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조 사장도 나에겐 상것이라는 생각은 안 합니까?”
“……”
조 사장이 손등으로 입가를 훔쳐내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입은 더 놀리지 않았다.
사람마다 성향은 제각각이었다. 최홍서가 비교적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상류 사회도 마찬가지였다. 상위 계급의 인간에게는 철저하게 꼬리를 내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막무가내식으로 행동하는 사람도 소수이지만 존재하기는 했다. 재벌가 출신이 아닌 자수성가형 인물인 조사장은 확실히 후자였다.
하지만 그런 조 사장도 이해성 같은 VVIP에게 끝까지 대적하지는 못했다. 아무리 자신의 능력을 믿고 날뛰는 조 사장이라도, 바로 그 능력을 발휘할 자리를 잃는 것은 두려울 테니까.
“뒤에서 얼마나 천박하게 놀든 말든, 그 역겨운 짓거리를 내 눈에 보이지 말란 겁니다.”
파티가 열리고 있는 정원에서 멀리 떨어진 거실 구석의 바였기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는 않았다. 하지만 보는 사람이 전혀 없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어디에서 보고 있었던 건지, 명 사장이 나타나 최홍서에게 슬그머니 다가왔다.
뭐야, 무슨 일인데. 명 사장의 귓속말을 무시한 채 최홍서는 이해성과 조 사장의 대치에 눈을 고정하고 있었다.
잠시 멈칫하는 듯했던 조 사장이 눈을 번뜩이며 그를 도발했다.
“지난번부터 쟤를 왜 그렇게 싸고도십니까? 설마 천하의 이해성 부사장님께서 겨우 최홍서 정도를 총애하신다는 건… 하하, 그건 아니시죠?”
조 사장의 손가락이 뒤에 선 최홍서를 가리켰고, 이해성이 천천히 걸어가 길게 뻗은 조 사장의 팔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홍서 씨, 내가 많이 아끼는 사람인데, 조 사장이 눈치가 없는 것 같네요. 아니면 일부러 날 화나게 하려고 눈치가 없는 척하는 겁니까?”
“……”
“바닥에서부터 여기까지 올라오고 나니까 이젠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만 재밌어졌습니까? 가끔은 위도 올려다봐야죠. 누구 기분을 거스르면 안 되는지, 여기 바텐더들까지도 다 아는 사실인데. 왜 기본도 못 합니까?”
한 발자국 밖에는 떨어져 있지 않은 거리에서, 이해성은 언성 한 번 높이지 않고 조 사장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조 사장이 능력 있는 경영자라는 건 압니다. 하지만 JS 그룹 회장님이나 곧 JS 건설의 대표 사장이 되실 그 아드님께서도 ARA나 한서그룹과 척을 지면서까지 조 사장을 안고 가려고 하시진 않을 겁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했으리라 생각해도 될까요? 내가?”
“……”
입술을 꽉 다문 조 사장의 얼굴이 노여움으로 씰룩거렸다. 침묵이조 사장의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해성이 그를 닥치게 만든 것이다.
이해성은 한숨을 쉬면서 조 사장을 등지고 바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최홍서가 마시고 있었던 샴페인 잔을 들어 절반을 마셔버렸다.
“조 사장이 이번 영화에 얼마나 투자했었죠? 5억? 10억? 그건 그냥 가져가세요. 푼돈 넣고 얼굴 기웃거려봐야 기분만 잡칠 것 같으니까요.”
반응 없는 조 사장을 돌아보는 이해성의 눈이 싸늘했다. 처음으로 그의 음성에 날카로운 노기가 섞였다.
“기분만 잡칠 것 같다는 말, 안 들립니까?”
조 사장은 핏줄 선 눈으로 최홍서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욕설을 지껄이며 자리를 떠버렸다. 정원 쪽에서는 재즈 피아노 연주가 그치고 댄스파티가 진행되고 있어, 이 소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고작해야 서너 명뿐이었다. 그나마도 이해성이 엮인 것을 알고는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멀리서 힐끔거릴 뿐이었다.
이해성이 언성 한번 높이지 않았기에 멀리서 보면 사소한 말다툼 같았겠지만,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긴장감은 대단했다. 조 사장이 떠난 뒤에도 이해성에게 쉽사리 다가가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바 앞에서 잠시 감정을 가다듬고 있던 이해성이 문득 최홍서와 명사장을 돌아보았다.
“명 사장님, 홍서와 잠깐 둘이서만 얘기할 수 있을까요?”
“네? 아, 네․ 그럼요. 그렇게 하세요. 그렇게 하셔야죠.”
명 사장은 최홍서의 등을 앞으로 밀기까지 하면서, 이해성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 굽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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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떠밀린 최홍서를 바라보는 이해성의 시선은, 좀 아까처럼 꿀이 떨어지는 그런 눈이 아니었다. 안타까움과 미안함,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는 후회가 혼재한 복잡한 눈빛이었다.
조 사장이 눈앞에 있었을 때보다 감정적으로 더 헝클어진 것 같은 이해성의 눈을 바라보면서, 최홍서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바의 가장자리를 짚은 그의 팔에 손을 올렸다.
홍서. 홍서 씨가 아니라 홍서.
그렇게 불러준 건 처음이었다.
이해성이 자신의 팔 위에 올려진 최홍서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정원에서 건물로 들어갈 때는 재킷 위로 손목을 잡았었는데, 이번에 그는 최홍서의 손을 찾아 쥐고 2층으로 이끌었다. 누구에게도 거리낄 것 없다는 듯이.
강우현 감독의 2층 응접실. 그곳은 이해성과 처음 만난 장소였다.
그때 이 문으로 들어서면서 최홍서는 ‘접대’를 각오하고 있었다.
그날부터 오늘 이 순간까지, VIP와 여러 번 만남을 가지면서도 침대 위에서의 접대는커녕 진한 스킨십조차 없었다. 접대를 받는 게 아니라, 남자 친구가 되고 싶다는, 이상하고 특이한 VIP.
최홍서의 손을 잡고 응접실로 들어간 이해성은 문을 닫자마자 다른 손으로 최홍서의 뺨을 쓸었다.
“괜찮아요?”
최홍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를 몰아붙이고 겁박하는 이해성의 낯선 모습에 너무 놀라서, 조 사장과의 사이에 있었던 불쾌한 일은 잊고 있었다.
최홍서의 표정에서 그것을 읽어냈는지, 이해성은 미안한 듯 눈꼬리를 끌어내렸다.
“내가 너무 오버해서 홍서 씨 더 놀랐겠어요.”
아니라고. 이번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여러 번 가로저었다.
그의 두 손이 최홍서의 양 뺨을 감싸, 위를 향하도록 조심히 들어올렸다. 깊숙한 두 눈이 최홍서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누가 아주 작은 흠집이라도 낸 것은 아닐지 염려하는 사람처럼.
“홍서 씨 앞에선 계속 좋은 사람인 척하고 싶었는데.”
“……”
“순간, 눈에 보이는 게 없었어요.”
“부사장님 좋은 분이세요.”
최홍서의 목소리는 잠겨있었다. 이해성이 조금 웃어 보이면서 최홍서의 코끝을 살짝 쥐었다 놔주었다.
“아까 보고도 그래요? 결국 나도 필요할 땐 내 위치를 이용해서 원하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사람이에요.”
그렇게 얘기하는 이해성의 얼굴은 씁쓸해 보였다. 그래서 최홍서는 다급하게, 외치다시피 말했다.
“아까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잖아요!”
조 사장 같은 인간들은 상식으로 대적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돈과 지위로 타인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중단시킬 수 있는 건 돈과 지위밖에 없었다. 이해성은 나쁘지 않았다. 이해성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게 싫었다. 조 사장 같은 인간 때문이라면 더더욱.
최홍서가 처음으로 보인 격한 모습에 이해성은 잠시 놀란 듯했다. 그러다 곧 최홍서를 안정시키려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나 편들어 주는 거예요?”
“부사장님은 좋은 분이세요.”
고개를 푹 떨군 채 꽉 막힌 목소리로, 고집부리는 아이처럼 그 말만 되풀이했다. 이해성이 더 가까이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맞아요, 나 좋은 사람이에요. 누가 나 나쁜 놈이라고 해서 홍서 씨울린 거야? 어? 누가 그랬어?”
아기를 어르듯이 하는 그의 장난에는 최홍서도 결국 피식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들어 마주 보니 따뜻한 미소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시 최홍서에게 익숙한 이해성이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홍서 씨한테는 항상 좋은 사람이고 싶어요.”
“……”
“그래도, 홍서 씨가 저런 일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면, 난 얼마든지 똑같은 행동을 할 거예요.”
당신이 아니었다면, 난 결국 조 사장의 요구대로 해야만 했을 거라고. 남자 친구가 되어 달라며 다섯 번의 기회를 제시하는 것보다, 조금 전 조 사장과의 사이에 일어난 일이 사실 나에게는 더 일상이라고.
당신이 조 사장에게 말한 천박하고 역겨운 짓거리.
거기에 동원되는 게 나라고.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원해서 한 일이 아니라고 해도, 약점을 잡히고 협박당했다 해도,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었다. 그가 자신을 비난하지 않더라도, 이용당한 피해자라고 감싸 준다 하더라도, 연인으로서 자신의 과거를,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최홍서의 손을 잡은 이해성이 소파 쪽으로 앞장섰다. 그를 뒤따라가면서 최홍서는 조금 전의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우리 없이도 다들 잘 노는 것 같은데, 우린 그냥 여기 숨어있죠, 뭐.”
통창 너머로 정원을 힐끗 내려다본 그가 웃으면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옆자리로 최홍서의 손을 당겼다.
손을 잡은 채 긴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잠시 각자의 생각에 잠겨있었다. 푹신한 등받이에 몸을 완전히 파묻은 그는 약간 피로해 보였다. 일주일간의 유럽 출장을 마친 직후인데 왜 그렇지 않겠는가.
최홍서의 시선을 알아챈 그가 등받이에 뒷머리를 기댄 채로 흐리게 웃어 보였다.
“무슨 생각 하세요?”
“……”
대답 없이 미소만 짓는 걸 보니 조 사장과의 일을 계속 생각하는 것 같았다.
【“홍서 씨가 괴롭힘당하는 걸 못 보겠어요. 화가 나요.”】
이미 그렇게 말한 적이 있는 이해성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더 추잡한 장면을 목격했으니 쉽게 진정이 되지 않을 것도 같았다. 그의 생각을 다른 곳으로 유도할 겸 최홍서는 궁금했던 얘기를 꺼내 보았다.
“아까 그분은 누구예요?”
“누구?”
“같이 이야기하셨던 외국분이요. 되게 반갑게 인사하시던데.”
“보고 있었어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