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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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데이트할 때 보통 영화를 많이 보지 않아요? 여기 오면 다들 좋아할 것 같은데.”

“음… 거의 외국인들과 만났었거든요. 같이 영화를 보더라도 이 집에 초대해서 여기서 같이 영화를 볼 기회는 별로 없어서…”

“아…”

반소매 아래로 팔을 쓰다듬으면서 최홍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구나. 거의 외국인들과 사귀셨구나. 하긴, 그게 더 안전하겠지.

지난번 파티에서 보았던 남자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외국인이고,그리고 이해성과 비슷한 환경에서 살아왔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던남자. 이해성은 지금까지 매번 그 남자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왔을까? 만약 그렇다면 왜 이번에는 외국인도 아니고, 살아온 환경도 전혀다른 나를 선택했을까?

많은 궁금증이 솟아났다. 하지만 말로 꺼내기는 힘든 질문들이었다.

“앉아요.”

이해성이 스크린 앞의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소파는 폭이 깊고등받이가 높고 푹신했지만, 혼자 혹은 두 명이서 영화를 즐기기에 알맞은 길이였다. 여러 사람을 초대하기 위해 꾸민 공간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근데 어떻게 그 영화를 골랐어요? 굉장히 옛날 영화인데.”

“클래식이잖아요. 계속 한 번쯤은 보고 싶었어요.”

“……”

“그리고 제목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마른침을 삼키며 뜸을 들였다. 용기를내려고 해도 이런 말을 하기는 아직 쉽지 않았다.

곁에 선 채로 OTT 플랫폼을 프로젝터에 연결하고 있던 이해성이최홍서를 내려다보았다. 잘생긴 눈썹이 위로 삐죽 올라가면서,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제목이 〈러브 스토리〉라서 나랑 보고 싶었다고?”

“네.”

먼저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가 물어보면 대답만큼은 잘하고 싶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자, 그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그러다 문득 뭔가가 생각났는지 표정을 바꾸어 미간을 좁혔다. 손에 쥔 리모컨으로 스크린을 가리키면서 그가 확인하듯 물었다.

“근데 이거, 엔딩은 알죠?”

“네, 알긴 알아요.”

잠시 입술을 꾹 다물었던 그는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우린 해피 엔딩일 거니까.”

OTT 플랫폼의 영화 목록에서 이해성이 〈러브 스토리〉를 검색하고 있을 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고용인이 아닌 강 실장이 직접 음료를 가지고 들어왔다. 강 실장의 등장에 최홍서는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례하겠습니다.”

강 실장이 테이블 위에 음료를 내려놓는 동안 안절부절못하고 있다가, 그가 허리를 펴기를 기다려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아닙니다. 더 필요하신 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지난번에도 이번에도, 이해성이 직접 마중과 배웅을 해줬기 때문에 다른 고용인들과는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아마도 최홍서가 불편하지 않도록 이해성이 미리 조치해둔 것 같았다. 하지만 강 실장만큼은 따로 소개를 시켜 줬기에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서먹서먹한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최홍서의 어색함을 눈치챈 이해성이 웃음기 띤 얼굴로 말했다.

“강 실장이랑 친해져 봐요. 앞으로 자주 볼 사이인데.”

“편안하게 느끼실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깍듯이 예의 바른 강 실장의 인사에 최홍서는 진땀이 날 것 같았다. 사귀는 상대의 집안에 상주하는 고용인과는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전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연인의 부모님만큼이나 어려운 상대로 느껴졌다.

“네…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최홍서는 자기도 모르게 슬금슬금 이해성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점점 거리가 좁혀지다 팔과 팔이 닿을 정도가 되었고, 그 후에는 이해성의 팔꿈치 부근을 잡고 있었다.

낯설고 어려운 사람 앞에서 자신에게 의지하는 최홍서가 귀엽게 느껴졌는지, 이해성은 자기에게 꼭 붙어선 최홍서를 내려다보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왜요? 강 실장이 무서워서 그래요? 인상이 조금 무섭긴 하지.”

“아니요! 전 그런 말 안 했어요!”

혹시라도 강 실장이 오해할까 싶어, 최홍서는 손까지 내저으며 강력히 부정했다. 그러면서도 이해성에게 붙어 선 몸을 떼지는 않았다.

“네, 알고 있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부사장님이 훨씬 더 무서운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농담인 것 같은데, 강 실장의 표정이 완벽한 무표정이라 최홍서는 웃을 수도 없었다.

“호텔의 버틀러라 생각하시고 대해주시면 됩니다.”라는 인사와 함께 강 실장이 방을 떠난 후, 그제야 어깨에 힘을 뺄 수 있었다.

“강 실장 있을 땐 나한테 딱 붙어있더니…”

이해성이 자신의 옆자리를 허전한 얼굴로 내려다보며 아쉽게 중얼거렸다. 무슨 뜻인지 이해한 최홍서는 쑥스러움에 말머리를 돌리며 원망스럽게 말했다.

“아까 그런 말씀은 왜 하셨어요?”

“응? 뭐가요?”

“강 실장님 무섭다고…”

“아, 강 실장은 신경도 안 쓰니까 걱정 마요. 서로 농담을 하고 그래야 더 빨리 편해지죠.”

대수롭지 않게 얘기한 그는 리모컨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스크린 속에는 〈러브 스토리〉의 시작 화면이 띄워져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그가 다른 리모컨으로 조명을 어둡게 조절했다.

“홍서 씨 내일 스케줄 있다고 강 실장이 붓기에 좋은 차로 준비했대요. 어차피 우리 둘 다 오늘 술은 자제해야 하니까.”

“진짜요? 괜히 저 때문에 신경 쓰시게 해서 어떡해요. 감사하다고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는데…”

당장이라도 방을 달려 나가 강 실장을 쫓아가기라도 할 것처럼, 최홍서는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이해성은 그런 최홍서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면서 차가 담긴 커다란 텀블러를 손에 쥐여주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시원하게 마실 수 있도록, 차는 넉넉한 용량으로 시원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강 실장이 원래 일을 잘해요. 할 일을 한 거니까 매번 안절부절못할 거 없어요. 자, 마셔봐요.”

“제가 진짜 너무 감사하다고 했다고, 나중에 꼭 전해주세요.”

“알았어요.”

“진짜요, 부사장님. 꼭이요.”

먼저 스킨십하는 법이 거의 없는 최홍서가 옷깃을 붙잡으면서까지 다짐을 받으려 하는 모습에, 이해성은 가득한 웃음기와 함께 돌아보았다. 어깨를 구부정하게 숙인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럼요. 누구 말씀인데 내가 소홀히 하겠어요. 자, 영화 플레이할까요?”

강 실장으로 인한 긴장이 사라지자, 어두운 공간에서 그와 단둘이 영화를 본다는 긴장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훨씬 더 밀도 높고 촘촘한 긴장감에 숨소리의 볼륨이 저절로 낮아졌다.

25살에 죽은 한 여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영화는 눈으로 뒤덮인 넓은 운동장을 바라보는 한 남자의 뒷모습을 비추며 시작되었다.

신파 로맨스 영화의 원조 격으로, 그 유명한 OST와 함께 지금까지도 언급되고 각종 방송에서 자료 화면으로 등장하는, 클래식이라 할 만한 영화였다. 스토리는 단순해도 그 단순한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배우들의 흡입력 있는 연기는 참고할 만하다는 얘기에, ‘보고 싶은 영화’ 목록에 포함시켜 두었었다.

지루하지 않을까 했던 걱정과 달리, 1시간 30분 정도의 러닝타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영화는 다시 첫 장면으로 돌아가 끝을 맺었다. 수미상관이란, 요즘 세상엔 어떤 장르에서든 다소 촌스러운 기법으로 여겨지긴 했지만, 둘 중 한 명이 더 이상 세상에 없어도 그들의 사랑은 무한히 반복되며 끝나지 않으리라는 암시를 주는 것만 같았다.

“생각보다 여운이 남네요.”

이해성의 목소리에는 의외라는 느낌이 있었다. 최홍서는 동의하는 뜻에서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중간부터는 꽤 몰입한 탓에 강 실장이 준비해 준 차가 절반이나 그대로 남아있었다.

“슬픔을 억지로 쥐어 짜내는 뻔한 영화일 거라 생각해서 지금까지 기피했었거든요. 물론 지금 보기에 그렇게 신선한 전개는 아니지만, 그래도 생각과는 좀 달랐어요. 홍서 씨는 어땠어요?”

“눈밭에서 둘이 같이 뛰어노는 그 유명한 장면을 사실 많이 기대했거든요. 내용상 특별한 역할은 없는 장면이라서 쪼금 실망하긴 했는데… 그 장면에서의 두 사람을 보니까, 그 순간에 정말 행복과 사랑으로 충만하구나 그런 느낌이 와서… 별 역할이 없는 장면인데도 두 사람이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겠더라구요. 스토리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연기란 게 저런 거구나 싶고… 실제로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저런 연기가 나올 수 있는지 신기하기도 하고… 그랬어요.”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해성이 최홍서 쪽으로 완전히 몸을 틀어 앉으면서 말했다.

“배우라서 그런가, 역시 연기 위주로 영화를 보네요.”

“아직 배우라 하기엔 좀…”

낮에 보았던 댓글들이 다시금 떠올랐다. 배우로서의 능력을 폄하하고, 조롱하던 내용들, 몸으로 역할을 따냈을 거라는 모함들을 떠올리자가슴이 답답해졌다.

명 사장이 시키는 대로 몸을 팔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으로 돈을 받았을지언정 역할을 거래한 적은 없었다. 애초에 명 사장은 아무리 임원급이라 해도 방송국 관계자들은 고객으로 취급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진실이 아니어도 해명할 기회가 없었다. 그들이 알고 싶은 것 역시 진실이 아니었고.

“너무 겸손한 것 같은데. 홍서 씨 연기력 인정받고 있잖아요. 무엇보다 작품에 타협 없는 강 감독님이 선택했으니까 자신을 가져요.”

최홍서는 이해성의 말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이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영화가 끝났는데도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모르고 대화를 이어갔다. 헤어지기 싫어서 같은 자리에서 뭉그적거리는 여느 연인들과 같은 모습이었다.

최홍서 쪽으로 완전히 몸을 틀어 오른팔을 소파 등받이에 걸치고 있던 이해성이 왼손으로 최홍서의 손끝을 살짝 쥐었다.

“좀 더 있다가 가도 되면… 넥타이 고르는 거 도와줄래요?”

“넥타이요?”

“내일 중요한 일정인데 넥타이를 아직 못 골랐거든. 아… 홍서 씨가 안 도와주면 못 정할 것 같은데.”

최홍서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힐끔 확인했다. 매니저는 퇴근했고, 어차피 택시를 타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이해성을 만나느라 늦게 귀가한 것을 추궁할 사람은 없었다. 무엇보다, 아직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네, 괜찮아요. 아직 더 있을 수 있어요.”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분명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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