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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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20분 전 주고받은 메시지였다.

유럽 출장에서 돌아온 후, 이해성은 출장 내용을 정리하고 사업에 반영하기 위해 전보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ARA 전자의 경영진들은 연일 긴급회의를 개최하는 중이었고, 일주일에 서너 번 정도만 역삼으로 출근했던 이해성도 회의 결과를 보고받기 위해 출근 횟수를 늘렸다.

그 때문에 두 사람은 모처럼 연인이 되었음에도 데이트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30분, 혹은 길어야 1시간. 자동차에서 이동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게다가 내일부터 최소 사흘은 짧은 만남도 가질 수가 없었다.

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 생산 기업의 CEO가 이해성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기 때문이었다.

반도체를 제조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핵심 장비를 전 세계에 독점 공급하는 업체로, ARA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대만 등의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 역시 해당 기업으로부터 장비를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 중이라고 했다.

그런 기업의 CEO를 초대한 것에 성공한 자체가 이해성의 이번 출장의 중요한 성과로 평가되고 있었다. 덕분에 이해성의 유럽 출장 후 ARA 전자를 비롯한 ARA의 전 계열사 주가가 상승하고 있었다.

네덜란드에서 아주 중요한 손님이 오신다고, 이해성은 그 정도로만 얘기해 줬기 때문에 나머지는 최홍서가 기사를 찾아보고 공부한 내용이었다. 경제에는 관심도 없었고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었는데, 요즘은 ARA에 대해서만큼은 자주 검색을 해보고 있었다. 최홍서를 검색하는 것만큼이나 자주.

이해성은 이번 방문에서 ARA 전자의 본사와 홍보관, 광주의 공장을 직접 안내하고, 그 외 CEO의 사적인 몇몇 관광 일정에도 함께할 예정이었다.

일정이 끝나고 나면 한숨 돌릴 수 있으니 그때 조금 여유를 갖고 만나자고, 그렇게 얘기가 된 상태였다.

그런데 보고 싶었다. 아주 잠깐이어도 좋으니까 만나고 싶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

즉, 의지할 상대가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최홍서에게는 낯선 감각이었다. 지금까지 최홍서에게 마음의 고통은 누군가를 만난다고 해서 나아질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혼자 있는 게 나았고, 대부분은 연습실에 틀어박히는 것으로 완화해 왔었다.

그런데 왜 그 사람이 보고 싶어졌을까? 그 사람을 만나면 문제가 해결되나? 그런 것도 아닌데, 왜 만나고 싶지?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충동적으로 메시지를 발송했다.

《오늘 혹시 시간 안 되세요? 늦은 시간도 괜찮고, 잠깐 10분 정도라도 전 괜찮은데.》

《왜요? 만나고 싶어요?^^》

업무를 본다고 했는데, ‘당근판매자’님의 답장은 즉각적이었다. 그리고 최홍서가 답장을 고민하는 사이 곧바로 다음 메시지가 도착했다.

《아직 스케줄 전에 시간 좀 있죠? 10분쯤 후에 전화할게요. 받을 수 있겠어요?》

《네.》

왜요? 만나고 싶어요?

옆에 있었다면 눈을 빛내면서 장난스럽게 웃었을 얼굴이 생생히 그려졌다.

짧게 10분이라도 시간을 내줄 수 있냐는 메시지에 귀찮아하기는커녕, 잠깐의 고민도 없이 바로 반갑게 반응해 주는 VIP.

성장기부터 현재까지, 주변의 어떤 어른도 최홍서를 그런 방식으로 대해준 적이 없어서 가끔은 얼떨떨했다. 방치하거나, 무시하거나, 학대하거나, 속이고 이용하는… 그런 어른들밖에는 없었으니까.

아니면, 우리가 연인이기 때문일까. 세상의 모든 연인들은 서로를 이런 식으로 대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그런데 아닐 것 같았다. 어떤 사람도 이해성만큼 다정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어느새 자동차는 샵에 도착했다. 그의 전화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분주해진 최홍서는 평소보다 서두르며 샵으로 거의 뛰어 들어갔다.

“형, 나 샴푸 들어가기 전에 중요한 통화 먼저 할게.”

“중요한 통화?”

“어. 길게는 아니야. 내 방 3번이지?”

매니저들은 농담으로 최홍서를 ‘레이어드’의 ‘영업이사’로 부르곤 했다. 최홍서가 하는 ‘영업’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모르면서, 최홍서가 타고난 처세술과 친화력으로 소위 ‘높은 분들’에게 예쁨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최홍서의 ‘중요한 통화’나 ‘급작스러운 약속’은 명 사장의 허가가 떨어진 ‘영업’으로 이해하고 협조하는 것이 UB 매니저들의 규칙이었다.

“커피는? 커피 사다 줘?”

입구의 컨시어지에서 샵의 실장과 얘기를 나누던 매니저가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최홍서를 향해 소리쳤다.

“어? 커피, 부탁할게!”

“아아?”

“응, 아아!”

건성으로 대답하며 계단을 마저 오르는 최홍서의 등 뒤에서 실장이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홍서, 뭐가 급해서 저렇게 뛰어다녀요? 쟤 저러는 거 처음 보네.”

2층의 개별실로 들어간 최홍서는 평소와 다르게 안에서 문을 잠갔다. 거울 앞 의자에 앉는 것과 거의 동시에 ‘당근판매자’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네. 저예요.”

전화 너머에서는 말 대신 웃음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왜요?”

[너무 딱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받고 대답하는 게… 귀여워서요.] “아…”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행동에도 일일이 귀엽다고 해주는 사람도 팬들 외에는 처음이었다. 그룹에서도 맏형이고 리더인 데다, 누군가에게 기대는 성격도 아니어서, 주변에서는 최홍서를 귀엽게 봐주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근데, 아까 업무 중이셨던 거 아니에요?”

[맞아요. 그런데 회의는 아니고 그냥 내 방에서 간단하게 보고 듣는거라서 괜찮아요. 잠깐 쉬자고 했더니 다들 좋아하던데요?]

머리를 감기만 하고 온 상태라, 거울 속에 보이는 모습은 엉망이었다. 붕붕 뜬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다 마구 흩트리며 변명했다.

“저기… 아까 그 메시지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너무 충동적이었어요.”

[충동적으로 내가 보고 싶었다는 거잖아요.]

“……”

[10분이라도 좋을 만큼.]

“……”

[아니에요?]

그의 화법은 직설적이라 당황스러운데도, 불쾌하지는 않았다. 결국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쑥스러울 뿐.

“맞긴 한데… 부사장님 내일부터 중요한 일정이잖아요. 사흘 동안은 안 만나기로 이미 서로 다 얘기했던 거고… 떼쓰려던 건 아니었어요.”

[난 홍서 씨가 나한테 떼써줬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귀찮잖아요.”

[10분이라도 좋으니까 내가 너무 보고 싶어서 일이 손에 안 잡힌다고. 남자 친구가 그렇게 말해주는데, 그게 어떻게 귀찮아요?]

거울 속에 보이는 얼굴이 육안으로도 알 수 있을 만큼 순식간에 빨개지고 있었다. 그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뺨을 문지르는 척 얼굴을 숨기며 중얼거렸다.

“저, 그렇게까지는 얘기 안 했어요.”

[가끔 이렇게 불퉁한 목소리 낼 때도 너무 귀엽지.]

전화 너머에서 그가 듣기 좋은 소리로 낮게 웃었다. 잦아든 웃음소리 뒤에는 달래듯 달콤하게, 더 고민하지 말라고, 다정하게 확정 지어 말했다.

[오늘 만나요. 나도 보고 싶어.]

나도 보고 싶다는 그 말은 마법 같았다.

“그러면… 제가 댁으로 갈게요.”

[우리 집으로?]

“제가 무리해서 뵙자고 한 거니까요.”

[알았어요. 홍서 씨가 우리 집 오는 건 언제든 환영이죠.]

댓글을 보고 불안정하게 흔들렸던 내면이 벌써부터 치유되는 것 같았다. 평소 같았으면 기사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질 때까지 며칠은 예민한 상태에서 괴로워했을 텐데.

낯선 표정을 짓고 있는 거울 속의 얼굴을 마주 보면서, 최홍서는 궁금해졌다. 세상의 모든 연애는 다 이런 힘을 가진 걸까? 아니면 우리의 연애가, 그가 특별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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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게 잡힌 홈 데이트인 데다 밤늦은 시간이라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이었다. 다음 날 두 사람 모두 일정이 있어 술을 마시기도 여의치 않아, 가볍게 영화를 한 편 같이 보기로 했다.

이해성은 최홍서가 도착하자마자 2층의 영화 감상실로 안내했다. 영화 팬으로 잘 알려진 그답게, 방 하나가 오직 영화를 감상하기 위한 목적으로 잘 꾸며져 있었다.

“창문이 없어서 그런지 진짜 영화관 같아요.”

구하기 힘든 귀한 오리지널 영화 포스터들이 장식되어 있는 벽면과 가정용으로는 보이지 않는 대형 스크린, 스피커 세트 등을 둘러보면서 최홍서가 감탄했다.

이해성의 집은 맨션에서 가장 높은 펜트하우스였기 때문에 당연히 모든 방에 창문이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카메라 보관실과 마찬가지로 영화 감상실에도 창문이 없었다. 덕분에 두 방 모두 세상과 분리된 그만의 비밀 기지 같은 느낌이 두드러졌다.

ARA라는 의무와 책임을 내려놓고 인간 이해성으로 돌아갈 수 있는, 비밀스러운 역할을 하는 공간들 같았다.

“사람을 초대할 일이 별로 없는 공간이에요. 아마 홍서 씨가 처음 같은데.”

리모컨을 조작해 스크린에 화면을 띄우던 이해성이 최홍서를 쳐다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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