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강 감독의 자택에서 열린 파티라는 점은 지난번과 같았지만, 성격이 전혀 달랐다. 참석자들은 전원 격식을 갖춘 이브닝 웨어 차림이었고, 젊은 남녀가 바글거리는 수영장이나 DJ 부스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참석자들은 모두 간단하게나마 서로를 아는 사이였기에, 전형적인 상류층 사교 파티에 편안함이 더해진 분위기였다.
해가 저물어 갈 무렵 파티가 시작되어, 넓은 정원에는 한낮의 열기도 가신 상태였다.
파티를 위한 턱시도 슈트 차림에 머리카락을 평소와 달리 좀 더 드레시하게 연출한 이해성은 비즈니스 슈트를 입고 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봐왔던 어떤 배우나 모델보다 화려하면서도 절제된 기품이 있었고, 사람들의 주목 속에서 자연스럽게 무게감 있는 리더십을 발휘하면서도 편안해 보이는 모습을 잃지 않았다.
강우현 감독의 응접실에서 첫 만남을 가졌을 때와도 달랐고, 비즈니스 슈트를 입은 뉴스 기사 속 모습과도 달랐다.
그가 강우현 감독, 그리고 제작사 대표와 함께 영화 제작의 주축으로서 능숙하게 축사를 하고 건배를 제의하며 파티의 초반을 이끄는 동안, 최홍서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가 세계의 중심 같았다. 최홍서의 눈에는 그랬다.
네 명의 주연 배우 중 한 명으로 앞쪽에 불려 나가 소개되는 동안에도, 바로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는 그의 시선 때문에 평소보다 훨씬 더 긴장이 됐다. 퍼포먼스 전의 간단한 인터뷰에서조차 벌벌 떨었던 신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개회사 후에는 강 감독을 따라다니면서 중요한 손님들에게 얼굴도장을 찍어야 했다. 며칠 만에 겨우 이해성과 같은 공간에 있게 됐는데도, 조용히 인사를 나눌 시간조차도 없었다.
인사와 악수, 기념 촬영을 열 번 가까이 반복했을 때쯤 등 뒤에서 부드러운 웃음기를 담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독님, 홍서 씨 잠깐만 빌려 가도 될까요?”
강 감독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은 사람은 이해성이었다. 그를 발견하자마자 최홍서는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갑자기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 부사장님!”
“제 손님들한테도 잠깐 소개하고 싶어서요.”
“그럼요, 그럼요. 모셔 가세요. 내가 우리 주연 배우 자랑에 좀 심취했어요. 오늘 턱시도 입은 모습 보고 내가 홍서 씨한테 한 번 더 반했잖아. 내 머릿속에 있던 황지우가 그대로 튀어나온 것 같다니까?”
영화의 주연 배우보다 ARA의 부사장인 자신에게 훨씬 더 관심이 많아 보이는 강 감독의 손님들에게 짧게 고개를 숙여 보인 그는, 최홍서의 등허리에 가볍게 손을 얹은 채 건물 쪽으로 이끌었다.
조금 전 무리에서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졌을 때쯤, 그가 귓속말하듯 가까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제 인사도 어느 정도 끝난 것 같아서 끼어들었어요.”
“……”
“이렇게 가다가는 오늘 안에 홍서 씨랑 얘기도 못 해볼 것 같아서 기회 좀 엿보고 있었거든요.”
정원과 이어지는 거실의 폴딩도어가 활짝 열려 있었고, 건물 내부에도 바와 손님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거실 안으로 들어선 이해성은 바 쪽으로 걸어가면서 최홍서의 슈트 재킷 위로 손목을 잡았다.
탄산이 보글보글 올라오는 시원한 샴페인을 한 잔씩 받아 든 두 사람은 자리를 옮겼다. 어느 복도에 놓인 긴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누가 일부러 찾아오지 않는 한,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이었다.
“겨우 둘이 있게 됐네요. 제대로 인사도 못 했잖아요, 우리.”
그가 고개를 기울여 최홍서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웃었다.
“잘 지냈어요?”
최홍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부사장님도 잘 지내셨죠?”
“그 어느 때보다 즐거운 출장이었죠. 누구 덕분에.”
잠시 아래를 향했던 이해성의 시선이 다시금 최홍서를 마주 보았다.
“그런데, 그 누구 때문에 어느 때보다 더 길게 느껴지는 출장이기도 했어요.”
나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고. 시간의 흐름 같은 건 그다지 의식해본 적도 없는데, 부사장님이 출장 가 있는 동안 정말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 같았다고.
그런 말들은 최홍서의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감독님 말대로 오늘 홍서 씨 너무 멋있는데요? 실물은 오랜만이라 그런가? 더 멋있어진 것 같네.”
그의 말투와 표정에는 다정함이 가득했다. 어린아이의 비위를 맞춰주는 것 같은 어투면서도, 한 수 봐준다는 듯이 구는 느낌이 없었다. 마냥 귀엽고 귀한 상대를 바라보는 순간의 행복과 기쁨만이 있을 뿐이었다.
출장을 가기 전에도 그랬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이해성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눈에서 꿀이 떨어진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그건 최홍서가 누구에게서도 받아본 적 없는 눈길이었다. 부모에게서조차도.
그런데도 살가운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뚱한 무표정으로 샴페인 잔만 만지작거리고 있다니… 자신의 애교 없는 성격이 답답하다 못해 원망스러웠다.
“아! 집에서 나오기 전에 셀카 찍었는데. 이번엔 진짜 괜찮게 찍은 것 같아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을 꺼낸 이해성은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찾았다. 이해성이 액정 위를 몇 번 만지자, 최홍서의 재킷 주머니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직접 보여줄 줄 알았는데, 메신저로 전송을 한 모양이었다.
사진을 확인하려고 최홍서는 별생각 없이 핸드폰을 꺼내 메신저 앱을 실행했다.
“홍서 씨의 트레이닝 덕분에 셀카 실력이 확실히 향상된 것 같… 뭐야.”
사진을 같이 보려고 이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던 이해성이 한순간 자기 눈을 의심하듯 액정 위로 얼굴을 더 깊이 숙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엔 핸드폰이 최홍서의 손을 떠나 있었다.
“이거, 내가 왜 ‘당근 판매자님’으로 저장돼있어요?”
“주세요.”
그는 핸드폰을 되찾기 위해 덤벼드는 최홍서의 몸을 한 팔로 지그시 눌러 저지했다. 그러고는 반대편으로 몸을 돌려 메신저의 대화명을한 번 더 정확히 확인했다.
등 뒤의 최홍서를 돌아본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당근이 뭐지? 내가 홍서 씨한테 당근 팔았어요?”
귓불과 목, 얼굴 전체가 붉어진 것이 느껴졌다. 최홍서는 굽힌 팔을들어 팔꿈치 안쪽에 얼굴의 절반을 묻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향해 다른팔을 열심히 뻗어보았다.
“주세요, 폰.”
“안 주면 울 거예요?”
“울진 않을 건데, 화는 낼 수도 있어요.”
다른 사람과의 대화창을 열어본 것도 아니고, 어차피 그와의 대화창이었다. 그런데도 뭐가 그렇게 쑥스러운지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됐다.놀리니까 쑥스러운 것 같았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데…
화낼 수도 있다는 말에 이해성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런데 오히려 기뻐 보이는 표정이었다.
“화낼 수도 있다고 협박하는 것도 그냥 다 좋은데. 이거, 내가 이상한 거 맞죠?”
“……”
“화내는 거 보고 싶다고 하면, 진짜 화내겠죠?”
“……”
최홍서는 핸드폰을 향해 뻗고 있었던 팔을 거두고, 가만히 이해성을 쳐다보았다. 그제야 그는 최홍서의 손에 핸드폰을 쥐여주었다.
“돌려주는 건 주는 건데, 당근 판매자가 뭔지 얘기나 들어볼게요.”
다시 또 뺏길까 싶어, 최홍서는 얼른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잠금 설정이 돼 있긴 한데,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누가 보고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부사장님이라든가, 이해성이라는 이름을 사용해 저장할 수는 없었다. 그건 다른 VIP들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최홍서는 가슴이 뜨끔했다. 그는 지금까지의 여느 VIP들과는 전혀다른데, 그런데도 숨겨야 하는 점은 똑같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고지운이 스폰서에게 받은 아파트 얘기에 왠지 가슴이 철렁했던 것처럼.
“근데 왜 하필 당근이지?”
“당근 백화점이라고,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끼리 중고 거래를 할 수 있는 앱이에요. 직접 만나서 사고팔고 하거든요.”
“아… 그런 거구나. 홍서 씨도 그 앱으로 중고 거래를 해요?”
“가끔요.”
더 이상 손이 가지 않는 옷이나 신발, 만화책 등을 거래한 경험이 있었다. 이해성은 놀란 눈치였다.
“위험하지 않나?”
“밤에 거래하면 아예 몰라보시는 분도 있어요.”
“음… 그럼 나도 바꿀까? ‘당근 구매자님’으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는 긴 다리를 겹쳐 꼬면서 샴페인을 마셨다. 그 옆모습을 힐끔 바라보면서 최홍서가 질문했다.
“지금은 저, 뭐라고 돼 있는데요?”
“안 알려줄래요.”
“……”
“그런 귀여운 표정 지어도 안 알려줄 건데.”
“귀여운 표정 안 했어요.”
“했거든요.”
“귀여운 표정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딱딱하게 말한다고 귀여운 게 안 귀엽게 되나?”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그렇게 얘기한 그는 손을 뻗어 최홍서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아… 행복하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얼굴에는 구석구석까지 미소가 가득했다.
행복.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그는 이 시간을 행복해하고 있었다. 행복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지, 그건 잘 몰라도… 최홍서 역시 이 시간이 천천히 지나갔으면 하는 마음은 같았다.
스타일링된 머리카락 가닥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엄지로 최홍서의 뺨을 비비며 말했다.
“잠깐만 어깨에 기대도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