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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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그의 드레스룸은 백화점 명품관의 남성복 매장 같았다.

슈트와 캐주얼이 서로 다른 공간에 보관되어 있을 정도로 옷의 양부터 굉장했다. 그는 ARA의 얼굴 같은 존재라 언론 노출 시에 이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탓이었다.

어림잡아 2~300개는 되어 보이는 넥타이들은 일일이 꺼내 보지 않아도 한눈에 훑어볼 수 있도록, 전용 걸이에 질서정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심지어 스트라이프 무늬의 넥타이만 따로 모아놓은 섹션의 양이 그 정도였다.

“보통은 옷을 그렇게까지 까다롭게 고르진 않는데, 중요한 일정이 있을 때는 스타일리스트가 골라주는 대로 입긴 해요. 저기 걸어둔 게내일 입을 슈트.”

그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긴 곳에는 회색 슈트가 한 벌 걸려있었다.

“근데 그런 일정이 있으면 넥타이만큼은 꼭 스스로 선택하거든요. 사선 스트라이프 중에서.”

줄지어 늘어선 넥타이 위를 손끝으로 쓸어보면서 그가 이어 말했다. 카메라를 모으는 취미처럼, 이것 역시 위키백과에는 나오지 않는 정보였다.

“홍서 씨는 무대에 오르기 전에 손가락으로 숫자 세는 버릇이 있잖아요.”

“어? 그거… 어떻게 아셨어요?”

“이 정도에 뭘 놀라요. 초보 ‘캐스퍼’들도 다 아는 사실인데.” “캐스퍼요?”

캐스퍼라니. 의외의 발언에 최홍서는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캐스퍼’는 ‘레이어드’의 팬덤명이었다. 〈꼬마 유령 캐스퍼〉의 캐릭터에서 따온 것으로, 최홍서가 직접 고심해서 붙인 이름이었다. ‘레이어드’의 반투명한 흰색 응원봉에 푸른색 불이 켜진 모습이 캐스터와 닮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좋아하고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착한 심성의 귀여운 꼬마 유령. 캐스퍼의 내면까지도 최홍서가 생각하는 팬들과 닮아있었다.

“나도 이 정도면 캐스퍼 자격이 있죠. 이제 홍서 씨 활동 이력에 대해 거의 모르는 게 없는데.”

“그래도 부사장님이 캐스퍼라고 하시니까 너무 안 어울려요.”

“당근 시장에서 응원봉도 구해볼까 하는 중인데.”

중고 거래 앱에서 ‘레이어드’의 응원봉을 구입하는 이해성이라니. 최홍서는 폭소하지 않기 위해 어깨까지 들썩거려야 했다.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농담을 이어가고 있었던 이해성은 최홍서의 웃음에 따라 웃었다.

“여하튼 홍서 씨가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는 버릇이 있는 것처럼, 난 중요한 일정에는 꼭 사선 줄무늬의 넥타이를 매거든요.”

“……”

“종교도 없고 미신도 믿지 않는 사람이라 별다른 징크스나 루틴이 없는데. 이상하게 이것만큼은 계속 지키고 있어요.”

순간적으로 그의 눈빛이 물러졌다. 아련한 옛 기억을 더듬기라도 하는 듯이.

“아버지가 처음으로 경영인으로서의 자질을 칭찬해 주셨을 때, 그때 사선 줄무늬의 넥타이를 하고 있었어요. 아마 그래서 시작됐을 거예요.”

이해성은 수많은 넥타이 중 하나를 골라 손에 쥐었다.

“가끔 너무 두렵고 막막하거든요. 이 결정이 정말 내가 예상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지. 잘하고 있는 게 맞는 건지, 나 자신이 의심스러워져요.”

“……”

“이 넥타이가 행운을 가져다줄 거라고 믿으면서 심리적으로 안정을 갖고 싶은 거죠.”

거기까지 얘기한 이해성은 분위기를 바꾸어 최홍서를 쳐다보았다. 잠시 어두운 빛을 띠었던 그의 얼굴은 다시금 평소처럼 부드러웠다.

“이거랑… 그리고 이거. 둘 중에 홍서 씨는 뭐가 더 좋아요?”

두 개의 넥타이를 손에 쥐고 자신의 턱 아래 번갈아 대보면서, 이해성이 물었다.

“저 패션 센스 별로 없는데.”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홍서 씨가 골라준 거라는 게 중요한 거니까. 그럼 평소보다 더 자신감이 생길 것 같거든.”

“그럼… 이쪽이요.”

최홍서가 고른 것은 네이비색 바탕에 붉은색 줄무늬가 들어간 타이였다. 이해성은 즉시 다른 넥타이를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그리고 걸어놓은 슈트 앞으로 가서 최홍서가 고른 타이를 셔츠의 칼라 아래 겹쳐 보았다.

“내 남자 친구가 패션 센스가 좋네. 앞으로 홍서 씨가 골라주는 타이만 해야겠는데요?”

사소한 일을 과장되게 칭찬하면서, 그는 최홍서를 돌아보고 웃었다. 최홍서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한 걸음 뒤에서 용기를 내어 말했다.

“저한테 부사장님은… 뭐든지… 세상을 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 같아요.”

그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든, 원하시는 대로 잘 풀릴 거예요.”

처음 만났던 강 감독의 응접실 상석에서, 뉴스 기사 속에서, 그리고 파티의 개회식에서… 어떤 순간에도 최홍서의 눈에 이해성은 세상의 주인처럼 보였었다.

배운 것도 없고, 그리 똑똑하지 않아서, 이렇게밖에 얘기할 수 없는게 부끄럽고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말해주고 싶었다. 자신의 눈에 그가 얼마나 눈부신 사람인지. 단지, ARA 그룹의 오너가 될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 위치 때문이 아니라, 그런 위치에 걸맞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눈부시다는 것을.

내가 아는 한, VVIP라는 이름의 품격에 어울리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셔츠의 어깨 위에 넥타이를 걸쳐놓은 이해성이 최홍서의 양 뺨을 감쌌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최홍서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볍게 맞대었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도 있다는 거, 이제 알잖아요.”

이마를, 눈가를, 코끝을… 그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저 말씀 하시는 거예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두 손에 얼굴이 가두어진 채로 최홍서는 시선을 피하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저도 결국은 부사장님 마음대로 된 건 줄 알았는데.”

“남자 친구가 됐다고, 내가 바라는 게 다 이루어진 건 줄 알았어요? 날 너무 성인군자처럼 생각한다.”

“……”

“얘기했었잖아요. 아주 탐욕스럽다고.”

뺨을 문지르던 엄지가 아래로 내려가 이번에는 입술 주변을 부드럽게 살살 어루만졌다. 그의 손끝이 지나갔던 자리마다 그곳에 입을 맞추고 싶다는 의미라는 걸 알 것 같았다. 최홍서는 그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그는 신기한 사람이었다.

이젠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될 텐데.

“근데… 이제 사귀는 사이인데, 계속 부사장님이라고 부를 거예요?”

입 맞추지는 않고, 입가를 쓸어주기만 하던 손이 아쉽게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는 드레스룸 한쪽의 소파에 앉기를 권했다. 테이블에는 간단한 음료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럼 뭐라고 해요?”

“글쎄, 뭐가 좋을까?”

탄산수를 오픈해 최홍서의 잔에 따라주면서, 그는 즐거워 보였다. 그리고 좋은 생각이라도 떠올랐다는 듯 눈을 빛내며 제안했다.

“거리감도 좁힐 겸 형은 어때요? 해성이 형.”

“그래도 부사장님한테 어떻게 그래요.”

“엄밀히 말하면 난 홍서 씨 부사장님도 아니잖아요. 남자 친구를 직함으로 부르는 건 너무 낭만 없지 않나?”

그와 연인 관계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아직 실감은 나지 않았다. 틈날 때마다 메시지를 주고받고, 서로의 하루를 보고하고, 짧게라도 시간을 함께하려 노력하고, 이렇게 그의 집을 드나들면서 데이트를 하지만… 가끔은 그저 자신을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동생처럼 예뻐해 주고 귀여워해 주는 게 아닌가 싶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손을 잡고, 가끔은 조심스럽게 안아줄 때도 있었지만, 그 이상은 없었다.

육체관계를 서두르지 않으려는 그의 뜻을 이해하면서도, 연인이라는 실감을 좀 더 필요로 하기도 했다. 스킨십의 진도가 관계의 발전을말해주는 것은 아니라지만, 우리가 정말 연인이라는 실감을 흐릿하게만들기는 했다.

그가 따라준 탄산수를 한 모금 마신 최홍서는 테이블에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럼, 아저씨?”

“……”

그는 짐짓 화난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아주 엄숙하게. 그래서 오히려 웃음이 났다.

“그건 너무 하나도 안 섹시하잖아요. 대체 누가 아저씨랑 키스하고싶겠어요. 기각.”

그의 입술에서 나온 키스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전신에 퍼부어지는입맞춤 같았다. 적어도 그가 자신과의 키스…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짜릿했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해보지만, 그의 얼굴을 쳐다볼 수는 없었다.

“부사장님이 먼저 아저씨라고 하셨었잖아요. 그동안 몇 번이나.”

“음, 그러네… 내가 내 무덤을 팠었네.”

그가 낮게 목을 울리며 웃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서 컵을 헐겁게쥐고 있었던 최홍서의 손을 가만히 뒤덮었다. 손가락이 부드럽게 파고들어 최홍서의 손을 컵에서 자연스레 떼어놓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로파고들며 깍지를 끼는 감촉은 애무처럼 간지러웠다.

“오늘, 자고 가지 않을래요?”

“……”

예상치 못한 제안에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이번에는 떨림을 감출수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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