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 (33/185)

33.

이번엔 그의 손이 목 전체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성적인 의미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그저 예뻐해 주고 어루만져 주는 다감한 손길이었다.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 더 알아가고 싶어요.”

목소리 역시 어르고 달래듯 부드럽기만 했다. 어떤 강요도 없이. 정말, 특이한 사람이었다.

“나에게는 이런 느낌이 자주 오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지금 꽤필사적이에요.”

“……”

“말했잖아요. 나 탐욕스럽다고.”

더 알고 싶은 궁금증과 호감. 아마도 그건 보통 사람들이 누군가와 연애를 시작하려는 평범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절절히 사랑하게 된 후에야 사귀게 되는 건 아니니까. 이해성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게 결혼이나 영원한 사랑의 맹세 같은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기울어진 관계가 유지될 수 없을 거라는 비관을 떨치기가 어려웠다. 자신이 처한 복잡한 상황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궁지에 몰린 듯한 초조함 속에서 최홍서는 오늘 그에게 말하려고 했던, 그러나 계속 하지 못하고 있었던 말을 꺼내놓았다.

“오늘, 명 사장님한테 들었어요. 저희 이사 가는 숙소, 부사장님께서 준비해 주셨다고…”

“아… 음…”

그가 허공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씁쓸히 웃으면서 최홍서의 목을 감싼 손가락으로 가볍게 피부 위를 두드렸다.

“그 얘기 하려고 만나자고 했던

장난으로 포장하려 하고 있었지만, 그는 실망감을 전부 감추지는 못했다. 그의 손이 최홍서의 목덜미에서 거두어졌다.

“난 또. 내가 보고 싶어서 그런 줄 알았네.”

멋쩍게 웃는 얼굴 앞에서 최홍서의 마음도 좋지 않았다. 그런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내 소유 빌라는 맞아요. 그런데 시세보다 저렴하게 렌트해 준 것뿐이에요. 홍서 씨가 오해 안 했으면 좋겠는데.”

“……”

“홍서 씨는 내가 투자하는 영화의 주연이기도 하잖아요. 더 쾌적한 환경에서 영화에 집중해 주면 투자자 입장에서도 좋은 일이고.”

최홍서가 그다지 납득하는 것 같지가 않자, 이해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요. 솔직히 말할게요.”

“……”

“지금 지내는 숙소를 보고 마음이 많이 안 좋았어요.”

그는 이상한 사람이다.

그의 주변에는 얼마든지 예쁘고, 멋지고, 출신도 훌륭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넘쳐날 텐데. 나 같은 애들은 얼굴이 알려졌다는 이유로 호기심에 한두 번 돌아보는 대상이면 충분할 텐데. 내가 비좁고 허름한 집에 산다고 해서, 왜 본인이 저렇게 괴로운 표정을 짓는 걸까. 그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이해성의 진지한 얼굴을 바라보던 최홍서는 피하듯 시선을 떨어뜨렸다.

“부사장님이 순수한 마음에서… 저를 도와주고 싶어서 그러셨다는건 알아요.”

“홍서 씨, 순수한 마음에서 그런 게 아니라.”

“……”

“그냥 내가, 내 마음이 편하고 싶어서 그랬어요.”

이해성은 최홍서의 어깨를 붙잡았다. 자기를 봐달라는 것처럼, 얘기를 들어달라는 것처럼,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변하는 건 없어요. 부담이나 압박 주려고 한 일 아니니까. 다섯 번 만난 뒤에도 아니다 싶으면, 명함은 돌려보내면 돼요. 빌라 계약은 계약이고, 우리 약속은 약속이니까.”

명 사장에게서 그 빌라가 이해성의 소유라는 걸 들었을 때. 최홍서가 화가 났던 건 이해성 때문이 아니었다. 이해성에게서 무엇이라도 얻어내려 수작을 부렸을 명 사장 때문이었지.

이해성을 완전히 믿든 믿지 못하든, 지금까지 그는 자신에게 잘해줬다. 이런 식으로 자기를 대한 VIP는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명 사장이 그에게서 뭔가를 얻어 가는 게 싫었다.

“그게 아니라… 부사장님께 따지려던 게 아니라,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죄송해요? 뭐가?”

“그냥… 저희 사장님이 그런 부탁드린 것도 그렇고, 어쨌든 부사장님 입장에서는 손해 보는 계약을 하신 거니까요.”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턱 끝이 쇄골에 닿을 것처럼 고개가 수그러졌다.

“홍서 씨, 울어요?”

“아니요.”

고개를 강하게 가로저었다. 이 정도 일에 울어왔다면, 아마 오래전에 이미 눈물에 잠식돼버렸을 것이다. 감정의 기복에 울고 웃어봤자, 결국엔 현실로 되돌아가야 했다. 그러느니 차라리 어떤 감흥도 느끼지 않는 편이 나았다.

“우는 거 아니면 나 좀 봐 줄래요?”

그런데 이 아저씨하고 얘기하고 있으면 자꾸만 기복이 생겼다.

플러스적인 감정에도 마이너스적인 감정에도 휘둘리는 일 없이, 그저 직선을 유지하고 싶은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내가 아는 방법은 그것뿐인데.

“숙소 옮기려고 한다는 얘기, 나한테 말해줘서 오히려 난 명 사장님한테 고마웠는데요?”

“안 그래도 홍서 씨 숙소를 직접 본 뒤에 잠이 안 올 지경이었거든.”

그러니까, 아저씨가 왜요.

“나 돈 많잖아요. 아, 저 아저씨한테는 그냥 목도리나 장갑 정도의 선물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해 주면 안 될까요?”

부사장님 옷장에도 그렇게 비싼 목도리나 장갑은 없을걸요.

“목도리나 장갑을 선물로 준 건데 그렇게 미안하다고 하면, 그럼 오히려 내가 너무 민망한데. 아… 더 큰 집으로 줬어야 했나?”

“……”

그제야 최홍서는 눈을 들어 이해성을 쳐다보았다. 이해성이 내려다보며 웃어주었다. 그의 미소는 최홍서가 부모에게서 받아본 것보다도 더 따뜻했다. 그가 엄지와 검지로 최홍서의 턱 끝을 가볍게 잡았다 놓아주었다.

“괜찮다고 말해줄래요? 숙소 일은 넘어가 주겠다고.”

“……”

“홍서 씨 계속 그런 얼굴 하고 있으면…. 내가 너무 안아주고 싶은데?”

만지고 싶으면 만질 수 있고, 안고 싶으면 안을 수 있고, 침대로 데려가고 싶으면 얼마든지 데려갈 있을 텐데. 지금까지 만난 VIP들은 세상을 그런 식으로 보고 있었는데.

그가 두 팔로 자신을 안아주는 상상을 하자, 우습게도 단번에 귀가확 뜨거워졌다. 그 열기가 얼굴로 번지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손등으로 얼굴을 쓸면서, 최홍서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숙소,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작 포옹을 상상한 것만으로 이런 반응을 보이는 스스로가 이상했다. 순진하지도 않으면서.

안심한 얼굴로 미소 지으면서 이해성이 쇼케이스에 팔을 괴고 상체를 숙였다.

“난 연애에 관해서는 느리고 신중한 타입인 줄 알았어요, 지금까지. 그런데 나도 모르겠어. 홍서 씨한테는 왜 이렇게 뭐든 다 해주고 싶어서 안달 난 극성팬처럼 돼버리는 건지.”

“……”

“아직 남자 친구도 아니면서.”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는 최홍서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그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또 피식거렸다.

“나이 차가 있어서 그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는 허리를 펴고 최홍서의 머리를 쓰다듬었

다.

“그만 올라갈까요?”

비밀의 방에서 나온 뒤 두 사람은 옥상으로 올라갔다.

펜트하우스인 이해성의 집이 단독으로 사용하는 공간이었다. 여러 종의 나무까지 심어진 정원이 꾸며져 있어서, 건물의 옥상이 아니라 전원주택의 마당에 나와 있는 기분이었다.

바로 뒤에는 야트막한 언덕이 있고, 먼 곳에 고층 빌딩들의 마천루가 내다보였다. 선선한 바람이 가끔씩 불어와 더위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거창한 상차림 없이 맥주캔을 하나씩 앞에 놓고 둥근 테이블 앞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 했던 인터뷰와 화보 촬영 얘기, 이해성이 어른들을 모시고 진땀을 빼며 평택의 공장 부지를 다녀온 얘기… 시시콜콜한 하루 일상 얘기일 뿐이었지만, 서로에 대한 관심과 흥미로 지루한 줄을 몰랐다. 그와의 메신저 창을 다시 훑어볼 때면 웃음이 나는 것처럼.

서로의 눈빛, 목소리, 어떤 타이밍에서 웃는지… 그런 소소한 것들하나하나에 의식이 집중된 그 순간은, 분명 데이트였다.

신곡의 첫 방송만큼이나 긴장이 되는데, 도망가고 싶거나 부담스러운 긴장과는 달랐다. 그런 감정은 처음이어서, 눈으로 볼 수 없는 감정대신, 그의 얼굴을 자꾸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어쩌면 그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시선이 마주치는 횟수가 잦았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이해성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꼭 웃어줬는데, 최홍서는 괜히 맥주를 마시는 척, 보고 있지 않았던 척을 했다.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으면서 최홍서가 먼저 물었다.

“내일 출장은 어디로 가세요?”

“유럽으로 가요. 예정은 일주일 정도고.”

“저도 며칠 뒤에 3일 정도 해외 스케줄이 있어요. 토요일에 귀국하자마자 바로 이사 들어가게 될 것 같아요.”

“홍서 씨는 어디로 가요?”

“태국 방콕이요. 저희는 해외 스케줄은 방콕이 제일 많아요. 부사장님은 가보셨어요?”

“방콕 대형 쇼핑몰에 ARA의 브랜드 체험관이 있거든요. 태국에서는 첫 번째 ARA 체험관이기도 했고, 투자금도 많이 들어간 프로젝트라, 홍보차 오픈 행사 때 참석한 적이 있어요.”

“그럼 짜뚜짝 시장에도 가보셨어요?”

“방콕 근교 공단에 ARA의 가전 공장이 있어서, 체험관 오픈 행사 뒤에는 공장 방문하고 바로 귀국했어요. 관광은 못 해봤네요.”

“카오산 로드도요?”

“음… 못 가봤네요.”

맥주캔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최홍서가 눈을 크게 뜨면서 한 번 더 물었다.

“스카이 바는요? 엄청 유명한 루프톱 바라고 하던데. 방콕 간 사람들은 거기 한 번씩 다 간대요.”

“태국식 식사 한 번 하고 온 게 다인 것 같은데. 홍서 씨는 방콕이 굉장히 재밌었나 봐요.”

이해성이 귀엽다는 듯이 웃고 있어서, 최홍서는 자기가 평소보다 훨씬 수다스럽게 떠들어 댔다는 것을 깨달았다. 묻는 말에 틀에 박힌 대답만 했었던 처음과는 분명 달라지고 있었다.

“재밌었다기보다… 그냥 해외에서는 제일 자주 가본 곳이어서요.”

“왜 또 목소리가 작아져요? 신난 홍서 씨 얘기 듣는 거 좋았는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