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내일 스케줄 장소로 바로 데려다주라고 할 테니까.”
“새벽에 나가셔야 하잖아요. 괜히… 저 신경 쓰이실 거 같은데.”
침착하게 말해보지만 목소리가 미세하게 격양되어 있었다.
“난 알아서 준비하고 출근할 테니까 홍서 씨는 푹 자고 천천히 나가면 돼요.”
그와의 잠자리를 생각해 본 적 없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그런데 정식으로 사귀는 사람과의 잠자리는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상상은 매번 같은 장면에서 끝이 났다. 아직 옷도 벗지 못한 채 침대 위에서, 그의 아래에 누워 그와 마주 보는 장면.
오늘 자고 가라는 권유를 받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어도, 그와의 잠자리를 피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원했다.
하지만 그는 최홍서가 빨리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를 오해한 것 같았다. 잠자리를 갖기엔 너무 이르다는 생각으로 망설이는 거라고, 그렇게 판단한 듯했다.
“손님방도 있으니까.”
그 말에는 따로 자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네가 오늘 이 집에서 자고 가더라도, 우리는 잠자리를 갖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는 안심해도 된다. 그런 의미.
“이 시간까지 같이 있고 나니까 보내기가 싫어졌어.”
깍지 낀 최홍서의 손을 입술 위에 꾹 누른 그가 달콤한 한숨과 함께, 조르듯이, 간청하듯이 물었다.
“안 될까?”
같이 자자는 의미가 아니더라도, 헤어지고 싶지 않은 건 최홍서도같은 마음이었다. 그의 입술에 거의 닿아 있는 자신의 손등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떨어뜨리며 대답했다.
“매니저 형한테 연락할게요.”
“……”
“오늘 외박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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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성의 침실은 카메라를 모아둔 방과 영화 감상실이 있는 위층이었고, 손님방은 아래층이었다. 그는 손님방까지 따라와 직접 최홍서의 잠자리를 봐주었다. 따로 챙길 것이 별로 없는데도 그는 작은 것 하나까지 자기 손으로 해주고 싶어 했다.
서랍에서 충전기를 꺼내 핸드폰을 연결해 주고, 호텔 객실처럼 반듯하게 각이 잡혀 매트 아래에 정돈되어 있는 시트를 꺼내주고, 베개를 돋워주었다. 그리고 최홍서가 입을 잠옷도 직접 내주었다. 푸른색 계열 스트라이프의 심플한 파자마 세트였다.
“손님용 파자마도 따로 있긴 한데, 홍서 씨한테는 그거 입히기 싫어서요. 이거, 내 건데 입어 줄래요?”
“감사합니다.”
매장에 진열된 제품처럼 예쁘게 개켜진 파자마는 가볍고 부드러웠다.
“그럼, 이제 씻고 쉬어요. 욕실도 저쪽에, 방에 딸려 있으니까 거기서 씻으면 되고… 타월이나 새 칫솔도 전부 욕실 서랍에 있고… 또 뭐 필요한 게 없을까?”
뒷목을 쓸면서 방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그가 툭, 팔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몸을 돌려 최홍서와 마주 섰다.
“아… 근데 홍서 씨를 손님방에서 재우려니까 영 마음이 안 좋다. 홍서 씨가 내 방에서 잘래요? 내가 여기서 잘 테니까.”
“아니에요, 여기도 충분히 좋은데요? 호텔 같아요.”
“그게 아니라, 손님이 아니고 내 연인인데… 이 방에서 재우는 게 마음에 걸려서 그러죠.”
그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바라보면서 최홍서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따뜻한 손이 귓바퀴에 스칠 때마다 파자마를 쥔 최홍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래로 내려간 그의 손이 뒷목을 받치고, 손끝을 움직여 피부 위를 살살 긁었다.
“나도 여기서 같이 자면 안 되나?”
“네?”
“같은 방이긴 해도 여긴 트윈이니까. 옆 침대에서.”
“아…”
“남자들끼리 비즈니스 출장 가서도 트윈 베드가 있는 방에서 같이 묵고 그러잖아요.”
그는 거리를 두고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침대를 가리키면서 열심히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최홍서에게는 불필요한 설명이었다.
오히려 이젠 정식으로 남자 친구가 되었는데, 한 방에서 같이 자기 위해 그런 변명이 필요한가 싶었다.
“전 아무 상관 없어요. 부사장님만 괜찮으시면 여기서 주무세요.”
뒷목을 감싸고 있던 그의 손이 한순간 움찔했고, 그다음에는 그의 엄지가 거꾸로 거슬러 오르듯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최홍서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럼, 옆 침대에 신세 좀 질게요.”
“………”
“나도 샤워하고 올 테니까 편히 있어요.”
깊은 밤이 되었기 때문일까.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약간 잠긴 것처럼 들렸다.
샤워하는 내내 최홍서는 정신이 없었다.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멍했다. 샤워부스의 유리문에 팔꿈치를 부딪쳤고, 칫솔을 두 번이나 떨어뜨렸다. 양 조절에 실패해, 덜어서 사용하는 고급 샴푸를 너무 많이 짜버리기도 했다.
샤워하고 오겠다는 그의 말이 말 그대로일 뿐, 어떠한 의미도 함축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아는데… 그런데도 평소보다 신경 써서 꼼꼼히 몸을 닦고 있었다. 그 탓에 샤워 시간이 여느 때의 배로 길어졌다.
욕실에 딸린 파우더룸에서 머리카락까지 말리고 나왔을 때는, 그가 먼저 방에 돌아와 있었다.
등을 보이고 침대에 앉아있던 그가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다.
“……”
“……”
그는 긴 파자마 팬츠를 입고 상의로는 무늬 없는 검은색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머리를 감은 뒤라, 평소처럼 스타일링 되어 있지 않은 머리카락이 차분하게 아래로 내려와 이마를 가렸다.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이해성과도 다른, 가장 사적인 모습의 그를 보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떨렸다.
그 역시도 아마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떨리는 시선이 욕실에서 나온 최홍서의 모습을 구석구석 천천히 눈에 담았다.
“아, 그… 내 옷이라서… 좀 크네요.”
너무 오래 침묵한 채 빤히 바라보고 있었음을 의식한 이해성은 시선을 피하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보고 있던 태블릿을 내려놓고는 서둘러 최홍서에게 다가왔다.
키 차이도 키 차이인 데다가, 체격 차까지 있다 보니 그의 옷은 최홍서에게 넉넉할 수밖에 없었다. 바짓단이 실내용 슬리퍼 위를 거의 덮었고, 소매 끝으로는 손톱이 겨우 보였다. 품이 큰 탓에, 칼라가 유난히 깊이 파인 것처럼 보였다.
무대에서 예뻐 보이는 체형을 유지하기 위해 항상 음식의 양에 신경 쓰고 있었다. 원래도 마른 편이긴 했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아이돌 생활을 시작한 뒤로는 그 좋아하던 과자를 원 없이 먹어본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최홍서는 댄스 연습과 운동으로 다져졌음에도 굉장히 마른 몸을 가지고 있었다.
“손님용을 줄 걸 그랬나…”
그는 유난히 당황한 모습이었다. 파자마의 소매를 접어주는 동안에도 한 번도 최홍서의 눈을 보지 못했다.
가까이 다가온 그에게서는 좋은 향기가 풍겼다.
향수를 뿌린 날도 그렇지 않은 날도, 그에게서는 늘 좋은 향기가 났지만, 샤워한 직후의 향기는 그것과는 또 달랐다. 치장을 하기 위한 향기가 아닌, 무방비하고 청결한 향기에 문득 최홍서는 그를 끌어안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성적으로서가 아니라, 그저 순수한 포옹의 의미로, 그와 가까이 있고 싶다는 생각에서 느낀 충동이었다.
그를 껴안는 대신 파자마 상의의 가슴쯤을 끌어올려 입술과 코를 묻었다. 그의 체취가 아니어도, 그가 입고 자는 옷이었다. 섬유에서 풍기는 연한 향기가 마음에 들었다.
“입고 자는 옷이니까, 좀 커도 괜찮아요.”
“아… 응, 그래요. 그럼 다행이고.”
파자마의 향기를 맡는 최홍서를 내려다보던 그는 막상 눈이 마주치자 또 시선을 피했다. 평소의 이해성과는 뭔가 달랐다.
혹시 그도 의식해 주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다른 침대를 사용한다고 해도 같은 방에서 자게 되었다. 긴장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벌써 2시네. 내일 9시에 나가야 한다고 했죠? 그만 잘까요?”
협탁 위 시계를 쳐다본 그는 아직 드라이어의 따뜻한 열이 남아있는 최홍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과장된 어투와 행동은 늘 여유가 있는 그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그는 분명 당황하고 있었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최홍서에게는 마냥 낯설고 신기한 모습이었다. 그가 이끄는 대로 침대에 올라가 앉으면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결국 시선을 눈치챈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렇게 봐요?”
“그냥요. 그런 차림 하신 모습은 처음 봐서요. 훨씬 어려 보이세요.”
“그래요?”
평소라면 더 장난을 치면서 대화를 이어갔을 텐데, 그는 자신의 옷차림을 한번 내려다보며 쑥스러운 듯이 뒷머리를 쓸었을 뿐이었다.
침대 머리맡의 작은 독서등에 불을 밝혀준 그는 문 옆으로 가서 방 전체의 조명을 껐다. 다시 최홍서 곁으로 돌아와 베개에 기대앉아있는 최홍서의 양 볼을 감쌌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가까이 다가왔다.
최홍서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고 멈췄다.
“잘 자요.”
“……”
분명 굿나잇 키스였다. 굿나잇 키스가 맞는데…
하다못해 이마도 아닌 머리카락 위에 키스해 주는 그를 보고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그는 오늘 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생각이라는 것을. 아무리 기다려도 그가 자기의 침대로 올라오는 일은 없으리라는 것을.
모로 누운 최홍서는 저쪽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을 덮고 눕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남자와의 연애가 처음이 아니었다. 남자와의 잠자리 경험도 분명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자기에게 손을 대지 않는 이유가 ‘소중히 여기기 위해서’라면, 그건 납득할 수가 없었다.
천장을 보고 누운 그는 두 손을 깍지 껴 머리 뒤에 받쳤다. 당장 잠이 들 것 같은 사람의 자세가 아니었다. 희미한 빛 속에서도 뚜렷하게 눈에 들어오는 잘생긴 옆모습을 바라보던 최홍서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부사장님.”
“네.”
“저 그쪽으로 가도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