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그렇게 눈치 보지 않아도 괜찮아요. 솔직하게 말해도 화내거나 그러지 않으니까.”
솔직하게 말하라고 해서 진짜 솔직하게 말하면, VIP들은 다 화내던데…
소리 내어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라는 권유가 더부담스러워서 애꿎은 손가락만 쥐어짜는 중에 그가 다시 한번 확인하듯 물어왔다.
“춥죠?”
춥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꼭 최홍서 본인의 입으로 솔직하게 말하도록 하려는 사람 같았다.
“네, 조금…”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자는 팔걸이의 다이얼을 조작해 에어컨온도를 조절했다. 그리고 입고 있던 재킷을 벗기 시작했다. 클럽에서열린 사적인 파티라는 T.P.O.에 걸맞게, 남자는 슈트가 아닌 캐주얼을착용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경박스러운 차림은 아니었다.
칼라가 달린 머스터드 색의 지퍼형 재킷을 벗자, 안에는 우아한 보트넥의 아이보리색 여름용 니트를 입고 있었다.
니트는 슈트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몸매를 드러냈다. 넓고 두툼한 어깨 끝의 불룩한 삼각근과 그 아래 상완근으로 이어지는 탄탄한 굴곡이 적나라했다. 지난번 강 감독의 자택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몸이커다래 보였다.
바쁠 텐데 운동도 열심히 하는구나… 하긴, 조 사장 같은 사람도 나이에 비해 외모만큼은 그럴듯하니까.
“이거라도 덮고 있어요.”
뜻밖에도 남자는 벗은 재킷을 건넸고, 최홍서는 반사적으로 두 손을 내저으며 사양했다.
“아, 아닙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그 정도로 추운 건 아닌… 데…”
하지만 남자는 반으로 접은 재킷을 최홍서의 무릎 위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조금 뻔한 수작이긴 하죠? 그래도 잠시만 덮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여러 번 거절하는 것도 VIP에게 예의가 아니었다. 보드라운 촉감의 가벼운 재킷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뒤로 걸치는 대신 담요처럼 앞쪽 어깨와 가슴을 덮었다. 옷이 덜 구겨질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 얇은 재킷이었는데도 그 안에 팔을 숨기자 즉시 한기가 가셨다.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는 남자를 향해 감사하다고,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그의 친절에, 이상하게도 명 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재력가와 권력층들 중에는 대놓고 노는 놈과 숨어서 노는 놈이 있을 뿐이라며. 밖으로 새는 소문이 없는 놈들이 더 더럽게 노는 법이라던…
‘아마 저거, 이서경 못지않은 상변태 새끼일 거다.‘라고 했던 확신에 찬 얼굴과 함께.
불행하게도, 최홍서가 지금까지 겪어본 사람들도 대체로 그랬다.
돈이나 다른 대가를 지불한 상대와의 섹스에서 그들은 배려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았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 존중하거나 친절하게 구는 것이 오히려 더 부자연스럽고 웃긴 짓이라는 듯, 때로는 변태적이고 때로는 폭력적이기도 한 비일상적 행위들이 아무 양해나 경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퍼부어졌었다.
이 사람도 그럴까?
이렇게 품위 있어 보이는 사람도 문을 닫고 단둘이 되면 다짜고짜따귀를 때리거나 치마를 입히려고 하거나 고깃덩이 취급을 할까.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이기는 해도, 그래도 지금까지는 꽤 매너가 좋은 편인데.
예상해 보려고 해봤자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동안 최홍서가 깨우치게 된 점이 있다면, 사람들, 특히 돈이나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평소의 모습으로는 침대 위 취향을 절대, 절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몸을 덮은 재킷에서 은은하게 좋은 향기가 피어올랐다. 흔치 않아서 한 번 더 맡게 되지만, 요란스럽게 독특한 향은 아니었다. 편안함을 베이스로 하면서도 흥미를 유발하는 약간의 독특한 개성을 가미한… 남성적이고 섹시한 향기였다.
기억에 오래 남을 듯한 그 향기에 이끌려 최홍서는 고개를 좀 더 깊이 숙였다.
이 남자가 어떤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지금은 그저, 이 향기의 낯선 매혹과 그의 자그마한 친절에 한숨 돌리면 그만이었다.
자동차는 어느덧 도산대로를 빠져나와 한남대교로 진입하고 있었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빛을 뿜는 야경은 언제나와 같았다. 그 안에 뒤엉킨 온갖 추악한 욕망들을 뒤덮는 불빛은 크리스마스트리의 전구 장식처럼 예쁘기만 했다. 그래서 최홍서는 이 야경을 볼 때마다 아름답다기보다는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 많이 힘들겠어요.”
다시 또 한참 만에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야경을 바라보던 최홍서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아까 같은 그런 사람들 때문에.”
“아닙니다. 안 힘든 일이 없으니까요… 괜찮습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낮게 웃었다. 왜 웃는지 알 수 없어서 가만히 그를 보고 있었다.
“왠지, 어린아이가 어른 흉내를 내는… 그런 말처럼 들려서요.”
어른 흉내를 내는 아이 같다니. 제가 비록 부사장님보다 나이는 어려도, 나름대로는 산전수전 겪어보지 않았을까요? 지금도 부사장님께 ‘접대’를 하러 가고 있잖아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처럼 대하시는 건 좀…
그러나 물론 이 역시도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최홍서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남자는 이야기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런데 늘 그렇게 혼자 남습니까?”
“네?”
“다른 멤버들은 빠지고, 최홍서 씨 혼자?”
“아…”
다른 멤버들은 명 사장에게 약점이 잡혀 있지도 않고, 저만 남은 자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니까요.
“최홍서 씨보다 어리다고 해도 팀에서 제일 막내인 멤버가 스물세 살이던데. 그럼 그렇게 큰 나이 차이도 아니잖아요.”
“……”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다시 마주 보았다. 강 감독 자택에서 봤을 때만 해도 남자는 처음엔 자신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랬던 사람이 지금은 ‘레이어드’ 막내의 나이까지 알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라는 표정이 최홍서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러나 감히 직접 물어볼 수는 없었다.
“동생들은 그런 일에 익숙하지 않아서요. 불러주신 자리에서 괜히 분위기 망치면 안 되니까…”
남자의 표정이 조금 심각해졌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실은, 조금 전 같은 그런 자리는 좋아하지 않아요.”
“……”
“사교적으로도 사업적으로도 척지고 지낼 수는 없는 사람들이라 최소한의 관계를 유지하긴 하지만, 사생활을 보내는 방법은 정말 안 맞거든요.”
“네…”
남자는 무언가를 굉장히 기대하는 얼굴로 최홍서를 빤히 보았다. 하지만 어떤 말을 기대하는 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의 표정에서 점차 기대감이 옅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실망한 것 같지는 않았고, 이번에는 큰 결심이라도 한 사람처럼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높은 콧대가 시작되는 미간에 주름이 잡혔고, 진중한 인상을 주는 한 일 자의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 거지?
그의 상체가 최홍서 쪽으로 좀 더 기울어졌다. 선이 얇지 않은, 고전적 미남형에 가까운 잘생긴 얼굴이 거리를 좁혀왔다.
“오늘은 최홍서 씨가 게스트라고 해서 갔던 거예요.”
“……”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어떤 반응을 기대하는 것 같은데 머릿속에는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평소 그런 자리를 별로 안 좋아하시는데 저를 만나려고 일부러 와 주신 거예요? 너무 기뻐요, 부사장님.
그런… 반응이라도 기대하는 건가?
접대에는 프로가 됐어도 최홍서는 살랑거리며 아양 떠는 데에는 영소질이 없는 부류였다. 하지만 VVIP가 기대감에 찬 얼굴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으니 무슨 말이라도 해야만 했다.
“아… 음…”
“……”
“감사합니다.”
심각했던 그의 표정이 한순간 허물어졌다. 최홍서의 입술만 뚫어지게 보고 있던 시선을 내리깔면서 그는 조금 웃었을 뿐,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압박감이 느껴질 정도의 결점 없는 근사한 얼굴이 원래의 자리로 멀어져 갔다.
그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남산을 오른쪽으로 끼고 소월로로 들어선 자동차는 H 호텔 앞에서 신호 대기 중이었다. 접대 장소는 H 호텔이 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 그가 최홍서를 돌아보았다.
“우리, 내려서 조금 걷지 않을래요?”
부드럽게 권유하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강압적으로 물었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
자정이 지난 남산은 인적이 드물었다. 주말 이 시간에 굳이 일부러 이런 곳을 찾아와 걸으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꽤 시원하죠?”
“네.”
난간을 오른쪽에 두고 보도블록 위를 나란히, 천천히 걸었다. 산을 끼고 있어서 그런지 그의 말대로 제법 시원했다.
통행량도 많지 않아서, 그의 세단은 비상등을 켠 채 10미터쯤 거리를 두고 천천히 뒤따라오고 있었다.
산을 타고 가벼운 미풍이 불어왔고, 맑은 공기 속에서 불빛들은 여느 때보다 선명하게 반짝거렸다. 난간 아래 내리막길을 따라 비교적 낮은 건물들이 포진해 있었고, 조금 먼 거리에서 고층 빌딩들이 마천루를 만들었다. 시야가 맑아 여의도까지도 내다보였다.
“요즘 인기가 많다고 들었어요.”
“아닙니다. 이제 막 알아봐 주시는 분들이 계신 정도예요.”“솔로 활동 끝나자마자 팀 활동이 시작돼서 쉴 틈도 없었겠어요.”의외의 연속이었다. 그는 ‘레이어드’ 막내의 나이만 알고 있는 게아니었다.
아… 영화 때문이겠구나. 내가 주연을 맡을 확률이 높으니까, 조사를 했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연결 지으니 납득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