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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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소의 월세, 생활비, 춤·보컬·연기의 레슨 비용, 의상과 헤어, 하다못해 차 기름값까지… 투자비라는 명목으로 고스란히 최홍서의 이름 아래 차곡차곡 새로운 빚으로 쌓여갔다.

    그 하나하나의 항목이 정말 사실인지를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게다가 그때까지 쌓였던 빚의 이자도 착실히 불어나고 있었다.

    중간중간 접대에 끌려가도, 수수료 명목으로 명 사장이 50%를 떼어가고 나머지 50%는 갚아야 할 이자에서 제해졌다. 최홍서는 그 돈을 만져본 적도 없었다.

    다 폭로하라고. 그냥 같이 죽자고. 포주 노릇을 해온 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반쯤 미쳐서 그렇게 발악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최홍서 본인도 알고 있었다. 사실을 폭로하더라도, 사람들은 연예인으로 활동하면서 이름과 얼굴이 알려진 자신의 과거에만 관심을 가지리라는 걸.

    명 사장도 건드릴 수 없는 거물이 되어 UB를 떠나는 것만 생각하며 이를 물고 버텨왔었다.

    실제로 그런 방식으로 명도훈의 손아귀를 벗어난 선배 배우가 존재하기도 했다. 그래서 더 희망을 버릴 수 없었다. 그 선배가 명도훈에게서 벗어나기까지 상납한 돈의 총합은 아마도 수십 억대였을 것이다. 그래도 진짜 톱스타가 되기만 한다면, 가능성이 있는 돈이었다.

    아직까지 이해성 부사장을 완전히 믿는 건 아니었다.

    완전히 믿는 건 아닌데도… 명도훈이 이해성을 짐승 같은 다른 VIP들과 똑같이 생각하고, 손님에게서 한 푼이라도 더 뜯어내려는 호스트바 마담처럼 구는 것에 화가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해성이 보여줬던 모습, 했던 말들이 만약 전부 진심이라면. 그렇다면 이해성은 스폰서로서가 아니라, 정말 자신을 염려해서 해준 일이었을 텐데.

    최홍서는 매니저를 찾아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구석진 자리를 찾아메신저 앱을 실행하고는 ‘당근판매자님’으로 저장된 이해성과의 대화창을 열었다.

    ‘반품…하라는 말씀이세요?”

    ‘맞아요, 반품.’

    본명이나 부사장님으로 저장하기에는 좀 위험해서, 고민 끝에 결정한 저장명이었다. 아직 이해성 본인은 이 저장명을 모르고 있었지만.

    당근판매자님:좋은 아침

    당근판매자님 : 아직 자고 있으려나?

    당근판매자님:오늘은 어떤 스케줄이에요?

    당근판매자님:난 점심 약속이 있고, 오후에 역삼동으로 출근했다가 일찍 퇴근할 것 같은데 (오전 10:25)

    그와 주고받는 메신저는 어느덧 하루의 당연한 일과가 되어 있었다. 회의나 중요한 업무가 있을 때는 몇 시간씩 연락이 없을 때도 있었지만, 그는 생각보다 자주 연락하는 편이었다. 특히 일어났을 때와 잠들기 전에는 꼭 보고를 했다. 지금 일어났다, 잘 잤냐, 난 이제 자려고 한다, 좋은 꿈 꿔라… 그 외에도 시시콜콜한 서로의 하루 일정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남자 친구가 되기 위한 후보 상태라면서도, 반 이상은 남자 친구 역할을 하고 있었다. 마치 나를 남자 친구로 선택해 주면 이렇게 하겠다는 시범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만약 이게 그의 진짜 모습이라면, 그는 아마 그 누군가에게 자상한 남자 친구였을 것 같았다.

    나:잘 주무셨어요? 저 이제 숙소 나와서 샵으로 이동 중이에요

    나:오늘은 멤버들이랑 인터뷰 두 건 있고, 그 후에는 단독으로 화보 촬영이 있어요 (오전 10:57)

    당근판매자님:오늘도 바쁘겠네. 화보 촬영 기대해도 돼요? (오전 11:35)

    나:어떤 기대요…? (오전 11:47)

    당근판매자님:사진 보내주면 좋겠는데

    당근판매자님 : 금요일에 약속도 없는 아저씨에게 아주 큰 위로가 될 것 같은데

    당근판매자님 : 아, 나 이제 런치 모임에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당근판매자님 : 점심도 꼭 잘 챙겨 먹고 인터뷰 잘해요^^ (오전 11:58)

    나:부사장님도 점심 맛있게 드시고 모임도 잘 하세요 (오후 12:05)

    나 : 〈사진 전송 완료〉

    나:인터뷰 때 기자님이 찍어주신 사진이에요

    나:사복 컨셉이지만 스타일리스트 누나가 다 입혀준 옷이요ㅎㅎ(오후 3:02)

    나:인터뷰 하나 더 끝나고 화보 촬영 가기 전에 저녁 먹으러 가고 있어요

    나: 아직도 모임 중이신가 봐요 (오후 4:34)

    당근판매자님 : 식사 중에 갑자기 얘기가 나와서 평택에 다녀오게 됐는데

    당근판매자님 : 막내라서 거부권이 없었거든요ㅜㅜ

    당근판매자님:어른들만 계신 자리에 따라다니려니까 진땀났어요

    당근판매자님 : 그래도 서울 와서 보니까 홍서 씨 사진도 와있고, 문자도 와있고

    당근판매자님 : 기분 좋은데요?^^

    당근판매자님:인터뷰 때 사진은 보내 달라는 부탁도 안 했는데 먼저 보내주고

    당근판매자님:아이돌 모드일 때 홍서 씨 너무…

    당근판매자님:팬이에요ㅎㅎ (오후 4:42)

    나:평택 벌써 다녀오신 거예요? 점심 안 드시고 간 건 아니죠?(오후 4:45)

    당근판매자님:헬기로^^ (오후 4:46)

    나:헬기도 갖고 계세요?? (오후 4:46)

    당근판매자님:안타깝게도 회사 소유예요

    당근판매자님 : 홍서 씨가 모처럼 뜨거운 관심을 보여줬는데 실

    망시키려니까 마음이 안 좋네

    당근판매자님 :헬기 사야 하나?ㅜㅜ (오후 4:49)

    나: 신기해서 여쭤본 거예요

    나:헬기 안 사셔도 돼요

    나 : 근데 부사장님도 어려워하시는 상대가 있어요? (오후 5:50)

    당근판매자님 : 우리 홍서 씨가 나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지 잘 알 것 같은데요?ㅎㅎ

    당근판매자님:아버지 때부터 아라에 쭉 계셨던 분들이거든요

    당근판매자님 : 당연히 나도 어른들은 어렵죠

    당근판매자님:저녁 먹으러 갔다면서요

    당근판매자님:나랑 더 대화하고 싶은 마음은 잘 알겠지만당근판매자님 : 핸드폰 그만 내려놓고 집중해서 식사해요^^ (오후 6:01)

    나 : 〈사진 전송 완료〉

    나 : 첫 번째 의상 촬영 중이에요

    나:매니저 형한테 찍어 달라고 했어요 (오후7:47)

    당근판매자님:너무 멋있는데요? 거기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

    당근판매자님:나도 오늘 시간 많은데 (오후 7:50)

    나:멋있다고 생각하신 거 정말 맞아요? 거짓말은 싫은데… (오후 7:51)

    당근판매자님 : 미안해요. 거짓말했어요. 실은 너무 귀여워서 혼자 음흉하게 웃고 있는 중ㅎㅎ

    당근판매자님:후드티셔츠 입고 주근깨 메이크업까지 했는데당근판매자님:어떻게 안 귀엽겠어요?

    당근판매자님 : 내 잘못이 아니에요 (오후 7:55)

    나:불공평하니까 부사장님 사진도 보내주세요 (오후 7:55)

    당근판매자님:내 사진이 필요해요? (오후 7:56)

    나 : 필요해서는 아닌데… (오후 7:56)

    당근판매자님:보낼 만한 사진이 있나 찾아볼게요 (오후 7:57)

    당근판매자님:〈사진 전송 완료〉

    당근판매자님 : 홍보실에서 보도 자료용으로 촬영한 건데, 별로인가? (오후 8:12)

    나: 에이… 이런 사진 말구요 (오후 8:13)

    당근판매자님:셀카 같은 거 말하는 거면 해본 적이 없는데…

    당근판매자님:홍서 씨가 정 보고 싶다면

    당근판매자님:아저씨 노력해 볼게요 (오후 8:17)

    오늘 나누었던 시시콜콜한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메시지 상에서 그는 장난도 잘 치고 말투도 생각보다 평범해서 훨씬 친근하게 느껴졌다. 교과서에 나올 것 같은 문어체를 사용해 가며딱딱하고 엄격한 얘기만 할 것 같았는데, 그건 재벌에 대한 편견이었다. 덕분에 최홍서도 점차 그를 ARA 전자의 마스코트가 아닌 실재하는 한 사람의 남자로 인식해가고 있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기 때문인지, 최홍서 역시 메시지로는 훨씬 편하게 얘기할 수 있었다. 그의 장난을 받아치기도 하고, 요구하지 않은 사진을 먼저 보내기도 했다.

    잠들기 전에는 항상 댓글이나 SNS의 반응을 보면서 스트레스를 받곤 했었는데, 요즘엔 그와 하루 동안 나누었던 메신저를 복습하며 키득거리다 잠들 때가 더 많았다.

    이런 게 연애일까.

    혹은, 그와 진짜 연애를 하게 되면 이런 느낌일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왕자님과의 연애를 상상해 보는 두꺼비만큼이나 허황된 생각을…

    “홍서야, 다음 의상으로 갈아입자.”

    “아, 네! 지금 갈게요!”

    말할까 말까, 망설이고만 있었던 내용을 서둘러 적어 넣고는 전송을 클릭했다.

    나 : 혹시 오늘 잠깐이라도 뵐 수 있을까요?

    나:제가 촬영이 11시 이후에나 끝날 것 같긴 한데

    나:그때도 괜찮으시면 만나고 싶어요

    나:답장 보내주시면 쉬는 시간에 확인할게요 (오후 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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