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보고 있었어요?”
“…네.”
그가 기대어 있던 상체를 세우면서 자세를 바르게 했다.
“숨길 일도 아니니까 솔직히 얘기할게요. 홍서 씨는 알 자격이 있기도 하고.”
“예전에 만난 적이 있는 친구예요.”
만난 적이 있는 친구.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한편에서는 그가 말하는 친구라는 게 정말 단순한 친구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나? 라며 억지를 부리는 마음이 있었다.
“만난 적이 있다는 건… 사귀셨던 거예요?”
“표현이 좀 간지럽긴 한데, 그런 거죠.”
그가 쑥스러운 듯 피식거리며 잠시 고개를 숙이고 뒷목을 주물렀다.
“원래 알고 지내던 사이이긴 했어요.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었거든. 그렇게 지내다가 어떻게 계기가 돼서 관계가 발전했는데… 워낙 장거리이기도 하고, 서로 너무 바쁘다 보니 오래 이어질 수가 없더라구요. 얼마 못 가서 서로 정리하는 게 낫겠다 싶었죠.”
이해성은 담담했다. 다 지난 일이고,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가볍게 얘기하고 있었다. 그의 얘기를 들어봐도 길지 않게 만났던, 심각하지 않은 관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최홍서는 좀처럼 안정이 되지 않았다. 조 사장과 있었던 일보다 이쪽의 충격이 더 컸다. 예상보다 더 충격을 받고 있다는 그 사실이 충격이었다.
“이런 얘기, 저한테 하셔도 되는 거예요?”
“왜요?”
“제가 퍼뜨릴 수도 있다고, 그런 의심은 안 하세요?”
한낱 아이돌이 이해성의 비밀을 폭로한다 한들, 관심을 끌려는 발악 정도로 치부되며 흐지부지 끝나버리겠지만, 그렇다 해도 그에게 귀찮은 일 정도는 될 수도 있었다.
“홍서 씨 그럴 거예요?”
그의 질문에 최홍서는 무릎 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여러 번 고개를 저었다.
“말 안 해요.”
“……”
“부사장님께 나쁜 말은 절대 안 해요.”
그는 잠시 침묵하며 최홍서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은은히미소를 띠고 있는데도, 그 바탕에는 씁쓰름함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감동을 받은 것도 같고, 슬픈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은… 그런 얼굴.
“고마워요. 나도 홍서 씨 말은 믿어요.”
너의 말은 믿지만 다른 사람들의 말은 믿지 않는다, 믿을 수 없다.그런 의미가 내포된 것 같아서, 최홍서는 그의 미소에서 느껴지는 쓴맛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바라보는 이해성의 시선이 슬퍼 보여서 최홍서는 좀 전의 화제로서둘러 되돌아갔다.
“그런데, 부사장님은 그… 여자분과 결혼도 하셨었잖아요.”
“……”
이해성의 고개가 약간 기울어졌다. 최홍서가 먼저 그 얘기를 꺼낼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관계에 대해서 적극적인 대화를 시도하는건 언제나 이해성 쪽이었으니까.
최홍서는 변명하듯 덧붙였다.
“저도 부사장님 검색을 좀 했어요.”
“이해성이 이혼남이라는 건 전 국민이 다 아는 얘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너무 자만했었나 보네. 그걸 검색해 보고 알았다니.”
그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점차 옅어지고 씁쓸함만이 남았다.
“그럼 내가 벌써 몇 년 전에 이혼했다는 것도 아는 거죠?”“네.”
재벌가의 이혼치고는 ‘너무 깨끗한’ 이혼이었기에, 웹상에서는 오히려 그의 이혼에 관해 별의별 루머가 다 떠돌고 있었다. 국내 재계에서 압도적 우위를 가진 ARA 그룹에서 너무 쉽게 이혼에 합의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결정적 귀책사유가 이해성에게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이었다.
별거 기간을 제외한 2년의 결혼생활에도 불구,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없었기에 소문이 더욱 자극적인 방향으로 뻗어 나간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의무나 책임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본 적이 없어요, 난. 그럴 생각도 없었고.”
명 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일밖에 모르는 재벌 3세 판의 모범생이라며, 명 사장은 이해성을 비꼬듯 얘기했었다.
“어렴풋이 그런 쪽의 성향이 있구나 싶긴 했어도, 이성과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ARA의 부속으로서의 삶을 사는 데에는 아무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었죠. 노력으로 충분히 가능한 부분인 줄 알았어요. 결혼 전에 동성과 감정적으로 교류를 나누거나 관계를 가진 적도 없었으니까.”
“……”
“그런데, 아내와 잠자리를 갖는 게 불가능했어요.”
카메라를 잔뜩 모아둔 비밀의 방을 공개했을 때처럼, 그는 자신의 약점, 치부를 털어놓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엄청난 대가를 치른 후에야,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죠.”
양가 어른들이 이혼은 절대 안 된다며 허락해 주지 않는 바람에 3년이나 별거를 해야 했던 이야기까지 덧붙인 그는 씁쓸히 웃었다.
“그럼… 아까 그분이랑은…”
조심스러운 최홍서의 질문에 이해성의 얼굴에 다시 웃음기가 돌았다.
자기도 모르게 새어나간 말이었기에, 그의 반응을 보고서야 최홍서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를 자각했다. 순식간에 얼굴로 열기가 몰리는 것을 느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지금, 가스파르하고는 잠자리를 가졌냐고 물은 거예요?”
“잊어버려 주세요.”
“질투했어요? 가스파르한테?”
이해성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즐거워 보였다. 잡은 손을 놓고 도망가려는 최홍서를 꽉 붙잡아 당기며 놓아주지 않았다.
“질투 같은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사이가 좋아 보이시길래! 부사장님 그런 모습은 처음 봐서… 어떤 분이신 걸까, 그게 그냥 궁금해서…”
그렇게 횡설수설 늘어놓는 변명이 더 수상하다는 걸 알면서도 최홍서에게는 고작 그것이 최선이었다.
질투.
그런 감정은 가져본 적이 없어서, 그것을 능숙하게 다룰 줄도 몰랐다.
붉다 못해 거의 검붉어진 것 같은 얼굴을 숨기기 위해 최홍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해성은 그 이상 괴롭히지는 않았다. 대신, 고개를 숙이느라 드러난 최홍서의 뒷목에 자신의 이마를 묻었다.
“홍서 씨, 나 여유 있게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죠?”
“……”
“근데 아니야.”
“……”
“홍서 씨가 이런 틈을 보일 때마다, 그대로 밀고 들어가고 싶어서 초조해져요.”
“그렇게는 안 보이시는데…”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최홍서는 웅얼거렸다. 목덜미 같은 예민한 살갗에 닿아온 그의 체온에 온 신경이 쏠려 있어서, 감정의 피로를 느낄 지경이었다.
“그렇게는 안 보여서 불만이라는 것 같네?”
그의 숨결이 너무 가까워서, 자신의 심장에 대고 숨을 불어넣는 것 같았다. 그 때문에, 반대로 최홍서는 거의 숨을 참다시피 하고 싶었다.
서로 꽉 잡은 손. 목덜미에 닿은 그의 이마. 심장에 느껴지는 그의 호흡. 어지럽고 숨이 막혔다.
“내가 홍서 씨 때문에 더 안달했으면 좋겠어요?”
이해성이 고개를 들고 최홍서의 목에서 떨어져 나갔다. 한결 숨쉬기가 편해졌다. 그런데, 아쉬웠다. 숨이 막혀도 좋으니까 닿아 있고 싶었다.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됐다.
이해성의 다른 손이 머리카락으로 다가왔다. 고정되어 있어 헝클어지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면서, 맞잡은 손을 자신의 가슴 앞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불안해요? 재벌의 가벼운 변덕일까 봐?”
“.……..”
“초조해할 것도, 불안해할 것도 없어요. 이 정도의 감정을 갖게 한건 홍서 씨가 처음이고, 충분히, 홍서 씨가 알면 무서울 만큼 충분히…내 마음, 진지하니까.”
아까의 그 멋진 외국인에게도 이런 말을 해줬을까.
아무리 무겁지 않은 짧은 관계였다 하더라도, 성인들끼리의 만남이었다. 그 사람과는 잠자리도 가졌었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몸이 타는것만 같았다.
타인에 대한 그 정도의 격렬한 감정이 처음이라 최홍서는 어쩔 줄을 몰랐다. 새콤달콤한 설렘, 아웅다웅하는 질투,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 그런 감정들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것에만하루하루를 소진해왔다. 그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런데 그는 기어코 최홍서의 내면에서 감정의 틈을 벌려 놓았다.플러스도 마이너스도 원치 않았던,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고 직선이고만 싶었던 최홍서의 그래프에 기어코 리듬을 만들어 놓았다.
그의 가슴에 닿아 있는, 그의 가슴에 끌어안겨 있는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다섯 번, 안 채워도 될 것 같아요.”
남산을 함께 걸었을 때만 해도 그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VIP에게 가졌던 거리감과 어려움이 무색하도록 입술에서흘러나오는 말들은 망설임이 없었다. 오래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던 말을 겉으로 꺼낼 뿐인 것처럼.
“부사장님 출장 가신 동안, 시간이 되게 안 갔어요.”
“……”
“원래… 틈만 나면 핸드폰으로 제 이름 검색해서 댓글 보고, 커뮤니티나 SNS 돌면서 반응 살피고 그랬는데… 일주일 동안, 태국에 가서도, 부사장님 이름을 더 많이 검색했어요. 다른 기사가 더 나온 게 없는지…”
그는 미동도 없이 최홍서에게 시선을 고정하고만 있었다.
“다섯 번, 꼭 채우고 결정해야 하는 거였어요?”
조심스럽게 묻자, 그제야 그는 작게 고개를 저으며 웃어 보였다.
“아니, 안 그래도 돼요. 홍서 씨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잠깐 숨을 길게 내쉰 그가 한 번 더 확인하듯 물었다.
“그런데 나랑 정말 괜찮겠어요? 나중에 물리겠다고 하면 아저씨도 상처받는데.”
“그렇게 잘해주시는데 어떻게 안 좋아해요.”
“나 좋아해요? 그냥 호감이 아니라?”
“…네.”
우리가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같이 자지도 않았다는 사실에 불안해질 만큼.
묻기는 했지만, 명확히 긍정하는 대답을 들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고. 그의 굳어버린 얼굴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다음 순간, 놀란 얼굴이 부드럽게 녹아내리며 미소 지었다. 그가 기뻐할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어딘가 한구석 아픔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조 사장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
그가 최홍서의 뒷목을 감싸 천천히 당겼다. 이번에는 최홍서의 이마가 그의 어깨에 닿았다. 그의 뜨거운 입술이 귓가에서 속삭였다.
“정말 나를 너무 괴롭게 한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