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당근판매자님 : 만나는 건 물론 난 환영이죠
당근판매자님:홍서 씨만 피곤하지 않으면.
당근판매자님 : 지금도 집에서 쉬고 있는데요, 뭐
당근판매자님 : 홍서 씨가 처음으로 먼저 만나고 싶다고 해줬는데
당근판매자님 : 몇 시가 되든 만나야죠^^ (오후 9:10)
나:저도 괜찮아요. 전 11시면 그렇게 늦게 끝나는 편도 아니라서요
나:어디서 보면 좋을까요? (오후 10:02)
당근판매자님 : 홍서 씨, 우리 집으로 오지 않을래요? (오후 10:0
나 : 부사장님 댁으로요? (오후 10:04)
당근판매자님 : 지금 서초동 집에 있는데, 홍서 씨 촬영하는 스튜디오에서 멀지 않거든요
당근판매자님 : 집에서 만나면 얘기도 좀 더 편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오후 10:07)
당근판매자님 : 실은 내가 내일 일찍 출장을 가야 하거든요
당근판매자님 : 몇 시가 되든 만나겠다고 해놓고 민망하지만 당근판매자님 : 늦은 시간에 집을 떠나기가 약간 부담스럽기도 해서… (오후 10:19)
나:그럼 다음에 봬도 괜찮아요
나: 너무 늦은 시간에 말씀드려서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어요 (오후 10:20)
당근판매자님:이런, 계획 실패네요ㅜㅜ (오후 10:21)
나 : 무슨 계획이요? (오후 10:21)
당근판매자님 : 홍서 씨 우리 집으로 부르고 싶어서 수작 좀 부려봤는데
당근판매자님:안 통하네요 (오후 10:23)
나 : 아… (오후 10:23)
당근판매자님:우리 집, 불편하겠어요?
당근판매자님:솔직하게 말해도 되는 거 알죠? (오후 10:25)
나 : 불편하진 않아요. 약간 긴장은 되지만…
나:그럼 댁으로 갈게요 (오후 10:26)
당근판매자님 : 기대하고 있을게요
당근판매자님: 홈 데이트^^ (오후 10:27)
나: 지금 촬영 끝나고 차에 왔어요
나:바로 댁으로 출발할게요 (오후 11:12)
당근판매자님 : 23분 걸린다고 나오네요. 천천히 와요 (오후 11:14)
촬영이 끝나자마자 세안을 하고 서둘러 자동차에 올라탄 최홍서는핸드폰부터 찾았다.
출발한다는 연락을 하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곧바로 이해성의답장이 도착했다.
천천히 오라는 그의 메시지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긴 한숨을 내쉬며 어둑한 뒷좌석에 앉아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최홍서 쪽에서 먼저 만나고 싶다고 하기는 처음이었다. 그 때문에이해성은 기대하고 있는 눈치였는데, 오늘 보자고 한 이유를 알게 되면실망할 것 같았다. 마음이 무거웠다.
“근데 너… 서초동에는 왜 가는 거야?”
핸들을 쥔 매니저가 은근한 어투로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아까부터 룸미러로 뒷좌석을 힐끔거리는 시선이 심상치 않기는 했다.
그는 최홍서보다 연상에 경력이 꽤 쌓인 매니저로, 운전을 하거나잔심부름을 담당하는 로드 매니저급은 아니었다. 하지만 UB의 사정을잘 알고 회사에 충성스러운 면이 있어서, 명 사장은 최홍서의 개인 스케줄에 그를 배정하고는 했다.
“거기서 애들 모여 있다고 해서.”
“애들 누구?”
“그냥. 형도 아는 다른 그룹 친구들. 우종현이나 고지운 걔네들… 숙소 돌아가는 건 내가 알아서 갈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너 요즘 수상해? 지난번엔 호텔에 데려다 달라고 하질 않나. 걔들 중에 누가 그런 최고급 빌라에 살아? 내가 뻔히 다 아는데.”
“아, 걔네가 요즘 어울리는 부자 친구래.”
매니저가 말하는 지난번이란 건 이해성과의 만남이었다. P 호텔에서 개인 명함을 받은 이후에 한 번 더 다른 호텔에서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데려다준 매니저가 지금의 그였다.
그러니까 이해성이 제안했던 다섯 번의 만남 중에서 한 번은 소진되었고, 이번이 두 번째인 셈이었다.
“혹시 너… 연애하고 그러는 거 아니지?”
“…뭐?”
“요즘 틈만 나면 핸드폰 붙잡고 있고.”
“내가 언제는 안 그랬나?”
“댓글 보는 얼굴이 아닌데, 뭐. 너 댓글 볼 땐 미간에 힘 빡 주고 입술 껍질 계속 뜯어대는데, 요즘엔 핸드폰 보면서 씰룩씰룩하잖아.” “씰룩씰룩?”
“그래, 웃고 싶은데 막 억지로 참는 얼굴.”
매니저의 눈에 그렇게 보였다는 사실이 최홍서에게는 충격이었다. 침대에 누워 메신저를 보며 혼자 웃을 때는 있어도 평소에는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애들이면 몰라도 너야 문제 일으킬 리는 없지만, 그래도 이런 중요한 시기에 연애라도 하는 거면 걱정이 되잖아.”
“형.”
“어?”
“그런 거 아니야. 지난번 호텔도 오늘 서초동 가는 것도 사장님도다 아시는 거야. 그냥… 인맥이나 넓혀두라고.”
“그래…? 사장님도 알고 계셔? 뭐, 그런 거면 상관없지만.”
그제야 매니저는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운전에 집중했다.
최근 자신의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연애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을 들뜨게 했다.
여전히 이해성을 완전히 다 믿는 것도 아닌데.
ARA의 이해성과 자신이 스폰 관계가 아니라 진짜 연애를 할 수 있다고, 그런 관계가 이어져 갈 수 있다고, 헛된 꿈을 꿀 만큼 순진하지도 않은데.
그런데도 가슴속에는 달콤한 술렁거림이 있었다. 달콤함이라니. 그런 걸 즐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스스로 잘 알고 있는데.
핸드폰을 쥔 손에 더 강한 힘을 주었다.
이해성의 빌라는 서초동과 방배동 사이를 가르는 어느 공원을 배경으로 안락하게 위치해 있었다. 덕분에 도로에서 조금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도, 산자락에 폭 감싸인 듯 도심 같지 않게 한적하고 조용한 분위기였다.
지하 주차장에서 내려 매니저를 돌려보낸 최홍서는 이해성의 집과 연결되는 엘리베이터 홀 앞에서 게이트 스크린을 통해 자신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세대마다 엘리베이터 홀을 따로 가지고 있어, 거기서부터가 현관이라는 느낌이었다.
조금 기다리자, 투명한 벽 너머에서 이해성이 직접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타났다. 최홍서를 발견하자마자 그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서 와요.”
최홍서는 크로스백 가방끈을 쥔 채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촬영은 잘 끝났어요?”
“네, 덕분에…”
“내가 뭘 했다고 내 덕분이겠어요. 홍서 씨가 잘한 거지.”
최홍서의 등에 살짝 손바닥을 대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리드하던 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닿을 듯 말 듯 최홍서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려운 걸음 해줘서 내가 감사하죠.”
엘리베이터 안에서 최홍서가 머리를 숙이며 인사했고, 그는 장난스럽게 맞절을 했다. 그는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다.
“댁에 처음 오는 건데 아무것도 못 사 왔어요. 죄송해요.”
“이 시간에 영업도 전부 끝났을 텐데. 뭐 그런 걸 신경써요.”
이해성이 최홍서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리며 허리를 약간 숙였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우리 사이에.”
본인이 말해 놓고도 쑥스러운지 고개를 돌리고는 피식거렸다. 오늘은 평소보다 스킨십도 잦았다.
“홍서 씨가 우리 집에 와줘서 내가 지금 많이 흥분 상태예요. 이해해 줘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를 따라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곧바로 넓은 홀 같은 공간부터 펼쳐졌다. 일반적인 집들과는 구조가 달랐다. 두 개의 소파 세트와 차를 마시거나 간단히 회의를 할 수도 있는 테이블이 준비된 공간은 호텔 스위트룸의 거실처럼 꾸며져 있었다.
“여긴 접견실이라고, 외부에서 손님들이 오셨을 때 모시는 곳이에요. 그러니까…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들하고는 대강 여기서 뭐, 차도 마시고 하는 거죠.”
우리끼리니까 하는 말이라는 식으로 이해성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집 내부로 들이지 않고도 손님맞이를 할 수 있는, 말 그대로 접견실이 따로 존재한다는 자체가 최홍서에게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여러 VIP들을 상대해 왔어도, 잠깐의 장난감 정도로 취급하는 상대를 자택으로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VIP의 집 내부를 구경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이쪽으로 와요.”
접견실 오른쪽의 문을 여는 그를 따라 들어가자, 그제야 진짜 현관이 나타났다. 그조차도 최홍서가 생각하는 그런 일반적인 현관들과는 규모 자체가 달랐지만.
양쪽으로 여러 개의 방이 보이는 작은 홀을 지나 복도를 빠져나가자, 거실이 나타났다. 소파 테이블 위에는 두 사람을 위한 간단한 다과가 차려져 있었다.
푹신한 소파에 나란히 앉아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자, 이해성은 그제야 새삼스럽게 최홍서의 차림새가 눈에 들어온 것 같았다.
“이렇게 입은 건 처음 보는데, 평소보다 더 애기 같아요.”
“아, 이건… 오늘 부사장님 뵐지 몰라서 편하게 입고 나와 가지고…”
전혀 꾸미지 않은 허술한 차림새에 최홍서는 뒤늦게 민망해졌다.
두꺼운 화보 촬영용 메이크업을 말끔히 지워내고, 오버사이즈의 티셔츠에 헐렁한 청바지, 그리고 후드 집업 차림은 VIP 응대용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명 사장이 알면 난리를 치겠구나, 하는 생각에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귀여운데요, 왜? 나랑 만난다고 괜히 차려입는 것보다 좋잖아요. 직장 상사 만나는 것도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