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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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남자가 손목 안쪽을 엄지로 비비면서 말했다.

“너무 말라서 걱정된다.”

“……”

“말이 좀 없는 편이신가?”

“아닙니다, 그렇지는…”

“괜찮아요. 나 튕기는 거 안 싫어해요. 무대 기대할게요. 내려와서 같이 재밌게 놀아요.”

구토를 유발한다는 점에서, 남자의 웃음은 오물 위에서 꿈틀거리는 구더기 같았다.

무대 뒤 대기실로 이동한 후에도, 남자가 만졌던 손목에 꺼림칙한 촉감이 남아있었다.

“최홍서, 요즘 접대가 좀 뜸하니 정체성에 혼란이 오지, 지금? 아까고객한테 그게 무슨 태도야? 정신 안 차릴래? 네가 뭐 진짜 왕자라도 되는 줄 알아?”

다른 멤버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바짝 다가온 명 사장은 거의 귓속말로 흘러댔다.

“못 들으셨어요? 그런 거 좋아한다잖아요. 뭐가 문제예요.”

“이게 진짜 뭘 잘못 처먹었나. 요새 계속 말대꾸네. 그렇게 계속 성질 건드려라? 어?”

겁을 주는 명 사장을 뒤로하고 무대에 올랐다. 무대를 잘해야 한다는 긴장감조차 느껴지지 않아서, 심호흡을 하며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는 루틴조차 필요하지가 않았다. 어차피 저 아래에 있는 인간들 중 이 무대에 관심 있는 사람이 누가 있…

조명이 꺼진 어두운 무대 위에서 멤버들과 대형을 맞추고 고개를 들었을 때.

정면에 있던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가진 인력이 최홍서의 시선을 끌어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단번에 서로 눈이 맞았다.

강우현 감독의 응접실에서 봤던 상석의 남자. VVIP였다.

파티의 주인공이 다른 지인들과 함께 앉아있는 중앙 테이블에 그남자도 동석해 있었다. 언제 온 거지? 인사하러 들렀을 때만 해도 없었는데…

갑작스럽게 긴장이 전신을 확 조여왔다. 손가락을 접으며 숫자를세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시간은 그 정도로 남아있지 않았다. 전주가시작되고, 조명이 켜졌다.

결국 두 번이나 실수를 했다.

멤버 중 누구보다 실력이 좋으면서도 누구보다 연습을 많이 하는최홍서에게는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 어두워지고, 무대를내려갈 때는 최악의 기분이었다.

긴장이 안 된다고 루틴을 무시해서 그래. 하던 대로 했어야 돼.

“홍서 너 인마, 두 번이나 실수했어.”

그렇지 않아도 자책하고 있던 최홍서에게 명 사장이 다가와 불을질렀다.

“알아요.”

“이런 무대라고 방심했어? 여기 계신 분들이 어떤 분들인데. 어떻게 보면 음악 방송보다 더 중요한 자리인 거 몰라?”

“죄송해요. 조금… 집중이 안 됐어요.”

실수 자체가 충격적이고, 스스로에게 실망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하지만 그보다 더 화가 나는 건, 그 남자가 보는 앞에서 최고의 역량을발휘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그 남자는 강 감독의 응접실에서 ‘연기’를 보고 싶다고 했었다.

섹시한 춤이나, 분위기를 띄울 노래, 애교나 다른 개인기 따위가 아니라, 연기를 요청했었다.

덕분에 최홍서는 그곳에서 접대부 취급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한사람의 배우로서, 투자 유치를 위해 연기를 보여주고 온 자리로 끝날수 있었다.

그래서, 그 기억 때문에… 그 남자를 발견한 순간, 무대를 제대로하고 싶었다.

그런데 오히려 평소 실력만큼도 보여주지 못한 것이다. 명 사장이 일부러 속을 긁지 않아도 충분히 속상하고 충분히 화가 났다.

“뭐, 무대야 이미 끝난 일이니, 됐고.”

명 사장이 혀를 차면서 최홍서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이 준비했다는 선물에 멤버들이 정신이 팔린 사이, 귓속말로 말했다.

“밖에 나가서 잘하자? 왕자는 네가 아니야. 저기 앉아계신 분이 왕자지. 우리 착각하지 말자, 홍서야? 어?”

명 사장의 팔 아래에서 빠져나가 거울 앞에서 땀을 닦아냈다. 메이크업이 지워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거울 속에서 명 사장이 매서운 눈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왕자는 네가 아니라니, 그걸 굳이 상기시켜줄 필요가 있나?

웃긴 소리였다. 내가 나를 왕자라고, 그 비슷한 생각조차도 해본 적이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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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인공은 그사이 더 취해 있었다. 친히 자리에서 일어나 ‘레이어드’를 반겨주는 그에게서 강한 술 냄새가 풍겼다.

“공연 잘 봤어요. 와, 다들 실력이 대단하던데요? 특히… 골반 돌리는 실력이…”

‘레이어드’의 안무를 형편없이 흉내 내던 남자는 마지막에는 웃음을 터뜨렸다.

“자, 수고했으니까 한 잔씩 받아야죠!”

멤버들의 손에 술잔을 하나씩 쥐여준 남자는 취한 탓에 양을 조절하지 못했다. 모든 잔에 술이 흘러넘쳤다.

“저도 상무님께 한 잔 드리겠습니다.”

최홍서가 앞으로 나서서 남자가 손에 쥔 술병을 받아들었다. 남자의 불그스름한 시선이 가까이 다가온 최홍서의 옆얼굴을 노골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럴래요? 얼굴도 예쁜 친구가 하는 짓도 예쁘네.”

남자는 허리를 깊이 숙여, 술을 따라주는 최홍서의 얼굴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입술이 귀에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최홍서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다른 데도 다 예쁜지 막 궁금해질 거 같다.”

상석의 남자는 좀 더 안쪽에 앉아있었다. 최홍서는 되도록 그쪽을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한순간이나마 당당히 배우로서 연기를 선보였던 사람 앞에서 노리개 취급을 당하는 이 상황은 굴욕적이었지만, 굴욕과 굴욕의 감내는 최홍서에게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상이었다.

그래, 저 남자가 보고 있다고 해서 더 굴욕스러울 것도 없었다.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일렬로 선 채 ‘레이어드’는 따라주는 술을 두세 잔씩이나 마셔야 했다. 그 후에는 명 사장이 곤란한 얼굴로 이제 그만 가봐야 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렸다.

“벌써 그렇게 됐나? 근데 한 명은 남아야 되는데. 우리 그렇게 계약했잖아요, 사장님.”

“괜찮으시다면 제가 남겠습니다.”

최홍서의 발언에 주인공은 다짜고짜 최홍서의 손을 잡아끌었다. 옆자리에 앉힌 최홍서의 어깨에 턱을 얹고 싱글거렸다.

“왜요? 왜 남고 싶은데? 우리 아이돌 씨도 나한테 관심이 좀 생겼나?”

관심은 개뿔. 애초에 최홍서가 남아 술 시중을 들기로 미리 계약된 내용이었다. 누가 남을 건지 흥정을 보는 척하는 것도 짜고 치는 고스톱에 불과했다.

“아무래도 동생들은… 술도 잘 못해서. 제가 리더이기도 하니까 제가 남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그쪽이 리더구나. 나이가 제일 많아서 리더인가? 생긴건 완전 애기 같은데.”

최홍서의 턱을 감싸 자기를 보게 만든 남자는, 명 사장을 향해 다른 한 손을 성의 없이 휘휘 저어 보였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명 사장은 나머지 멤버들을 데리고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늘 일어나는, 특별할 것도 없는 수순이었다.

턱을 놔준 남자의 손이 이번엔 입술을 훑었다. 제 입술이라도 되는 것처럼 손길에는 거침이 없었다.

“조금 늦게 데뷔한 편이라… 생각보다는 나이가 많습니다.”

“어이구, 그래쪄요? 우리 리더님, 나이가 많아쪄요? 몇 살? 스물둘?”

입술을 만지던 손으로 뺨을 꼬집으며 남자가 크게 웃었다.

“스물일곱 살입니다.”

“거짓말.”

남자는 이번엔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상체를 뒤로 물렸다. 그러고는 곧 더 바짝 다가와 최홍서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고 속삭였다.

“신분증 보여줘요. 그럼 믿을게.”

“지갑은… 차에 두고 다녀서.”

“뭐야… 지금 차에 같이 가자고 나 꼬시는 건가?”

남자의 팔이 허리를 감아왔다. 같은 테이블에 있는 모두가 이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그 누구도 저지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자기 나이의 절반 정도밖에 안 돼 보이는 남녀 파트너를 끼고 재미를 보고 있으니, 이쪽으로 신경 쓸 여유가 없을 만도 했다.

안쪽에 앉은 ‘상석의 남자’만이 파트너 없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오늘의 주인공에게 가려져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다지 즐거워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하긴, 지난번에도 그랬었지…

“우리 리더님이 분위기를 잘 맞추네. 애기 같은 얼굴로 은근 놀았던 건가? 까져 보여서 그게 더 꼴려.”

허리를 감은 손이 옷 위로 옆구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무대 의상 속으로 파고들려고 꼼지락댔다. 역겨움을 참느라 최홍서의 고개가 수그러졌고, 숙인 고개 아래서 턱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근데 말투 그렇게 딱딱하게 할 거 없어. 이제 더 친해질 사이인데 거리감 느껴지잖아. 혹시 긴장했어?”

“너무… 대단하신 분들 앞이라서요…”

“어? 긴장한 것도 좋은데, 귀엽기까지 한 거야? 나 그럼 진짜 못 참는데.”

귓속말을 지껄이던 남자의 얼굴이 더 깊은 곳으로 미끄러진다 싶더니, 최홍서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피부의 냄새를 맡고, 입술을 비비는 끔찍함에 최홍서는 치과 의자 위에 앉기라도 한 것처럼 허벅지의 바지를 꽉 움켰다.

“최홍서 씨, 이쪽으로 와서 앉죠.”

“……”

최홍서를 찾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남자의 움직임이 흠칫 멈췄다. 목소리의 주인은 VVIP였다. 그는 상체를 앞으로 숙여 무릎 위에 두 팔꿈치를 괸 채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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