. 농담도 좀 해주시구요.”
“어제도 나름대로 농담을 했습니다만. 재미없다고 느끼셨을까요?”
“글쎄요. 재미있는 분이라는 인상을 주진 못한 것 같던데요. 강 실장의 농담을 이해하는 건 나 정도 아닙니까?”
그와 대화하는 강 실장은 최홍서가 지금까지 느꼈던 강 실장과는 조금 달랐다. 무뚝뚝하고 얼핏 무서워 보이기까지 한 얼굴로 웃음기 없이 농담을 하는 분이라는 걸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용기를 내서 안으로 들어가 볼까. 문고리에 손을 댄 순간, 그가 조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홍서가 여기를 편하게 드나들었으면 합니다.”
“……”
“내 집을 좋아했으면 해요.”
“지금은 여기 오는 걸 좀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쓰이네요.” “네, 알겠습니다. 앞으로 더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할게요.”
“부사장님, 혹시 제가 실수하지 않을까 싶어서 확인차 여쭤보겠습니다.”
강 실장은 질문하기를 어려워하지 않았다. 실무의 효율을 위한 정보를 담담하게 요청하는 어조였다.
“홍서 군은 앞으로 제가 어떤 분으로 알고 모시면 될까요?”
직접 질문한 강 실장도 차분하기만 한데, 문밖의 최홍서가 오히려 긴장하고 있었다. 그저 붙잡고만 있던 문고리를 쥔 손에 땀이 배어났다.
이해성은 최홍서가 마음의 준비를 할 틈조차 주지 않고 즉답했다. 답변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는 듯이.
“이 집의 VVIP죠.”
“알겠습니다.”
‘이 집의 VVIP’. 그게 어떤 의미인지 두 사람 사이에 분명한 정의가 있는 것 같았다. 강 비서는 두 번 묻지 않았다.
최홍서는 조용히 돌아서서 드레스룸을 빠져나왔다. 이번에는 전혀 서두르지 않고, 계단을 두세 개씩 건너뛰지도 않고, 천천히 복도와 계단과 거실을 지나 손님방으로 돌아가 다시 침대에 누웠다.
자신의 집에서, 내가 충분히 자고 일어나 마음 편히 준비하고 출근하는 것. 그게 그가 바라는 것이니까.
그의 향기가 미약하게 배어있는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마음속으로 되뇌어보았다.
내가 그의 VVIP.
그 한마디가, 지금 이 순간에는, 지나간 모든 과거의 보상처럼 느껴졌다. 모로 누운 눈가에서 뜨거운 눈물 한줄기가 베개를 향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