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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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오르막길 중턱에서, 남자는 오른쪽으로 꺾어 들었다. 여기서부터는 자동차도 진입할 수 없는 좁은 골목이었다. 그 탓에 이사를 들어올 때는 손수레를 이용해야만 했었다.

저 앞의 골목 끝에서 한 번만 더 왼쪽으로 꺾으면 숙소였다.

말없이 천천히 걷기만 하고 있던 남자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화를 내지 않을까 싶어서, 최홍서는 그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천천히 돌아서서 최홍서를 마주 본 그의 얼굴은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초여름 새벽바람 속에 희미한 꽃향기가 섞여 있었다. 시선을 조금 돌리니, 오렌지색 꽃송이를 풍성하게 매단 나뭇가지가 어느 집 하얀 담장 위에서 골목을 향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무슨 꽃이지? 이 골목에 저런 꽃나무가 있었나… 이곳에서 몇 년의 여름을 보내면서도 알아채지 못했었는데.

“강 감독님 댁에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홍서 씨가 괴롭힘당하는 걸 못 보겠어요.”

꽃나무에 잠시 빼앗겼던 시선을 그에게로 되돌렸다. 그는 이제 약간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화가 나요.

“……”

“내가 그렇게 착한 사람인 것도 아닌데.”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가던 남자가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춰왔다.

.왜 그럴까요?”

질문이 아니었다. 확신에 찬 그의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이미 답을 알고 있지만, 너도 이 질문의 답을 스스로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그런 표정이었다.

대답하지 못하는 최홍서를, 그는 재촉하지 않았다. 좀 더 시간을 두고 바라보다가 웃는 얼굴과 함께 멀어져, 다시 앞장서서 걸을 뿐이었다.

숙소 앞에는 서너 명의 팬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사생팬들의 존재에 대해서도 미리 알고 있었는지, 그는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그보다는 숙소의 열악함에 더 놀란 눈치였다. 드러내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들어가요.”

자주 그렇게 바래다주었던 것처럼, 대문 앞에서 인사하는 그의 얼굴은 편안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이것도 가로등 효과인가…

2층 숙소 현관에서는 골목이 바로 내려다보였다.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동안 돌아보고 싶었지만 왜 그런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용기까지 필요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누구야? 새로 온 매니저인가? 존나 잘생겼는데? - 이해성을 두고 하는 말이 분명한 팬들의 수군거림에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손등으로 입술을 꽉 누르고 얼른 문안으로 들어갔다.

불도 켜지 않고, 신발도 벗지 않고, 한동안 그대로 현관에 기대서있었다. 재벌가의 파티에 불려가서 ‘동반’으로 클럽을 나왔는데, 그게 ‘접대’가 아니었다. 자동차 뒷좌석에 함께 앉아있었는데, 키스는커녕 손도 잡지 않았다. 다음에 보자는 말이 접대를 미루자는 뜻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그것도 확실하지가 않았다.

그럼… 왜 같이 있었던 거지? 대체 왜 같이 나가자고 했던 거야?

딴생각에 푹 빠진 채 기계적으로 씻느라 샤워 시간이 평소보다 배로 오래 걸렸다. 멤버들이 자고 있는 방으로 조용히 들어가, 안쪽 이 침대의 아래층, 자기 자리로 기어들었다.

명 사장에게는 뭐라고 보고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메시지를 대강 찍어 보냈다.

《이해성 부사장이 숙소까지 데려다줬어요. 아무 일도 없긴 했는데, 다음에 다시 보자고 하긴 했습니다. 피곤해서 그만 잘게요.》

메시지를 보내기가 무섭게 전화가 걸려 왔다. 메시지 내용과는 다르게 잠이 올 것 같지 않았지만, 최홍서는 명 사장의 전화를 무시했다.

‘……..왜 그럴까요?’

그렇게 묻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자, 골목에서 맡았던 꽃향기가 후각에 되살아났다. 그러나 곧 깨달았다. 자신이 꽃향기라고 의식했던 그것이 실은 그의 향수 냄새였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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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홍서의 〈크림 맨션> 캐스팅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영화 제작도 확실시되었다. ARA 전자의 이해성 부사장이 거액의 투자를 결정한 것이다.

영화 제작이 결정된 후, 공식 보도 자료를 배포하기도 전에, 가장 먼저 마련된 것은 식사 자리였다.

참석자는 감독과 조감독, 주연 배우 중 서너 명과 제작사 대표, 총괄 PD, 그리고 이해성과 그의 영화 투자 관련 대리인 정도로 추려졌다. 쉽게 말해 영화 제작의 가장 핵심 멤버들이 모여 서로 얼굴을 익히고 인사하는, 비공식적인 첫 회식이었다.

조 사장을 비롯한 공동투자자들도 예닐곱 명 정도 존재하기는 했다. 이해성의 투자액에 비하면 소액이었지만, 그들은 투자 진행 팀에게서 제작 절차를 보고받게 되지만, 그때마다 그들의 참여나 승인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이해성은 투자자들의 대표 격이었다.

아무리 본인이 투자하는 영화더라도, ARA 전자의 이해성이 이런 자리에까지 얼굴을 내밀겠냐고. 모두가 그렇게 예상했었다. 하지만 그는 예상을 깨고 참석 의사를 비췄고, 조금 늦기는 했지만 실제로 참석했다.

회식 장소인 어느 와인바에 그가 도착하기 전까지, 다들 영화 제작이 결정됐다는 사실보다 이해성과의 만남에 더 들떠 있는 분위기였다.

외부와 분리된 개별 룸에 노크 소리가 들릴 때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대화를 멈췄다. 그중에는 최홍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문이 열리고, 이해성이 아닌 바의 직원이 등장하면, 안도감과 실망감이 동시에 들었다. 그만큼 긴장하고 있었고, 그만큼 기대하고 있었다.

영화는 처음이었고, 게다가 거장으로 불리는 강우현 감독의 영화에 주연으로 캐스팅되었기 때문이라고. 최홍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마침내 노크 소리 뒤에 이해성이 등장했을 때, 이전보다 심장이 더 강하게 뛰는 것을 의식할 수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영화 때문에 긴장한 게 아니었나?

회식 중에 몇 번 눈이 마주치기는 했다. 하지만 주연 배우 중 막내인 최홍서가 메인 투자자인 이해성과 대화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할 때,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에게 그의 시선이 좀 더 오래, 좀 더 진하게 머문다고 느낀 정도였다. 그런 것 같다는 추측일 뿐, 착각일 수도 있었다.

기대와 달리 회식은 지루했다.

무엇을 기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연기력 쩌는 배우님들에다, 감독님이야 뭐… 강우현 감독님이니말할 것도 없고! 거기다 우리, 우리 부사장님께서 투자까지 해주신다니. 저는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습니다!”

회식 시간은 2시간 정도로 그다지 긴 편이 아니었는데, 제작사 대표는 그사이 많이 취해 있었다. 이해성을 만났다는 긴장감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오히려 선을 넘게 돼버린 상태였다.

자리가 파할 무렵, 제작사 대표는 이해성의 손을 붙잡고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였다. 이해성은 곤란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제 일생에! 우리 이해성 부사장님과 식사를 하고, 이해성 부사장님께 술잔을 받을 날이 올 줄… 감히 제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에이, 대표님, 왜 그러세요. 부사장님 불편하시겠어요. 자자, 진정좀 하세요.”

총괄 PD가 나서서 제작사 대표를 떼어내려 했지만, 취객의 힘을 당해 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부사장님, 어떻게 이렇게 외모까지 완벽하실 수가 있습니까… 투자자가 배우보다 더 배우 같으십니다. 이번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하시는 건 어떨까요? 그럼 천만 관객은 그냥 돌파할 것 같은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네? 〈크림 맨션〉을 부사장님의 데뷔작으로…!”

그는 이번엔 이해성의 손을 자기 뺨에 비비기까지 했다. 지켜보던 모두가 경악했고, 총괄 PD 외에 두 명이 더 달라붙어 얼른 대표를 이해성에게서 격리시켰다.

그 모든 소란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최홍서는 멀찍이에서 다른 배우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발레파킹 맡긴 차를 기다리며 로비에서 대기하는 동안에도, 눈이 마주치긴 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수행원이 운전하는 그의 세단이 도착하고, 모두가 그를 배웅하기 위해 자동차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몇몇 사람과는 악수를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최홍서에게까지 순서가 돌아오기엔 그는 너무 인기인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이곳에 모인 영화인들에게는 배우들보다 재벌이 더 만나기 힘든, 신기한 상대였으니까. 게다가 외모도… 제작사 대표의 말처럼 배우보다 더 근사했고.

미련 없이 골목을 빠져나가는 그의 세단 뒤꽁무니를 바라보았다.하필 일주일 전, 최홍서를 태웠던 그 차였다. 아니, 정말 내가 탔던 그차가 맞나 싶었다.

재킷을 벗어주고, 함께 남산을 걷고, 그동안의 활동을 칭찬해 주고,그리고, 최홍서가 괴롭힘을 당하면 화가 난다고 말했던… 그때의 그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참석한다는 말에 며칠 전부터 긴장했던 게 바보 같았다.

다행이지, 뭐. 접대 안 해도 되고.

그사이 변덕이 생겨서 나한테 아예 관심이 없어진 거면 더 좋고.

일주일이면 변덕이 생길 만도 한 시간이니까.

최홍서의 자동차에서는 운전을 하기 위한 로드 매니저와 함께 명사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사장님이 기다리고 계셔. 그쪽으로 이동할 거야.”

영화를 위한 첫 번째 회식을 잘 마쳤는지, 그런 걸 묻기도 전에 명사장은 대뜸 그 얘기부터 꺼냈다. 이쪽이 훨씬 중요한 일정이라는 듯이.

“네? 부사장님이요?”

“그래, 너랑 커피 한잔 같이하고 싶다고 연락 주셨더라.”“사장님한테 연락했다구요? 언제요?”

조수석에 앉아있던 명 사장이 스윽 뒤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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