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 (23/185)

23.

목소리의 주인은 VVIP였다. 그는 상체를 앞으로 숙여 무릎 위에 두팔꿈치를 괸 채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온더록스 잔을 양쪽으로 감싸고 있는 커다란 두 손에 강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는 조금 큰 목소리를 냈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약간 격양된 것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강 감독의 자택에서 전혀 큰소리를 내지 않았던차분한 모습과는 차이가 있었다.

오늘의 주인공이 최홍서의 목덜미에서 얼굴을 떼어냈다. 그리고 불쾌하기는커녕 아주 흥미롭다는 듯, 상석의 남자를 향해 싱글거렸다.

“우리 부사장님,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래?”

“참석하면 우선권 준다며.”

“그랬지. 진짜 올 줄은 몰랐지만.”

“이쪽으로 보내줘.”

청유형 문장의 형식을 띠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으로 보나 어조로보나 그것은 여지를 두지 않는 명령에 가까웠다.

침 발라놓은 먹잇감을 건네줘야 하는데도, 오늘의 주인공은 순순히, 기꺼이 물러났다. 심지어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긴 샴페인 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고는 최홍서에게만 들리게끔 작은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원래 이런 자리에는 안 오는 분이시거든. 웬일로 네가 마음에 들었나 본데… 나한테도 중요한 손님이니까 잘 좀 모셔줘. 서비스 잘해주면 명 사장 통해서 팁은 두둑이 보낼 테니까.”

최홍서를 통해 ARA 전자 부사장에게 잘 보일 기회를 잡았기 때문에. 그래서 불만이 있기는커녕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였던 것이다.

최홍서는 주춤주춤 일어나 안쪽으로 이동했다. 등 뒤에서 오늘의 주인공이 농담조로 외쳐댔다.

“나 같은 아저씨가 아니라 저런 미남이 놀아주는 거잖아. 우리 리더님은 좋겠네!”

테이블의 다른 사람들이 요란하게 웃어댔다. 그게 뭐가 그렇게 웃긴 얘기라고… 다들 ARA 전자 부사장의 비위를 맞추려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런 자리에서 누구를 중심으로 분위기가 흘러가는지, 누가 이 자리의 진짜 VVIP인지, 그런 힘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에는 최홍서도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다.

“안녕하세요. 최홍서입니다.”

“네, 이쪽으로 앉아요.”

꾸벅 허리를 숙이자, 남자는 앞으로 기울이고 있던 상체를 바로 세우며 옆자리를 가리켰다. 하지만 최홍서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는 않았다.

“감사합니다.”

“뭘 좀 마셔야죠. 어떤 걸로 할까요?”

태블릿에 띄워진 메뉴를 최홍서 쪽으로 건네면서도 남자의 시선은 액정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전 그냥 같은 걸로 주시면…”

“술이 부담스러우면 다른 음료도 많은데.”

“괜찮습니다. 부사장님과 같은 걸로 마시겠습니다.”

“……”

그제야 남자의 시선이 천천히 최홍서를 돌아보았다. 새삼스럽지만 굉장히 거리가 가까웠다. 조금만 움직이면 어깨가 스칠 정도였으니까.

가까이에서 마주한 남자의 눈동자는 역시나 아주 깊고 차분했다. 웬만한 풍파에는 끄떡도 없을 것 같았다.

최홍서는 그게 부러웠다. ARA 전자의 부사장. 이후에는 ARA 그룹의 회장이 될 사람. 한서 그룹 창업주의 손자. 그런 사람이 대체 어떤 풍파가 두렵겠는가. 어떤 누가 감히 그런 사람을 흔들 수 있겠는가.

부사장님이라고 부른 게 뭔가 심기를 거스른 건가 싶을 만큼.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때는 그렇게 안 불렀었잖아요.”

“……”

“우리 구면인데. 혹시 나 기억해요?”

“그럼요. 강 감독님 댁에서…”

“그땐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았는데.”

“죄송합니다. 미리 숙지했어야 하는 건데…”

최홍서는 머리를 숙이며 사과했고, 태블릿으로 다시 눈을 돌린 남자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음… 최홍서를 책망해서가 아니라, 난처해 보이는 신음 같았다.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니까… 미안해하지 마요.”

그는 결국 자신이 마시던 것과 같은 술을 주문해 주었고, 한동안 두 사람은 별다른 대화도 없이 그저 멀뚱히 앉아있었다. 중간중간 술을 마실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테이블 이곳저곳에서는 지저분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서로 뒤엉켜 더듬고 빨아대는 난잡함은 이런 파티의 뻔한 결말이었다.

눈앞에서 뒹구는 몇 쌍의 커플을 바라보던 남자가 최홍서에게로 눈을 돌렸다. 잠시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다, 가까이로 몸을 기울였다. 음악 소리가 시끄러운 탓이었다.

“여기서 나가지 않을래요?”

“……”

계획과는 다른 진행이었다.

‘레이어드’와 최홍서를 부른 대가로 돈을 치른 것은 오늘의 주인공이었고, 이 클럽에서 누군가와 함께 나간다면 그건 당연히 오늘의 주인공이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잘 좀 모셔달라던, 서비스를 잘해주면 팁을 두둑이 보내겠다던, 오늘의 주인공이 한 말도 결국은 그런 뜻이었다.

접대.

그래, 이 남자도 결국은 접대인 거구나.

“혹시 여기 더 있고 싶은 건…”

“그건 아닙니다.”

“저쪽은 신경 쓰지 마요. 불쾌해하지 않을 테니까.”

ARA 전자의 부사장이 말하는 ‘저쪽’이란 오늘의 주인공이었다. 최홍서는 그가 부른 게스트였음에도, 부사장은 신경 쓰지 말라며 확신하고 있었다. VVIP답다는 생각에 최홍서는 고개를 숙인 채 아주 짧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저희 사장님한테 말씀 좀 드리고 오겠습니다.”

핸드폰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켜보고 있던 클럽의 직원이 곧바로 다가와 필요한 것을 물었고, 통화할 장소가 필요하다는 말에 직원은 개별적으로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안내해 주었다.

접대를 한다는 사실은 똑같더라도, 변경 사항은 일단 명 사장에게 보고해야만 했다.

[뭐? 부사장님이??]

이해성 부사장과 함께 나가게 됐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명 사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분이 투자만 결정하시면 영화 제작은 걱정할 필요도 없어. 바로 크랭크인 들어가는 거야! 두 명, 세 명 투자자 더 찾을 필요도 없다고.]

지난번만 해도 이 새끼, 저 새끼, 미친놈이었던 호칭은 어느새 ‘부사장님’과 ‘그분’으로 바뀌어 있었다.

[네가 취향이 아닌 줄 알았더니, 뭐야, 그 반대였나 봐? 미친… 이게 웬 대어냐, 홍서야! 이해성이라니, 이해성이라니! 조 사장 같은 거하고 비교가 안 되는 급이지.]

입이 귀에 걸린 명 사장의 얼굴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명 사장 말이 맞다. 이왕 접대를 해야 한다면, 조 사장보다는 이쪽이 훨씬 효율 높은 상대였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배신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접대부 취급하는 조 사장한테서 한 번 구해줬다고, 그 사람은 뭔가다를 거라고 생각하기라도 한 건가? 섹시 댄스가 아니라 연기를 보자고 했다고, 그 사람이 너를 진짜 배우 대접이라도 할 거라 생각한 거냐고.

이 밑바닥을 그렇게 개처럼 기며 살아놓고도… 최홍서 참 존나 쉽다.

[영화가 제작에 들어갈 수 있냐 없냐! 그게 지금 너한테 다 달린 거야. 아이씨, 옷을 다른 걸 입힐 걸 그랬네. 얼마 전에 협찬 들어왔던 명품 옷, 그걸 입힐 걸 그랬어.]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명 사장의 말이 옳았다.

윗대가리들 중에는 대놓고 노는 놈과 숨어서 노는 놈이 있을 뿐이었다. 그동안 점잖은 체하는 놈도 만나봤었다. 그리고 점잖은 놈이라고해도 별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바로 취할 수 있는 쾌락이있는데, 그걸 굳이 마다할 인간은 없었다. 그것이 권력이든, 돈이든,잠깐의 육체적 만족이든 다 마찬가지였다.

준비된 소파에 앉지도 못한 채 좁은 휴게실 안을 서성거리며 통화를 하고 있던 최홍서는 벽에 매달린 거울 앞에 멈춰 섰다.

[진짜 잘해야 된다, 최홍서. 네가 여태까지 모셔본 어떤 누구보다존귀하신, 그야말로 VVVVVIP라고!]

“이서경 전무보다요?”

[씨발, 어디다가 비비냐? 그걸 말이라고 해? 이서경 그 새낀 핏줄만로열이지 능력이 없잖아! 이쪽은 ARA 그룹을 통째로 가져가실 분이라고!]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최홍서는 거의 다 지워져 버린입술 메이크업을 깨끗이 닦아내다.

“잘할게요, 걱정 마세요. 저도 이번 영화, 꼭 들어가고 싶거든요.”

통화를 끝내고 거울 앞에서 돌아섰다.

실망할 것도, 배신당한 기분을 느낄 것도 없었다.

그저 접대의 상대가 바뀐 것뿐이었다.

@

남자의 세단은 토요일 깊은 밤의 강남 거리를 천천히 빠져나갔다.

창밖으로 흘러가는 세상은 얄팍한 쾌락에 취해 흥청거리는데, 음소거한 화면을 바라보는 것처럼 자동차 실내는 고요하기만 했다. 달리고있다는 진동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비싼 차는 다르긴다르구나.

비행기의 퍼스트클래스 좌석이나 최고급 사양의 마사지 체어를연상시키는 뒷좌석에 앉아, 최홍서는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으신 분이 벌써 몇 분째 아무 말이 없어서,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온도가 너무 낮지 않아요?”

한참 만에 그가 꺼낸 말은 예상 밖이었다.

“괜찮습니다.”

“팔에… 소름 돋은 것 같은데.”

남자가 최홍서의 팔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최홍서도 그의시선을 따라 제 팔을 내려다보았다. 반소매 무대 의상 아래로 드러난팔에 오소소 소름이 서 있었다. 사실은 쌀쌀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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