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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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깐만 어깨에 기대도 돼요?”

    의외의 질문이라 즉답할 수가 없었다. 잠시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던 최홍서는 대답 대신, 자신의 왼쪽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가 커다랗게 미소를 지으며 최홍서의 왼쪽 어깨에 자신의 오른쪽 머리를 기댔다. 키 차이 때문에, 그는 엉덩이를 소파 끝으로 길게 빼야만 했다. 그런데도 아주 편안해 보였다.

    “홍서 씨는 어땠어요?”

    그의 오른손이 최홍서의 왼팔 팔꿈치 부근을 만졌다. 재킷의 소매쪽으로, 그의 손이 더 아래로 움직였다. 그 느린 이동을 가만히 내려다보면서 최홍서는 말을 돌렸다.

    “저 뭐라고 저장했는지 알려주세요.”

    “나 보고 싶지 않았어요?”

    “진짜 안 알려주실 거예요?”

    “보고 싶었으면서 쑥스러우니까 말 돌리는 것 봐.”

    “알고 계시면… 넘어가 주세요.”

    “……”

    소매 끝에서 배회하던 이해성의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 그리고 가볍게 안쪽으로 말려 있었던 최홍서의 손가락 틈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천천히 손등을 쓸었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맞닿은 두 손을 내려다보면서, 호흡의 들썩거림으로, 체온의 따뜻함으로, 상대의 감정과 떨림을 그저 느끼고만 있었다. 라이브로 연주되고 있는 재즈 피아노의 멜로디가 정원 쪽에서 멀찍이 들려오고 있었다.

    최홍서에게 기댄 자세 그대로, 이해성이 흉곽을 크게 부풀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당근 구매자님이 날 너무 괴롭게 한다. 정말.”

    그러고는 과감하게, 망설이지 않고, 조심스럽게 걸쳐져 있었던 손을 움직여 최홍서의 손가락에 단단히 깍지를 꼈다. 밀착된 손바닥과 서로를 결박한 손가락은 어떤 기적 같았다.

    신기한 광경을 보듯 그것을 내려다보는 사이, 복도의 코너 너머에서 인기척이 가까워져 왔다. 최홍서가 먼저 슬그머니 손을 놓았다. 코너를 돌아 나타난 사람은 이해성의 개인 수행원인 강 실장으로, 두 사람의 현재 관계를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최홍서에게도 짧게 고개를 숙여 보인 강 실장이 이해성에게 보고했다.

    “부사장님, 미스터 아히만께서 와 계십니다.”

    “가스파르가요? 지금 여기에?”

    꽤나 의외의 소식인지 그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네, 홍콩에 체류하시던 중에 강 감독님 초대로 잠시 들르셨다고 합니다.”

    “그럼 당연히 인사를 해야죠. 홍콩에 와 있는 줄도 몰랐네.”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반가움이 묻어났다. 그가 뒤따라 일어나는 최홍서의 뺨을 살짝 쓰다듬었다.

    “아는 사람이 와 있는 것 같으니까 잠깐 얘기 좀 나누고 올게요.” “네, 그러세요.”

    “피곤하면 그대로 숨어서 쉬고 있어요.”

    그는 자리에 앉으면서 풀어두었던 턱시도 재킷의 버튼을 채우면서 강 실장과 함께 서둘러 복도를 빠져나갔다. 숨어서 쉬고 있으라고,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최홍서는 그가 저렇게까지 반가워하는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복도를 빠져나가, 바 앞의 스툴에 자리를 잡고는 열심히 그의 모습을 찾았다.

    그는 강 실장을 앞세운 채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근사하게 가지를 드리운 소나무 부근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 부근에서 그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리고 그중 한 외국인 남성의 왼쪽 어깨에 손을 올려 자신이 왔음을 알렸다.

    뒤를 돌아본 남자의 얼굴이 한순간에 반가움으로 환해졌다. 이런 파티에서 사교를 위해 의례적으로 짓는 미소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악수를 함과 동시에 서로 가볍게 끌어안고 등을 두드렸다. 비즈니스 관계가 아님은 분명해 보였다.

    이해성을 오래 안 것은 아니었지만, 타인에게 그렇게까지 솔직한 호의를 보이는 이해성은 처음이었다. 더 정확히 하자면,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그런 호의로 대하는 이해성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의 집 접견실이 아니라, 현관 안쪽, 진짜 거실까지 들어갈 수 있는, 그 정도로 가까운 사람 같았다.

    남자와 이해성은 무리를 떠나 정원의 가장자리로 이동해 가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해성보다는 좀 더 작지만 185cm는 충분히 될 법한 키에 곱슬기가 있는 어두운 금발을 어깨까지 기른 남자는 이해성보다는 대여섯 살 정도 어려 보였다. 얼핏 자유분방해 보이면서도 태도나 자세에서 기본적인 우아함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뭐랄까. 두 사람은 아주 잘 어울렸다.

    꼭 연인으로서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서 그다지 격차가 느껴지지 않았다.

    키 차이가 뚜렷하지도 않았고, 나이 차가 심해 보이지도 않았으며, 서로가 서로를 편안하게 대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 남자는 여느 사람들처럼 이해성의 기분이나 눈치를 살피지 않았다. 오랜 친구를 대하듯 자연스러웠다.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지켜보는 사이, 그 외국인이 이해성과 크게 다르지 않은 환경, 상류층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온 남자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VIP라고 해서 사생활이 없는 것도 아닐 테고, 친한 친구나 지인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자신을 바라볼 때처럼 꿀이 떨어지는 눈으로 그 남자를 쳐다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두 사람 사이에서 느껴지는 친밀함이 입을 마르게 했다. 가슴이 꽉 조이는 듯 답답하기도 하고, 쫓기고 있는 것처럼 초조하기도 하고, 일이 잘 안 풀릴 때처럼 짜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중 어느 것도 완벽히 들어맞는 감정은 아니었다.

    최홍서는 그 두 사람에게서 등을 돌려버렸다. 잔 속에 남아있던 샴페인을 단번에 비우고, 좀 더 독한 술을 주문했다.

    “주연 배우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문득, 등을 가만히 쓸어내리는 손바닥의 감촉에 옆을 돌아보았다. 조 사장이 어느새 곁에 다가와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최홍서가 의자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려 하자, 조 사장은 최홍서의 허리를 감싸 아래로 당겼다.

    “앉아, 앉아. 앉아있어.”

    그리고 최홍서의 바로 옆 스툴을 더 가까이 당겨와 자리에 앉았다.

    “홍서, 캐스팅 확정 축하해.”

    “감사합니다.”

    바텐더를 불러 얼음을 넣은 위스키를 주문한 조 사장이 자신의 무릎으로 최홍서의 허벅지 옆을 툭툭 치면서 말했다.

    “소액이어도 나도 엄연히 〈크림 맨션〉 투자자인데. 감독님하고 인사 다니다가, 결국 부사장님 따라 사라지더라? 나한테는 와서 따로 인사도 안 하고 말이야. 섭섭하게.”

    “죄송합니다. 오늘 생각보다 손님들이 많이 와 계셔서…”

    “명 사장이 교육 그렇게 시켰어? 이해성 아래로는 다 좆밥이니까 무시해도 된다고?”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그래, 뭐… 네가 무슨 잘못이겠냐. 다 어른들끼리의 이해관계인 거지.”

    말끔하게 다듬어진 손톱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는 조 사장 앞에 온더록스가 서빙되었다. 두세 모금 술을 마신 그는 잔을 손에 들고 빙빙 돌렸다. 얼음이 짤랑거리는 소리가 위험을 알리는 효과음 같았다.

    “어쨌든 우리가 〈크림 맨션〉으로 한배를 타게 됐잖아? 그것도 다인연인데, 우리 같이 재미 좀 볼까? 홍서는 어떻게 생각해?”

    “아…”

    최홍서의 시선이 저절로 아래를 향했다.

    “그날, 이해성한테 털리고 기분 좆같았는데도 말이야. 네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더라.”

    조 사장의 손이 불쑥 다가와 귀를 만졌다. 귓바퀴를 문지르며 아래로 내려가서는 귓불을 비볐다. 조금 전 손바닥을 완전히 밀착시켰던 이해성의 체온은 그렇게 다감했는데, 조 사장의 체온은 끔찍하기만 했다.

    슬그머니 상체를 비틀어 그 손에서 빠져나가면서, 최홍서는 최대한 곤란한 빛을 내비쳤다.

    “이런 부분은 제가 아니라, 저희 사장님하고 말씀하시면…”

    “명 사장 통할 게 뭐가 있어?”

    조 사장이 최홍서의 말을 툭 자르고 끼어들었다.

    “괜히 중간에 수수료만 빠지는 거지. 성인끼리 눈 맞아서 배도 맞춰보겠다는데 그게 문제가 돼?”

    잔을 내려놓은 그는 몸을 완전히 돌려 최홍서를 향해 앉았다.

    “나도 상도덕이 있고 이 바닥 생리 알 만큼 아는 사람이야, 홍서야. 예쁜 애들이랑 놀겠다면서 성의도 안 갖추고 들이대는 그런 노린내 나는 영감들하고는 달라. 난 너네들한테 돈 안 아낀다?”

    조 사장의 손이 최홍서의 허벅지 위에 올라왔다.

    “지난번 그 노래, 둘이 있을 때 다시 춤춰줬으면 좋겠는데. 알몸으로.”

    다리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손에 최홍서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어떻게 거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거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고, 지금까지 거부해왔던 상황도 아니었다. 하지만 거부하고 싶었다.

    팬츠 위로 최홍서의 가랑이를 가득 움켜쥔 조 사장이 손안의 성기를 주물럭거리며 최홍서의 어깨 끝에 턱을 대고 속삭였다.

    “다 벗고 그걸 추면, 네 여기가… 어떻게 될까.”

    조 사장의 손목을 쥐고 바깥으로 당기면서, 최대한의 용기를 쥐어짰다.

    “저희 사장님 통해서 말씀해 주세요. 정말 곤란합니다.”

    “존나 덜렁거리겠지? 하, 씨발… 돈 줄게. 돈 준다니까? 여기서 지금 바로 혀 넣고 키스해 주면 오백 더 줄게.”

    당장이라도 최홍서의 얼굴을 뒤덮을 것처럼 바짝 다가오던 조 사장의 얼굴이 한순간 뒤로 확 물러났다. 최홍서도, 조 사장도, 고개를 번쩍들었다. 차갑게 굳은 얼굴의 이해성이 조 사장의 뒷덜미를 붙잡고 서 있었다.

    조 사장이 이해성의 손을 쳐내며 벌떡 일어났다.

    “씨발… 지금 이게 뭐 하시는 겁니까, 부사장님. 예?”

    “조 사장이야말로 뭐 하는 겁니까?”

    “보고도 모르십니까. 연애 걸잖습니까. 부사장님 이거, 아주 매너좆같은 행동이십니다. 이런 상것 앞에서 쪽을 주는 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예?”

    “상것?”

    펄펄 뛰는 조 사장과 달리 못 박힌 듯 꼿꼿이 서 있던 이해성이 미간을 구기면서 조 사장의 말을 반복했다. 그러고는 코웃음과 함께 싸늘히 덧붙였다.

    “조 사장도 나에겐 상것이라는 생각은 안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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