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슬슬 바닥을 보이는 술병들을 확인한 최홍서는 식당과 연결된 주방으로 가서 술을 더 챙겨 나왔다. 유명 브랜드의 고급 샴페인이었다.
“오늘 마시려고 면세점에서 두 병 사 왔지.”
홍서의 손에 들린 묵직한 검은색 병을 발견한 손님들은 환호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촌스러운 새끼들. 그 정도가 무슨 대단한 줄이라고.”
고지운.
최홍서보다 두세 살 어린 그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버린 보이 그룹의 멤버로, 배우로 전향하면서 팀에서 혼자 살아남은 상태였다.
고지운의 비아냥거림에 분위기가 냉랭하게 얼어붙었다. 몇몇은 욕설을 중얼거렸고, 고지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집어 들고 식당을 나가버렸다.
“고지운 저 새끼는 왜 불렀냐? 분위기 잡치게.”
복도와 연결된 식당의 유리문이 완전히 닫히기가 무섭게 누군가 언성을 높였다.
“지가 언제부터 이런 거 마시고 살았다고. 우리랑 다를 것도 없는게. 저 새끼 요새 왜 저러는 건데?”
“쟤 드라마 하면서 스폰 잡아서 저래.”
“……”
누군가 던진 스폰이라는 말에, 순간 식당 안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말 그대로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지난달인가? 남태평양 어디 섬인가 뭔가 가서 SNS에 사진 올리고 자랑질 난리였잖아. 그것도 스폰이 데려간 거야.”
“어쩐지… 무슨 전용기에 침실 4개짜리 독채 풀빌라에 아주 지랄을 하길래 지가 그런 돈이 어디서 났나 했다.”
납득이 간다는 듯 우종현이 혀를 차며 비아냥거렸다. 폭로는 계속 이어졌다.
“여행 가서 스폰한테 뭔 짓을 해줬는지 모르겠는데, 갔다 와서 강남에 아파트를 사줬대.”
“뭐?”
고함을 지르듯 놀라 되물은 것도 우종현이었다. 하지만 자리에 있던 거의 모두가 우종현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혐오와 불쾌감만을 담고 있지 않았다.
호기심, 솔깃함, 그리고 약간의 부러움이 뒤엉킨,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감정이 그들의 얼굴 위에서 일렁거렸다.
그때껏 대화에 끼지 않고 샴페인만 홀짝거리고 있었던 최홍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쪼그라들었다.
고지운이 받은 아파트가 스폰이라면, 그럼… 이 집은 뭘까?
남태평양의 섬으로 함께 놀러 가서 이런저런 더러운 짓을 해준 대가가 아니니까. 이해성은 아직 자신의 입술조차도 건드리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스폰이 아닌 것일까.
샴페인 잔의 가장자리를 이로 긁으며 생각에 빠진 사이, 식탁 위에서 핸드폰이 우웅, 웅, 가볍게 몸을 떨었다.
‘당근판매자님’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최홍서는 전화가 울린 것을 핑계로 조용히 일어나 식당을 빠져나갔다.
‘당근판매자님’의 메시지를 확인하면서 잠시 바깥바람이나 쐬고 싶었다. 복도를 빠져나가 거실로 들어서니, 고지운이 어두컴컴한 거실에 혼자 앉아있었다.
“여기서 혼자 뭐 해?”
“그냥… 저 새끼들 재수 없어서.”
인기척의 정체가 최홍서임을 확인한 고지운은 까칠했던 표정을 조금 풀면서 멋쩍은 듯 말했다. ‘레이어드’의 다른 멤버와 친한 고지운이었지만, 최홍서를 곧잘 따르곤 했었다. 녀석에게는 늘 동갑들을 시시하다고 여기는 분위기가 있기는 했다.
“다들 원래 입이 험하잖아. 속에 깊이 담아두는 놈들은 아니야.”
“신경 안 써. 어차피 평생 갈 사이도 아니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그렇게 말한 고지운은 답지 않게 뜸을 들이면서 최홍서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할 말이 있으면 시원하게 하는 녀석이었기에 최홍서도 그것을 모른 척하고 가버릴 수가 없었다.
“형은 입이 무거우니까 하는 얘긴데…”
“뭔데 그렇게 무게를 잡아? 괜히 무섭게.”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해봤지만, 고지운은 웃지 않았다. 최홍서가 소파 옆자리에 앉은 뒤에도 고지운은 잠시 망설이다 운을 떼었다.
“사실 나, 요즘 만나는 사람이 있거든.”
“……”
“근데… 그 사람한테 나만 있는 게 아닌 것 같아.”
혹시라도 누가 오지는 않는지 최홍서의 어깨너머를 계속 힐끔거리면서도, 녀석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말하고 있었다. 거의 귓속말에 가까울 정도였다.
“솔직히 말하면, 결혼도 한 사람이고… 그 사람한테 나는 그냥 데리고 노는 애인이라는 거 알아.”
애인의 의미가 이런 것이었나? 결혼한 사람이 밖에서 따로 만나 즐기는 상대?
성공에 대한 집념이 다소 강하기는 했어도, 고지운은 애인의 의미를 이런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녀석은 아니었다.
고지운이 말하는 그 사람이 식당 안에서 들었던 스폰서라고, 최홍서는 씁쓸히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나 전에도 여러 애들 거쳐 갔었다는 것도 알고. 근데.”
어둠 속에서 고지운의 눈이 번뜩였다.
“절대 나는 쉽게 버리지 못하게 하고 싶어. 좋은 방법 없을까?”
“……”
“내가 그 사람한테 둘째, 아니면 셋째일지 몰라도, 지금은 나한테 정말 잘해주거든. 그런데도 이 사람이 어느 날 나한테 질려서 끝이라고 통보하면 난 붙잡을 방법이 없어. 그 사람이 지금까지 데리고 놀다가 버렸던 애들, 난 걔들처럼 병신같이 아무것도 못 해보고 버려지고 싶진 않다고.”
두 손을 꽉 깍지 끼고 그렇게 얘기하는 고지운은 사랑의 감정에 매몰되어 초조해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난 이런 관계 가져 본 것도 처음이고, 진짜 힘들게 잡은 기회란 말이야. 이 사람이 나를 쉽게 버리지 못할 이유 하나만 만들어 두면… 앞으로 진짜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
녀석은 이제 다리까지 덜덜 떨고 있었다.
손안에 우연히 굴러들어 온 일확천금을 놓칠까 전전긍긍하는 것 같은 모습. 그건 차라리 광기에 가까웠다.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 말이야. 우리 같은 놈들이 그런 사람들 약점을 잡을 수 있는 방법 뭐 없을까? 형은 주변에서 뭐 좀 들은 거 없어?”
“글쎄… 나도 별로 똑똑한 놈은 아니잖아.”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의 약점을 잡아서 그들과 동등해질 수 있는 방법. 그런 걸 알았다면 이서경 전무나 명 사장에게서 진작 자유로워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게 있다면 최홍서가 좀 알고 싶었다.
고지운이 최홍서의 곁으로 더 바짝 다가와 앉았다.
“아니면 형 주변에 그런 쪽 잘 아는 사람, 누구 없어? 상류층들 잘 알고 연출 좀 있는 사람.”
“내가 그런 사람들하고 어떻게 알겠어.”
손에 쥔 핸드폰이 웅, 웅 연속적으로 울리고 있었다. 전화는 아니고 메신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었다. ‘당근판매자님’의 메시지일 것이다. 이해성은 상류층들을 잘 아는 사람 정도가 아니라, 상류층 그 자체였다.
지난 며칠간, 유럽 순방 중인 그와 메신저를 나누고 틈틈이 통화를 하면서, 최홍서 안에서 공적인 이해성보다 개인적인 이해성이 점점 더 존재감을 키워갔다. 그래서 그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대단한 위치에 있는 사람인가를 잠시 잊고 있었다.
어떻게 해도 그는 영원히 ARA 전자의 부사장으로만 보일 것 같았는데.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변화에 잠시 얼떨떨했다.
“형 잘나가잖아.”
채근하듯 얘기하는 고지운의 목소리에 최홍서는 생각에서 빠져나와 녀석을 쳐다보았다.
고지운은 최홍서의 눈치를 한번 살피고는 조심스럽게 뒷말을 이었다.
“그럼 사람들하고 연결해 주겠다고 다가오는 브로커, 없어?”
“…없었어.”
“형 정도 외모에, 이젠 인기도 많은데… 연락이 없다고?”
최홍서는 고개를 저었다. 좀처럼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고지운은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브로커 끼고 만나면, 중간에서 조건도 다 흥정해 주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조언도 해주고 한다는데… 난 너무 아무것도 모르고 그 사람이 먼저 다가와서 그대로 만나는 바람에…”
머리를 마구 흩트리며 손해 봤다는 식으로 얘기한 고지운은 고개를 들고 힘주어 최홍서를 쳐다보았다.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할 거지?”
“안 해.”
“형도 나 더럽다고 생각해?”
“그럴 자격이 어딨어.”
“……..”
잠시 침묵한 채 어둠 속에서 최홍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녀석은 힘없이 시선을 떨어뜨렸다.
“혹시라도 그런 쪽 브로커 알게 되면, 나랑 연결 좀 해줘. 부탁할게.”
그러겠다는 말도, 그럴 수 없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 최홍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들어갈 거야?”
“안 가. 아직도 나 씹고 있을 텐데, 뭐.”
불퉁하게 얘기하며 핸드폰을 켜는 녀석을 내려다보던 최홍서는 소파 옆의 스탠드에 불을 밝혀 주었다. 그리고 조용히 발코니로 빠져나갔다.
한여름인데도, 에어컨이 돌아가는 실내보다 바깥 공기가 더 상쾌하게 느껴졌다. 그건 꼭 강바람 때문만은 아니었다.
강을 사이에 두고 반짝거리는 강남의 야경을 바라보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오늘 귀국해서 오늘 이사를 들어온 집이라, 눈앞의 뷰를 포함해 아직 모든 게 어색했다. 다른 사람의 집들이에 놀러 온 기분이었다.
웅, 웅. 손안에서 재촉하듯 한 번 더 핸드폰이 몸을 떨었다.
드디어 열어본 메신저 창은 ‘당근판매자’님의 메시지로 가득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