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 (46/185)

46.

“부사장님.”

“네.”

“저 그쪽으로 가도 돼요?”

“……”

예상대로 침묵이 먼저였다.

독서등의 그림자 속에서 그가 눈을 떴고, 목울대가 위아래로 크게움직이며 마른침을 삼키는 것이 보였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기름칠이필요한 로봇처럼 뻣뻣하게 고개를 돌려 최홍서를 보았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어디, 뭐 불편해요?”

“아니요. 잠이 안 와서요.”

그가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긴 두 다리를 침대 아래로 뻗어 슬리퍼를 찾아 신으면서, 그는 횡설수설했다.

“그래요? 큰일이네. 잠이 안 올 때 준비해 주는 차가 있는데…”

무슨 말인지 다 알면서.

당장이라도 방을 달려 나갈 것처럼 문 쪽으로 걸어가는 그의 모습을 원망스레 지켜보던 최홍서는 이불을 턱 바로 아래까지 끌어올렸다.

“제가 그쪽에 가는 게 불편하시면 그냥 여기 있을게요.”

“……”

흠… 그가 멈춰 서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방 밖으로 나가는 대신 최홍서의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커다란 손이 다가와 누워있는최홍서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흩트렸다.

“불편할 리가 없잖아요.”

다시 차분해진 평소의 목소리였다. 부드러운 저음 위에 약간 긁힌듯한 허스키함이 가미된 그의 목소리를 좋아했다. 어떤 때는 섹시하고,어떤 때는 감미로운…

최홍서는 누운 채로 눈만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려다보는시선도 이제는 최홍서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뺨을 커다랗게 감쌌다. 최홍서는 고개를 움직여 그 따뜻한 손바닥에 볼을 비볐다. 그가 아주 작은 소리로 웃었다.

“착하다, 우리 홍서.”

다음 순간에는 그의 눈높이가 갑자기 낮아졌다. 몸을 굽혀 앉은 그는 침대 가장자리에 팔을 걸쳤다. 그리고 모로 누운 최홍서의 머리카락과 뺨을 부드럽게 만져주었다.

“악플들.”

“……”

“고소할까요?”

“.……..네?”

“오늘, 갑자기 보고 싶다고 했던 거. 악플들 때문에 힘들어져서 그랬던 거 아니에요?”

“아…”

최홍서가 사람들의 비난이나 악플에 많이 신경 쓰고 힘들어하는 편이다. ― 그 자체는 나름대로 알려진 얘기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가 눈치채지 못했다고 생각했었다. 오늘 같이 있는 동안 한 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고, 최홍서 역시 그 일을, 그 일로 인한 감정을 그에게 털어놓을 생각은 전혀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그는 어떻게 알았을까.

예상치 못한 순간의 위로는 예상치 못한 공격만큼이나 강력했다. 미처 감정을 수습할 겨를도 주지 않았다. 최홍서는 치받쳐 올라오는 어떤 뜨거운 덩어리를 삼키기 위해 상체를 일으켜 앉아야 했다.

이해성도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몇몇은 심하게 악질적이던데. 그동안의 댓글 내역만 간단히 조회해 봐도 상습적이라서 충분히 고소 가능해요. 명 사장에게 얘기해 볼까요? UB에서 안 하겠다면 홍서 씨 개인이 고소하는 형식으로도 괜찮아요. 다 알아서 준비하게 할 테니까, 홍서 씨는 아무것도 신경 안 쓰…”

“괜찮아요.”

최홍서는 침대 위를 짚은 그의 팔을 잡았다. 오늘 밤 내내 최홍서 앞에서 모른 척해 주었던 이해성인데, 그의 목소리에서는 꾹꾹 누른 노기가 느껴졌다. 그 댓글들에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전부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분노해 준다는 사실이 이미 너무나 깊은 위로였다.

두 손으로 그의 팔을 꽉 잡고, 넓은 어깨 끝에 이마를 묻었다.

“괜찮아졌어요, 정말.”

그가 다른 손으로 최홍서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입술이 정수리 위를 꾹 눌렀다. 최홍서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어깨 끝에 턱 끝이 스칠 만큼 가까웠다. 조금 전까지 최홍서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고 있던 그의 입술이 불과 몇 센티미터 앞이었다.

서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시작은 최홍서가 먼저였다.

그의 턱에 입술을 가만히 대었다가 떼어냈다. 그는 여전히 최홍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리뜬 눈꺼풀 아래의 갈색 눈동자가 예뻤다. 조금 더 위로 올라가 그의 아랫입술 바로 아래에 입술을 꾹 눌렀다. 가슴이 아플 만큼 세차게 뛰고 있었다. 그의 숨결이 이만큼 가까웠던 적은 없었다.

이번에는 그대로 정지해 있었던 이해성이 움직였다.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이해성의 아랫입술과 최홍서의 윗입술이 서로 닿았다.

서너 번에 걸쳐 천천히 위치를 바꿔가면서, 서로의 입술을 애타게 찾았다. 마침내 온전히 맞닿아 서로를 머금었을 때는 안도와 감탄, 떨림이 뒤섞여 한숨이 가늘게 새어 나왔다.

둘 모두 입술이 바싹 말라 있었다. 그 마른 입술을 서로의 입술 위에 지그시 누르고, 아주 느릿하게 그 부피와 온도와 향긋함을 음미했다.

“나 괴롭히려고 작정했구나?”

꽉 잠긴 목소리로, 그가 작게 속삭였다. 말만 그렇지 다정하기만 한 목소리였다.

“저, 갓 스무 살… 그런 나이 아니에요.”

“네, 알아요.”

“부사장님보다는 많이 어려도, 스물일곱 살이에요.”

“그거 그대로 순서만 바꿔서 말해도 될까? 홍서 씨가 스물일곱 살이어도, 나보다 열두 살이 어려요. 그래서 난 생각이 많아.”

“불안해요.”

“……”

불안하다는 발언에 그는 거의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아니, 겁을 먹은 얼굴이라고 해야 할까?

어디가 많이 아프다는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최홍서의 양 볼을 감싼 그는 놀란 눈으로 손안의 얼굴을 깊숙이, 꼼꼼하게 들여다보았다.

“왜 그래, 뭐가 불안한데.”

“모르겠어요.”

“불안하다느니… 이런 말을 남에게 하는 성격이 아닌데. 부사장님이랑 있으면 제가 이상해져요.”

눈을 피하려 하는 최홍서의 시선을 끈질기게 따라가면서, 이해성은 자신과 눈을 맞추게 했다.

“불안한 거, 힘든 거, 속상한 거. 나한텐 다 보이고 다 말해도 돼. 내가 뭔가 홍서를 불안하게 했을까?”

최홍서는 자신의 얼굴을 감싼 그의 팔을 힘주어 붙잡았다. 떼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매달리듯이.

그리고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부사장님은 아무 잘못도 없어요. 제가 아마… 이런 관계는 처음이어서 그런가 봐요.”

그의 엄지가 광대 위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한순간 휘청거렸던 두 사람의 감정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같이 누워서 잘까?”

그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슈퍼싱글 사이즈의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그는 최홍서의 어깨를 감싸 자신의 가슴 쪽으로 꽉 끌어당겼다. 머리카락 위에 입술을 묻어 몇 번이나 키스했다. 놀란 어린아이를 진정시키듯이.

“이렇게 같이 있어도 불안해?”

“.……..”

최홍서는 대답 대신 눈앞에 있는 그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그곳에서는 그리운 향기가 풍겼다. 샤워젤이나 바디로션의 냄새가 아니었다. 그 사이로 풍기는 그의, 이해성의 체취를 분명히 맡을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애틋한 기억을 연상시키는 그런 향기였다. 가슴이 꽉 멜만큼 그리운 향기.

마른 입술을 그의 목에 비비는 최홍서는 젖줄을 찾는 아이 같았다. 그의 가슴팍 위에 올리고 있던 최홍서의 손이 저도 모르게 티셔츠를 꽉움켰다.

“이제 자야죠. 나 얼마 못 자고 출근하는 거 싫다며. 홍서 씨도 그렇게 늦게까지 잘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응?”

매달려오는 최홍서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이해성은 부드럽게 달래었다.

“제가 이러면 싫으세요?”

이마에 닿아오는 그의 가벼운 한숨.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단 것.“싫을 것 같아?”

“홍서 씨.”

“……”

“최홍서 씨.”

“……”

“우리 홍서, 착하지.”

“지금만 잠깐 안 착하면 안 돼요?”

차마 얼굴을 보고 말할 용기는 없어서, 눈앞에 보이는 그의 가슴팍에 시선을 고정한 채 중얼거렸다.

“난 나중에라도 네가… 나에게 이용됐다고 느낄까 봐 무서워.”

“……”

이번엔 최홍서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벌떡 몸을 뒤집어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절대 그런 생각 안 해요! 절대!”

꼭 믿어달라고, 자신의 진심을 간절히 호소하듯이 최홍서는 침대위 시트를 꽉 쥐었다.

누운 채로 눈꺼풀을 내리뜨고 최홍서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해성이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시트를 쥔 최홍서의 손을 감쌌다.

“내 마음을 증명하는 게 이런 방법밖에 없진 않겠지만, 널 소중히하고 있다는 걸 충분히 전달하고 나서, 같이 자는 건 그 후에 하고 싶어.”

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시트를 틀어쥔 손에서 그는 힘을 풀어냈다. 부드럽게 열린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을 얽었다. 그의 손길은 내면을 병들게 하는 오랜 독기를 빼내는 치료 같았다.

“불안해하지 마. 이렇게 너에게 집중하고 있는데…”

“……”

“너한테서 불안하다는 말을 들으면, 내 마음이 어떤지 알아?” 최홍서는 무릎걸음으로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두 손으로 이해성의 뺨을 감쌌다. 그가 늘 해주는 것처럼. 그의 표정이 너무 아파 보여서, 망설이거나 부끄러워할 틈이 없었다.

“죄송해요. 다시는 그런 말 안 할게요.”

VVIP의 얼굴을 감싸다니.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바로 몇 시간 전까지도 그에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이미 그에게서 뭔가를 하나하나 배우고 있었다. 표현하고, 전달하고, 그리고 사랑하는 방법을…

“이리 와. 사과 들으려고 그런 게 아니라, 속상해서 한 말이야. 네가 왜 미안해.”

품을 열어 팔을 벌려주는 그에게로, 최홍서는 뛰어들듯이 그의 곁으로 돌아갔다. 같은 베개를 베고 잠자리에 나란히 누웠다. 그의 팔이 다시 안아주었고, 그의 입술이 다시 머리카락 위에 입을 맞춰주었다.

“불안하다면, 내가 더 노력할게.”

“……”

“우리의 소중한 추억이 될 경험인데,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 버리진 말자.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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