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언제부터 네가 그런 걸 궁금해했어?”
“아니, 방금까지 같이 있었는데도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거든요.”
“뭐라는 거야, 이 새끼. 그럼 거기 사람들 다 있는 데서 투자자하고 주연 배우하고 따로 만난다고 광고라도 해?”
“……”
“회식 후에 스케줄 없으면 잠깐만 시간 내달라고 하시더라. 여기 근처 P 호텔에서 기다리실 거야.”
P 호텔이라면 회식을 가졌던 와인바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의 특급호텔이었다.
“자, 여기 키.”
그의 수행원에게서 미리 받아둔 건지, 명 사장이 카드키를 건넸다.
“너 이쁘게 보셔서 투자 결정하신 걸 테니까 잘해. 바로 잠자리부터 요구하지 않는 분도 간혹 있는 건 알지? 연애 느낌을 내고 싶으신 건지도 모르니까 분위기 잘 맞춰 드려. 기분 거스르지 말고.”
지난번에 이해성이 아무 일도 없이 숙소로 데려다줬던 이유를 명사장은 그렇게 해석하고 있었다.
명 사장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사람이 다 제각각이듯 소위 상류층이라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괴팍하거나, 폭력적이거나, 상대에게 굴욕을 주는 섹스를 즐기지는 않았다. 그런 사람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매우 높기는 했지만.
어쩌면 그는 접대라는 목적지는 같되, 그 과정에서 자신이 상대를 착취하고 있다거나 강제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은 부류일 수도 있었다.
서로가 호감을 느껴 잠자리로까지 이어졌을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기는 했다.
호텔 정문이 아닌 지하 주차장에서 내려, 곧장 엘리베이터로 이동했다. 얼굴을 푹 덮는 버킷햇을 뒤집어쓰고 마스크를 착용한 자신의 모습이 반들거리는 엘리베이터 벽에 비쳐 보였다. 영락없이 밀회를 즐기러 온 연예인의 꼴이었다. 혹은 VIP의 호출에 헐레벌떡 달려온 연예인이거나.
그가 기다리고 있다는 객실은 22층의 복도 끝이었다.
벨을 누르기 전, 최홍서는 심호흡을 했다. 하나, 둘, 셋… 그리고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숫자를 셌다.
이 안에서 어떤 일들이 생기든, 상처받거나 실망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무장했다. 상처나 실망이라니, 자신은 그런 아마추어가 아니었다.
“왔어요?”
직접 문을 열어준 그는 진심으로 반갑다는 듯, 친근하게 웃고 있었다. 회식 자리에서 내내 짓고 있었던, 뉴스 기사 속 사진 같은 그런 웃음이 아니었다. 생김새 자체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친근한 얼굴이 아니긴 했지만.
“꽁꽁 싸매고 왔네요.”
“……”
“그러고 있으니까 진짜 아이돌 같네.”
그의 손이 다가와 모자챙을 살짝 만지고 멀어졌다. 그 손길에 흠칫놀란 최홍서는 주섬주섬 모자를 벗어 끌어내렸다.
“안녕하세요.”
“조금 전에 만났는데 그렇게 인사하니까 이상하네요. 들어와요.”
그가 문을 당겨 더 넓게 열어주었고, 최홍서는 그 안으로 사라졌다.
출입문 바로 옆의 손님용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와 보니, 객실은 멋진 전망의 넓은 거실이 딸린 스위트룸이었다. 예상대로였다.
화려하다 못해 웅장한 도시의 야경이 통창 너머로 펼쳐져 있었다. 재킷을 벗고 셔츠의 소매를 팔꿈치 아래까지 말아 올린 그의 모습은 광고의 한 장면 같았다.
그는 배경으로 펼쳐진 모든 것의 소유주처럼 보였다.
그가 서 있는 거실, 그의 뒤에서 반짝거리는 이 도시까지도.
그가 이 도시의 소유주라는 생각. 어쩌면 과장이 다소 섞이긴 했어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흘렀다.
인기척을 느낀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리 와서 앉아요.”
“네.”
테이블 위에는 여러 종류의 디저트와 커피가 준비되어 있었다. 커피 마시자는 건 그냥 하는 말이고, 차라리 술을 먹이려고 할 줄 알았는데…
“와줘서 고마워요.”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밖에서 만나는 것보단 이게 홍서 씨한테 편할 것 같아서, 그래서 여기서 보자고 했어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저보다는 부사장님께서 더 유명하시죠.”
“기업인이 아무리 유명해 봤자 TV에 나오는 사람만큼은 아니에요. 커피 괜찮죠? 늦은 시간이라 디카페인으로 준비했어요.”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최홍서 몫의 잔에 따뜻한 커피를 따라주었다.
“난 키가 커서 쳐다보는 사람이 대부분이에요. 아무래도 한국에선 좀 지나치게 큰 편이다 보니까.”
키가 커서 쳐다본다고 생각한다는 거, 정말일까? 거울 보면 자기가 잘생긴 거 알 텐데.
“워낙 잘생기셔서 쳐다보는 걸 거예요.”
“……”
최홍서의 잔을 채운 뒤 자신의 잔에도 커피를 따르던 이해성이 손을 멈추고 이쪽을 쳐다보았다. 잘못 들은 게 아닌지 귀를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다른 VIP들에게도 하는 일종의 영업 멘트였고, 보통 그런 말들이 거짓말이었던 것과 달리 이번엔 진심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쳐다보자고백의 말이라도 꺼낸 것처럼 당황스러워졌다.
최홍서는 찻잔을 두 손으로 쥐고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아까 회식할 때도 다들 부사장님 잘 생기셨다고 했었구요.”
“내 앞에서 사람들이 하는 말이 전부 진심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알아요.”
웃으면서 그렇게 말한 그는 하얀 냅킨 위에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커피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아닌데. 진짜 인기 많으신 것 같던데. TV에 나오는 사람들보다 더.”
“혹시 회식 때 얘기하는 거예요?”
최홍서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기댄 채 커피잔을 들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보통 그런 걸 아부라고 하죠.”
본인이 그렇게까지 부정하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아니라고, 정말 잘생겼고, 사람들한테 둘러싸여서 나랑은 제대로 인사조차 못 할 정도로 인기가 많지 않았냐고. 이쪽에서 그렇게 고집을 부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커피잔을 입술로 가져가던 최홍서의 눈썹이 잠시 꿈틀거렸다.
음? 그런데 내가 그게 그렇게까지 불만이었나?
회식 때 이 사람이랑 대화도 제대로 못 한 게?
“과자에는 손을 안 대네요.”
질문에 스스로 답을 생각하기도 전에, 그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예쁘게 차려진 각종 디저트들을 아쉬운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이런 걸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
“아… 검색을 좀 했거든요.”
“저를요?”
“홍서 씨한테 점수 따고 싶어서요. 정보 수집 차원에서.”
생각해 보니, 숙소의 위치까지 알고 있었던 마당에 과자를 좋아한다는 정보쯤이 대수인가 싶었다. 단지, 이해성 같은 사람이 왜 자신에 대해서 사전 조사를 하는 건지, 왜 점수를 따고 싶어 하는 건지, 그 자체가 이해가 안 될 뿐이었다. 갖고 싶다고 말만 하면 가질 수 있는 대상일 텐데.
“뭐, 여하튼, 좋아하는 줄 알고 준비했는데.”
“좋아해요. 좋아하는데… 살이 찌니까 먹고 싶은 만큼 먹진 못해서요. 뭔가 잘한 게 있을 때만 보상 차원에서 먹거든요.”
그는 반소매 아래 드러난 최홍서의 팔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오늘은 괜찮지 않나? 캐스팅 확정됐잖아요.”
“먹으면 찌는 체질이라…”
이해성의 시선이 다시 한번 최홍서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커피잔을 감싼 손목을 응시하는 시선에서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그렇게 말랐는데. 오히려 조금 쪄야 하지 않아요?”
그는 최홍서의 마른 손목을 바라보기만 할 뿐,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다. 그가 긴 팔을 뻗기만 하면 만질 수 있는 거리였고, 그가 만진다 하더라도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 그런데도 그는 바라보기만 했다.
손목을 덥석 잡고 안쪽 살을 멋대로 문질러댔던, 지난주 파티의 주인공과는 전혀 달랐다.
끙끙 앓고 있는 강아지라도 보는 것처럼, 그의 시선에 측은함이 가득해서, 최홍서는 마카롱을 하나 집어 반쯤 베어 물었다. 겉의 과자 부분은 바삭하고, 안쪽 필링은 적당히 쫀득하면서도 부드러운 식감이 황홀했다. 나머지 절반까지 마저 입에 넣고 나자, 그제야 그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과자나 베이커리를 좋아한다고 해도, 이런 고급품을 따지는 성격은 전혀 아니었다. 편의점에서 파는 과자나 빵, 기성품 쿠키로도 충분했다. 가끔 팬들이 선물해 줘서 고급 제과점의 과자도 먹을 기회가 있긴 했는데, 그 차이를 분명히 알 만큼 입맛이 섬세하지는 않았다. 그런 최홍서도 놀라서 눈이 커질 만큼 맛있는 마카롱이었다.
“정말 맛있어요. 부사장님도 드세요.”
“그럴까요?”
녹차 맛으로 보이는 색깔의 마카롱을 선택한 그는 맛을 보는 척 조금 베어 물고 나머지를 앞접시에 내려놓았다.
“오늘 식사 자리에 오실 줄 몰랐어요.”
“그래요?”
“저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라, 다들 놀라신 것 같더라구요.”
“거기 가면 홍서 씨 볼 수 있잖아요. 그럼 가야죠.”
그러면 왜 일주일 동안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을까.
그가 연락만 한다면, 명 사장은 다른 어떤 스케줄보다도 우선해서 최홍서를 그의 앞에 대령시킬 텐데. VIP는 최홍서의 스케줄에 시간을 맞출 필요가 없었다. 지금까지 그런 사람은 없었다.
농담인가? 농담이겠지?
“홍서 씨를 보러 간 거라는 말, 혹시 곤란했어요?”
“아니요. 그럴 리가요.”
“그럼, 기뻤어요?”
“……”
즉시 대답하지 못하자,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약간은 씁쓸하게 웃었다.
“내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하기가 어렵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