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바쁘긴 한데… 데뷔 후에 이렇게 많이 찾아주신 적이 없었거든요. 아직은 얼떨떨하고 감사한 게 더 커서, 힘든지도 잘 모르겠어요.”
팬츠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천천히 걸으면서, 그가 최홍서를 돌아보았다.
“무대에서의 홍서 씨는 연기할 때의 홍서 씨하고는 또 다른 사람 같았어요.”
최홍서는 놀란 표정을 숨기기 위해 야경이 펼쳐진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려야 했다.
무대 영상까지 찾아본 건가? ARA 전자의 부사장님께서?
“지난번에도 춤추는 모습이야 보긴 했었는데, 그건 누군가의 강요였으니까.”
“……”
“곡 분위기에 따라서 달라지는 표정도 그렇고, 난 잘 모르지만… 춤을 출 때 머리카락이나 손가락 마디 하나까지 전신을 이용하는 느낌이라, 집중해서 보게 되던데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그는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사업상 중요한 의견이라도 주고받듯이.
최홍서는 귓불이 뜨거워졌다. 방송국이나 촬영장에서 스태프들이 건네는 영혼 없는 칭찬에는 익숙해졌어도, 이런 구체적인 칭찬을 들으면 쑥스러웠다. 기쁜 마음과 달리 붙임성 있는 반응을 보이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건방지다는 뒷말을 들을 때도 있었다.
“그러다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또 친근하고, 소탈하고, 귀여워서…”
귀엽다는 말 뒤에 그가 묘한 뜸을 들였기 때문일까? 그 표현은 다소 파격적으로 들렸다. VIP들에게서 자주 듣는 말인데도,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귀엽다’와는 뭔가 달랐다. 최홍서가 쳐다보자, 그는 아주 멋진 미소를 지었다.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웃게 되더라구요.”
예능 프로그램까지 봤다니…
‘최홍서 예능’을 검색하면 상위에 노출되는 몇 개의 유명한 클립이머릿속에 떠올랐다. 시기별로 유행했던 각종 애교와 개인기로 준비했던 섹시 댄스와 코믹 댄스들, 손을 쓰지 않고 젖은 종이를 떼어내기 위해 얼굴을 마구 찌푸렸던 게임 등등…
방송에서는 잘하든 못하든 시키면 절대 빼지 않는 편이었고, 일이라 생각하면 부끄럽지도 않고 못 할 게 없었다. 그런데 지금 곁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이 사람이 봤다고 생각하니 조금 창피했다. 그 누구의앞에서도 자존심을 허물어본 적 없을 것 같은 이런 사람들에게는 비참한 발버둥으로 보일 것 같았다.
“나처럼 재미없는 사람한테는 그런 다채로운 모습이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양손을 주머니에 찌른 그가 최홍서를 돌아보며 웃었다.
이쯤 되면, 판에 박힌 대답만 하는, 애교도 떨 줄 모르는, 더럽게 재미없는 아이돌이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아, 홍서 씨라고 불러도 돼요? 벌써 그렇게 불러버리긴 했지만.”“네, 그럼요.”
“그때 홍서 씨 장점이 성실함이라고 했었죠?”
“……”
“정말 그렇더군요.”
“네?”
“무명 시기가 길어서 홍서 씨 혼자 오랫동안 고군분투한 것 같던데.”
“아…”
영화 투자 때문에 그런 부분까지 조사해야 하나? 하긴, 이번 영화제작비가 정말 어마어마하긴 하니까…
“홍서 씨 혼자 한 일들도 멤버 전원이 나눠서 정산을 받는다고 들었는데. 억울하지 않아요?”
“저희 팀만 그런 게 아니라, 업계 시스템이 다 그래서요. 다른 멤버가 그랬더라도 저도 똑같이 정산을 받았을 거고…”
“난 꽤 탐욕스러워서 그런 불합리함은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 같은데. 팀을 위해 그렇게 몇 년을 혼자 희생한다는 게 대단한 것 같아요.”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거나… 모든 사람이 당신처럼 그런 선택권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니까요.
ARA 전자의 부사장이 한낱 아이돌 따위에게 대단하다니.
비아냥거리는 말인가 싶어서 그를 돌아봤지만, 가로등 불빛을 받은 완벽한 옆얼굴은 진지하기만 했다.
“홍서 씨는 내세울 게 성실함밖에 없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연기도 인상적이었어요.”
“……”
“무엇보다 연기가 시작되니까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더군요. 그건 배우에게 굉장히 중요한 재능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개인적으로.”
보도블록이 끝나는 갈림길에서 걸음을 멈춰 서면서, 그가 점을 찍듯이, 이야기를 종결하듯이 말했다.
그의 세세한 칭찬을 듣는 동안 맥박도 빨라지고 있었다. 영화를 위해서든 뭐든, 그는 그동안의 자신의 활동을 진지하게 모니터링해 준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과정과 결과를 인정해 주고 있었다. 이런 대단한 사람이…
“영화를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최홍서의 말에 그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곧 얼굴 전체로 웃음이 퍼져 나갔다. 미소를 짓는 정도는 봤지만, 저렇게 감추지 못할 정도로 환하게 웃는 얼굴은 처음이었다. 웃으니까 인상이 많이 달라 보였다.
그가 허리를 숙여 최홍서와 눈높이를 맞췄다. 굉장히,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처음이다. 홍서 씨가 먼저 나한테 질문해 준 거.”
“……”
겨우 그것 때문에 저렇게 좋아했던 건가.
즐거워하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마주 보았다.
다시 봐도 상당한 미남이었다. 연예 활동을 하면서 나름대로 많은 미남들을 봐왔지만, 요즘 인기 있는 가늘고 마른 유형의 미남들과는 박력이 전혀 달랐다.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에서도 미남으로 분류될, 그런 얼굴이었다. 단점이나 약점이 조금도 없는 남성적인 완벽한 얼굴은 그 자체로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첫인상은 잘생겼다는 감탄보다는 다가가기 어려울 것 같다는 부담감이 먼저였을 정도로.
그런데, 똑같은 그 얼굴이 지금은 부드럽고 따뜻해 보였다. 가로등 때문인가…
잠시 눈을 맞춘 채 멈춰 있었던 그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맞아요, 좋아해요. 그리고 아마.”
“……”
“더 좋아질 것 같네요.”
그의 어깨 너머에서 빨간색에서 초록색으로, 보행 신호가 바뀌었다.
그대로 도로를 건너 조금 더 가면 H 호텔이었고, 오른쪽으로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가면 ‘레이어드’의 숙소였다. 횡단보도를 건넌 그는자연스럽게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최홍서는 의아한 얼굴로 H 호텔 방향을 돌아보았지만, 그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있었다. 목적지를확실하게 정한 걸음걸이였다.
보도블록의 폭이 훨씬 비좁아졌다. 나란히 걷는 동안 가끔씩 서로의 어깨가 스쳤다. 정확히는 최홍서의 어깨와 그의 팔이 스쳤다. 등 뒤에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그의 옅은 향수 냄새가 코끝에 살랑거리다아쉽게 멀어졌다.
“다음에 시간 내줄 수 있어요?”
“……”
“만나고 싶은데. 오늘처럼 말고. 미리 약속 정하고.”
“다음…에요?”
“홍서 씨가 싫지 않다면 난 그러고 싶어요.”
“아…”
그런 얘기인 건가. 오늘 말고, 다음에.
사정이 있을 수 있었다. 바쁘신 분이니 오늘 당장은 시간이 안 될수도 있었다. 그냥 그뿐인 것이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지저분하게 노는 분위기를 안 좋아한다고 해서, 아이돌 나부랭이에게 재킷을 벗어줬다고 해서, 곧장 호텔로 직행하지 않고 남산을 걸으면서 대화를 좀 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진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다음에 하는 거였구나. 그냥, 오늘이 아니라.
차라리 오늘 그의 모든 행동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영화가 제작될 수 있을지 없을지, 그 열쇠를 쥐고 있는 VVIP가 따로 보자는 제안. 그게 무슨 의미인지, 거기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지최홍서는 지겨울 만큼 잘 알고 있었다.
기대를 갖거나 실망을 하거나 씁쓸해할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난 그렇게 약해빠진 놈이 아니었다.
턱 아래로 고이는 씁쓸한 맛을 삼켜내며, 최홍서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오늘 밤을 통틀어, 가장 확실한 표정으로 그를 똑바로 마주했다.
“저야 영광이죠. 회사 쪽으로 연락 주시길 기다릴게요.”
“아… 회사.”
다.
남자는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며 회사라는 말을 곱씹었
“누굴 만나고 그러려면 회사 허락을 받아야 하죠?”
“나 정도면 홍서 씨 회사에서 합격일까요?”
“당연히…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요?”
남자는 묘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자신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 건지 아닌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최홍서는 불안해졌다.
영업이 끝나 깜깜한 카페가 바로 저 앞 모퉁이였다. 거기서 골목으로 꺾어 올라가면 숙소로 가는 길목이었다. 최홍서는 조금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불러 세웠다.
“영화, 잘 부탁드립니다. 부사장님.”
이쪽을 돌아본 남자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고, 이내 차가워졌다. 그러다 피식거리는 실없는 웃음과 함께 어둠도 차가움도 무너졌다.
“그러니까 홍서 씨는 내가 이번 영화에 투자하느냐 마느냐, 그게 홍서 씨 대답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다는 거죠?”
“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네.”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래턱을 넓게 문지르며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골목 안쪽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올라가면 지금 지내고 있는 숙소죠?”
“아… 네.”
“집에 들어가는 것까지만 보고 갈게요.”
그렇게 말하며 돌아선 그는 어둑한 오르막길을 향해 앞장섰다. 초행길이 아닌 것처럼 헤매지 않고 단번에 길을 찾아갔다. 적어도 지도상으로라도 열심히 공부를 하고 온 사람 같았다.
뭐지? 뭐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거지? 그의 의중을 알 수가 없어서 최홍서는 불안한 기분으로 다리를 움직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