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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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비밀의 방에서 그랬던 것처럼 또 얼굴이 뜨거워질 것 같았다.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못 들은 척 그냥 또 맥주를 마셨다. 그러면 그는 채근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부사장님은 안 다녀본 곳이 없고, 안 해본 게 없을 줄 알았어요.”

“휴가 때는 조용한 곳에서 푹 쉬는 걸 선호하거든요. 부모님 두 분다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2~3년 동안 휴가도 없었죠. 책임이 막중했으니까.”

너무 무거운 얘기를 꺼냈다 싶었는지, 그가 목소리 톤을 바꾸면서 얼굴을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나중에 같이 방콕에 가면 홍서 씨가 가이드 해줄래요?”

“저도 잘 몰라요. 그냥 매니저 형들 따라다닌 거죠.”

“그래도 나보다 잘 아는 것 같은데요, 뭐.”

그의 손이 테이블 위에, 최홍서의 맥주캔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의 얼굴처럼 흠잡을 데 없이 길고 곧고, 손톱 끝이 말끔히 정돈된 손이었다. 그 손을 힐끔거리면서 맥주캔의 표면을 문지르다 불쑥 말했다.

“그럼 일주일 동안 못 뵙겠네요.”

“음, 그렇겠어요. 다음 주에 강 감독님 댁에서 파티가 있단 얘기 들었죠? 아마 우리, 다음엔 거기서 보게 될 것 같아요. 내 귀국 일정에 맞춰서 파티 날짜를 정한 거라.”

〈크림 맨션〉이 제작에 들어가게 됐다고, 강 감독의 지인들이나 고마운 분들을 모시고 보고하는 자리라는 설명은 매니저를 통해 들었었다. 일종의 사교 모임이지만, 참석자들이 워낙 대단한 사람들이라 영화 홍보에 도움이 될 거라는 귀띔과 함께.

“못 만나는 동안, 해외 일정도 잘 마치고, 이사도 잘하고 있어요.” “네.”

“최대한 연락 자주 할게요. 내 연락, 기다릴지는 모르겠지만.”

저자세로 나오는 그의 말에 최홍서는 고개를 들었다. 고작 맥주 반캔에 용기가 솟은 건지, 이번에는 그의 얼굴을 꽤 오랫동안 빤히 마주보았다.

“부사장님 같은 분이 왜 저한테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부사장님은… 슈퍼 갑이시잖아요…”

슈퍼 갑이라는 표현에 이해성은 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든 억눌러보려는 것 같았지만, 한동안 입술을 깨물며 최홍서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래요. 대부분의 상황에서 내가 슈퍼 갑인 건 맞아요.”

“.……..”

“근데 슈퍼 갑이라고 해도 슈퍼맨은 아니거든. 고민이 있고, 의무가 있고, 계속해서 능력이 평가되고, 내 능력에 따른 결과를 책임져야 하고… 가끔은 나도 잘 보여야 하는 사람들이 있고, 원하는 걸 얻어내기 위해 책략을 생각해야 하고 그래요.”

“그리고 또 사생활은 그런 거 하고는 별개잖아요.”

ARA의 이해성이 갑이 아닐 수도 있는 상황. 그게 어떤 상황인지 최홍서는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열심히 그와 눈을 맞추고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멀찍이에 흐릿하게 밝혀진 조명을 등 뒤에 두고, 그가 테이블 위에서 두 손을 가볍게 깍지 끼며 말했다.

“누군가의 마음을 얻고 싶으면, 하느님이라고 해도 갑이 될 순 없을 걸요?”

최홍서가 살아온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돈과 권력이 있으면, 누군가의 약점을 잡고 있으면, 상대를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아니, 그들은 애초에 상대의 마음을 얻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눈앞에서 상대가 웃고, 비위를 맞추고, 하라는 대로 움직이면 그뿐, 보이지 않는 마음따위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세계의 정점에 있는 이해성은 아주 당연하다는 투로 얘기한다. 누군가의 마음을 얻고 싶으면 갑이 될 수 없는 거라고.

그리고 흐뭇하게 웃으면서 최홍서의 뺨을 손끝으로 건드렸다.

아주 짧게, 스치듯 떠나버리는 그의 손길이 아쉬웠다. 그래서 진심을 말했다.

“연락, 자주 해주세요. 저도 자주 할게요.”

“와… 오늘 무슨 날인가?”

상체를 테이블 위로 더 기울이면서, 그가 얼굴을 가까이 내밀었다. 미소가 떠나지 않는 그의 얼굴을 보면, 그가 하는 말들이 거짓일 거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잠시 눈을 맞춘 채 아무 말도 없던 이해성이 문득 카메라 얘기를 다시 꺼냈다.

“카메라를 모으는 취미가 외부에는 비밀이라고 했잖아요.”

“……”

“욕먹을 일도 아닌데 굳이 비밀로 하는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예요. ARA의 이해성이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하는 것에 집중한 한 사람으로 있을 수 있는 그런 숨통 같은 거라서.”

“다른 이유요?”

“진짜 비밀은 따로 있다는 건데… 궁금하죠?”

눈썹을 치키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자, 그의 나이보다 대여섯 살은 더 어려 보였다.

“처음엔 내 앞에서 바짝 얼어있기만 했었는데, 이젠 홍서 씨 표정에서 조금씩 감정이 보여요.”

그렇게 말한 그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최홍서를 바라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나, 약간은 희망이 생긴 것 같은데?”

맥주캔을 쥐었던 시원한 손이 뺨에 닿아왔다. 이번엔 손끝만이 아니라 좀 더 넓게… 그리고 엄지손가락이 가만가만 볼을 쓸었다.

“반품하지 말고 구매 확정해 줘요. 그러면 진짜 비밀도 홍서 씨한텐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진짜 비밀. 최홍서에게도 그런 것이 있었다. 누구에게도,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정지인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이.

나도 이 사람에게 나의 진짜 비밀을 말할 수 있게 될까? 그게 가능할까?

아마도 그럴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이번에는 그의 손이 좀 더 오래 머물렀다.

그런데도 아쉬운 건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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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어드’의 새 숙소는 부촌으로 잘 알려진 유엔빌리지, 그 내에서도 막힘없이 탁 트인 한강 전망을 가진 고급 맨션이었다. 여러 개의 침실과 욕실, 복잡한 복도, 주방과 분리된 식당, 커다란 발코니를 보유한 맨션은 집안의 거의 모든 장소에서 한강을 조망할 수 있었다.

집들이에 초대된 손님들은 집의 위치와 고급스러운 외관, 철저한 보안, 여섯 멤버가 살기엔 지나치게 넓다 싶은 실내 면적과 화려한 전망에 감탄하고 부러워했다.

아직 ‘레이어드’의 수입이 이 정도 맨션으로 숙소를 옮길 정도는 아니었다. 이해성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 최홍서는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면서도, 친구들 앞에서 뿌듯해하는 멤버들의 모습을 보니 한편으로는 행복하기도 했다.

‘레이어드’의 새 숙소 집들이에는 대여섯 명 정도가 모였다.

‘레이어드’ 멤버들이 각자 한두 명씩 부른 손님들이었다. 다른 멤버들의 손님도 최홍서와 어느 정도씩은 친분이 있긴 했지만, 연예계에서 최홍서가 마음을 온전히 터놓을 수 있는 친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털어놓고 싶은 비밀을 말할 수가 없으니, 가까워진다 해도 늘 한계가 있었다.

UB 소속의 배우 지망생이자, 명 사장에게 같은 약점이 잡혀 있는 현수는 서로의 사정을 다 알고 있어 편하기는 했다. 하지만 녀석은 최홍서의 등골을 빼먹는 놈들이라며 ‘레이어드’의 다른 멤버들을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이번 집들이에도 초대해 봤지만 거절당했다.

결국 최홍서의 손님은 정지인뿐이었다.

집들이라고 해도 특별한 건 없었다.

과자와 치킨, 매운맛으로 유명한 떡볶이 따위를 벌려놓고 술을 마시는 자리일 뿐이었다. 다들 또래에 비해 수입은 많아도 여느 20대 초중반들의 자취방 집들이와 다를 게 없었다. 고급 주택가의 화려한 맨션에서, 다양한 주종의 값비싼 술을 마시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선배님, 근데 제가요… 취해서 하는 말이긴 한데요, 배우는 진짜 다르긴 다르네요. 메이크업 하나도 안 한 얼굴이 어떻게 그래요?”

술기운이 어느 정도 오르자, 한 걸그룹 멤버가 맞은편에 앉은 정지인의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보며 물었다. 나이 차가 나는 아이돌 후배들 사이에서 어색해하는 정지인의 모습을 보면서 최홍서는 그저 씩 웃었다.

곤란해하는 정지인이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이런 식으로 어울리는 자리가 오랜만이라 기분이 좋았다. 가장 좋아하는 형도 와 있었고, 그나마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비밀 따위는 없는, 평범한 또래 중 한 명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지인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정지인 옆의 보이그룹 멤버를 향해 과자 부스러기를 던지며 시원하게 웃었다.

“야, 우종현. 너 선배님 옆에 있으니까 완전 지금 오징어 같거든? 멀리 좀 떨어져 앉아라.”

“지랄. 지도 화장발이면서.”

우종현이라 불린 남자는 과자 조각을 주워 그녀에게 도로 던지며 낄낄거렸다.

“난 댄스 담당이라 화장발이어도 괜찮거든? 그리고 난 주제 파악잘해서 누구처럼 연기까지 한다고 나대진 않지. 너 스모키 지우고 드라마 나가서 발연기해 봐라. 팬들 다 떨어져 나갈걸?”

거친 말이 오가고 있어도 그들 사이에서는 일상적인 장난에 불과했다. 그것에 적응하지 못하고 당황하는 정지인이 안쓰러웠다. 최홍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지인의 등 뒤로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형이 이해해. 애들이 좀 못 배워서 그렇지, 악의는 없어.”

“지는 뭐 많이 배웠나…”

걸그룹 멤버와 장난을 주고받던 우종현이 멋쩍음에 귓불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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