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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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다른 VIP들을 대하는 건 이보다 훨씬 쉬웠다. 애교를 부리거나 아양을 떠는 것까지는 못 해도, 어느 정도 기분을 맞추면서 변죽 좋게 대화를 하는 정도는 가능했다. 그런데 지난번에도, 그리고 지금도, 이해성과 있을 때는 말문이 막힐 때가 많았다.

그가 하는 질문들은 대체로 처음 들어보는 말들이 많아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얼른 떠오르지 않는 것뿐이었다. 게다가 그가 꺼내는 대부분의 화젯거리는 그 자신이 아니라, 최홍서에 관한 것이었다. 이런 VIP는 없었다.

어렵다기보다, 그는 특이했다.

“어떤 대답을 해도 절대로 화를 내거나 불이익을 겪게 하는 일 없을 테니까, 솔직하게 대답하면 돼요.”

“……”

“그렇게 해줄래요?”

최홍서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잘했다고 칭찬해 주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 순간만큼은 그가 무섭지 않았다. 화를 내지도 않을 거고, 불이익을 겪게 하지도 않을 거라는 그의 말이 진심으로 들렸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그가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약간은 비장한 시선으로 이쪽을 응시했다.

“지난번에 그랬었죠? 영화, 잘 부탁드린다고.”

“……”

“영화 투자는 이미 결정됐고, 홍서 씨가 어떤 대답을 들려주든 투자를 번복하는 일은 없어요. 그럼 영화를 인질로 해서 홍서 씨 마음을 얻어보려고 한다는 의혹은 없어진 거잖아요. 그렇죠?”

“아…”

“지난번엔 오해가 있었던 것 같으니까 내 입장을 말로 분명히 할게요.”

입술을 다문 채로 그가 심호흡을 했다. 넥타이를 하지 않고 단추를두 개 정도 풀어둔 셔츠의 칼라 사이로 목의 뿌리가 드러나 있었고, 그가 마른침을 삼키자, 쇄골의 안쪽이 더 깊이 움푹 파였다.

덩달아 최홍서도 긴장이 됐다. 손에 쥐고 있었던 반쯤 먹은 두 번째마카롱을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홍서 씨의 연애 대상에는 남자도 포함될까요?”

“…네?”

듣지 못해서 물은 것이 아니라, 놀라서 튀어나온 반사적 반응이었

다.

“만약 남자는 연애 대상이 아니라면…”

“……”

“어려울 거 각오하고 시작하고 싶어서요.”

경직된 상태에서도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맞추고 있기가 힘들어 우왕좌왕하는 건 최홍서였다. 지난번처럼.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연애 대상.

명 사장에게 돈을 지불하고 이루어지는 접대를 ‘연애’라고 표현하는 VIP들이 없진 않았다. 최홍서를 당황하게 만든 건 이해성이 그 뒤에 덧붙인 말이었다.

만약 최홍서에게 남자는 연애 대상이 아니라면, 어려움을 각오하고시작하고 싶다는 말.

그건, 최홍서의 연애 대상으로 선택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의미였다. 선택권이 최홍서에게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돈이나 다른 대가를 내걸고 갖는 만남에는 불필요한 조건이었다.

“나이도 훨씬 많고, 덩치도 커다란 사람이 자꾸 좋다고 하니까 부담스럽죠?”

반만 남은 마카롱을 내려다보고 있던 최홍서가 고개를 들었다.지금 이게… 나이나 체격의 문제야?

ARA 전자의 이해성이고, 나는… 그냥 ‘레이어드’의 최홍서인데?

“부담스러워도 부담스럽다고 말하기 어려워서 더 부담스러울 거야.”

이해하고도 남는다는 듯, 그는 테이블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부드럽지만 그 안에는 확신을 가진 눈빛으로 다시 최홍서를 바라봤다.

“다섯 번만 만나줄래요?”

구체적인 숫자를 언급하자, 갑자기 이 상황이 현실로 다가왔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기 딱 좋을 만큼 분명 실내는 서늘했는데, 지금은 등줄기에서 땀이 나는 것 같았다.

이해성이 테이블 한쪽에 놓여 있었던 얇은 케이스에서 작은 직사각형의 종이를 하나 꺼냈다.

“여기, 내 사적인 명함이에요.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연락처가 적힌 명함.”

“……”

“다섯 번을 만난 후에도 내가 홍서 씨한테 감동을 주지 못하면… 이걸 택배로 나한테 돌려보내기만 하면 돼요. 어려운 거절의 얘기도 할 필요 없이.”

명함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고 있던 최홍서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손끝에 닿은 종이의 촉감은 약간 도톰하고 매끄러웠다.

“반품…하라는 말씀이세요?”

최홍서의 질문에 그는 풀썩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반품.”

“……”

“그걸 돌려보내면, 그게 홍서 씨 대답이라 생각하고 물러날게요. 물론 영화 투자에는 아무 영향도 없을 겁니다.”

정말일까? 진심일까? 나를 가지고 놀려고 귀찮은 공을 들이고 있는건 아닐까?

차라리 그게 더 말이 되는 얘기처럼 느껴졌었다.

명 사장은 이 사람을 ‘존귀하신 VVVVVIP’라고 했다. 별이 다섯 개도 아니고, 브이가 다섯 개였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어떤 누구보다 거물이라는 의미였다. 그런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상대했던 어떤 누구보다도 자신을 함부로 다룰 수 있었다.

사자나 독수리가 메뚜기나 개구리를 귀하게 대하는 것이 가능한가? 동화 속에서나 벌어질 법한 일 아닌가?

“대신, 다섯 번 만나는 동안만큼은 마음을 열고 날 대해줘요. 편견없이. 방어적으로 굴지 말고.”

“……”

“약속해 줄래요?”

신중하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손바닥을 펼쳐 내밀었다. 정말 자기를 믿는다면, 약속한다면, 증거를 보여달라는 듯이.

길고 시원하게 뻗은 커다란 손바닥 위에 최홍서의 손바닥이 겹쳐졌다.

이해성은 그걸 내려다보면서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웃고 있다는걸 숨기고 싶은 것 같았지만, 넓은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민망하고 창피해져서 손을 거둬들이려고 하자, 그의 손이 가지 못하게 꽉 붙잡았다. 가만히 서로 손바닥을 겹치기만 한 게 아니라, 손을 꽉 잡았다. 첫 번째 접촉이었다.

그의 손이 뜨겁고, 약간은 축축해서, 긴장히 있음을 알았다.

힘을 풀고 테이블 위에 최홍서의 손을 가만히 내려놓은 그는 잠이라도 재우는 것처럼 손등 위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가벼운 헛기침 뒤에 그가 말했다.

“지난번에 홍서 씨가 회사 쪽으로 연락하라고 했었잖아요. 그래서 회사로 연락했거든요, 오늘.”

“아… 네.”

“근데 홍서 씨만 불편하지 않다면, 다음부터는 직접 연락해서 만나도 될까요?”

“……”

“사적인 만남인데 회사를 거치려니까, 어색하고… 민망하기도 하고 그래서.”

회사로 연락하라고 했던 건, 그가 ‘접대’를 원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아마 아이돌의 연애에는 회사의 허락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였던 것 같다.

자신의 손 위를 톡톡 두드리는 그의 긴 손가락을 내려다보던 최홍서는 홀린 듯 대답했다.

“네.”

“……”

“다음부터는 회사 말고, 저한테 연락하시면 돼요.”

그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다행이라는 듯이.

“네.”

강 감독의 응접실에서 무기질의 그림 속 인물 같았던 그는 어느새온기와 표정을 가진 한 사람으로 최홍서에게 인식되고 있었다.

어깨너머로 이 도시 전체를 배경처럼 거느리고 있는 남자. 그런 남자가 최홍서의 손 하나 잡는 것도 조심스러워서, 손가락만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그러다 손끝을 가만히 붙잡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나 이제, 적어도 남자친구 후보인 거죠?”

“……”

“반품 안 되게 잘해야겠다.”

완벽한 얼굴에 떠오르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바라보면서 최홍서는생각했다.

어쩌면 이 사람은 특이한 게 아니라, 특별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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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중순의 여름.

스튜디오에서는 9월 호 잡지를 위한 가을 의상 촬영이 한창이었다.

포근한 색감의 니트와 울 소재의 와이드 팬츠를 착용한 최홍서는촬영 소품인 의자를 활용해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오늘 들어 벌써 다섯 번째 의상이었다.

한여름에 가을옷을 입고 있긴 했지만, 실내 촬영이라 에어컨을 가동할 수 있어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5분마다 땀을 찍어내고 메이크업을 수정해야 하는 야외 촬영에 비하면 이 정도는 호강이었다.

“UB 명 사장님께서 간식 준비해 주셨어요! 잠시만 쉬었다 갈게요.”

오늘 촬영을 책임지고 있는 에디터의 말에 포토그래퍼가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홍서야, 다음 의상 전에 조금 쉬자.”

“수고하셨습니다, 실장님.”

의자에 느슨하게 앉아 포즈를 취하고 있었던 최홍서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꾸벅 허리를 숙였다.

뒤쪽에서 에디터와 얘기를 나누고 있던 명 사장이 곧바로 포토그래퍼에게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누구에게 가장 먼저 인사를 해야 하고, 누구에게 가장 잘 보여야 하는지를 파악하는 건 명 사장의 특기였다.

“실장님, 오랜만에 뵙네요. 저희 홍서 어떤가요? 잘 따라가나요?”

“말해 뭐 하겠어요. 홍서야 이젠 화보 장인이죠. 연기하면서 표정도 더 풍부해지고, 포즈도 항상 다양하게 연구해 와서 같이 일하기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UB 사장님이 모델 출신이시라 그런가?”

“이거 참…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팔불출이라 하실 것 같아서 이런 말씀 드리기 뭐하지만, 이 업계에 홍서만큼 노력하는 애가 정말 드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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