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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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아까 그분, 누구예요?”

“누구? 오늘 일 망친 그 새끼?”

최홍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ARA 전자 부사장. 한서 그룹 창업주 장손.”

“아…”

“넌 진짜 이 바닥 기웃거리는 놈들이 아니면, 재벌도 모르는구나?”

명 사장은 무시하듯 말했지만 최홍서는 흘려들었다.

ARA 전자… 한서 그룹…

화류계에 얼굴을 내미는 사람이 아니면 재벌이라고 해도 관심이 없는 건 맞다. 하지만 그런 최홍서라도 ARA 전자나 한서 그룹 같은 이름들을 모르지는 않았다. 최홍서도 대한민국 사람이었으니까. 그 정도면저 응접실 안에서 최상위 계급,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어쩐지… 웬만한 재벌들 앞에서도 기고만장한 조 사장이 성질을 죽인다 싶더니… 진짜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창업주가 죽으면서 그룹 회장이 된 게 장남이 아니라 차남이었거든. 이우열이라고. 그 이우열이 아까 그 새끼의 작은 아버지.”

“……”

“더 쉽게 말해줘? 이서경 사촌이라고, 저 새끼가.”

명 사장은 손가락으로 위층을 가리키면서 인상을 썼다. 부모의 원수라도 얘기하듯 험악한 표정이었다.

이서경이라는 이름에 최홍서의 눈 밑이 짧게 경련했다.

한서 그룹 오너 패밀리의 차남. 녹스 호텔 상해 지점을 맡고 있는 한서 그룹의 골칫거리. 이서경.

“차남인 이우열이 호텔, 유통, 건축 같은 알짜 기업들 다 가져가고, 장남이었던 이해성 아버지는 전자, 금융, 보험… 뭐 그런 걸 가져가게 됐는데, 그때만 해도 한서 그룹 안에서는 비교적 덜 중요했던 기업들이지. 그걸 이렇게 ARA 그룹으로 키워낸 게 아까 그 새끼랑 그 아버지예요.”

한서 그룹과 ARA 그룹이 곧 계열 분리 절차를 마무리 지을 거라는 뉴스는 최홍서도 얼핏 들어 알고 있었다. 전 국민이 다 알 법한 뉴스거리였다.

“그 집안이 원래 창업주 때부터 철저한 능력제거든. 장남이고 아들이고 짤없어요. 지금 한서 그룹도 장녀가 먹었잖아. 한서 그룹과 나라미래를 위해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지. 이서경 그 미친놈이 맡았어 봐라. 나라 경제 뿌리 뽑히고도 남았지.”

이서경 앞에서는 있지도 않은 꼬리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흔들어대면서, 없는 자리에서는 이 새끼 저 새끼 해가며 명 사장은 이를 갈았다.

“이서경 그 개새끼 중국으로 보내버려 줘서 내가 진짜 그 집 장녀한테 선물이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이라니까?”

명 사장은 다리를 꼬고 담배를 입술로 가져가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이서경은 말하자면, 명 사장의 ‘접대’ 고객들 중에서도 큰손이었다. 이서경은 쓰는 돈의 단위도 최고였지만, 지랄맞은 성격도 최고였다. 그 때문에 같은 쓰레기인 명 사장에게조차 피하고 싶은 블랙리스트에 올라버린 인간쓰레기였다.

게다가, 최홍서가 본격적으로 화류계에 발을 들이게 된 것도 이서경이 최홍서를 찍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탓에 우습게도, 명 사장과 최홍서 모두에게 이서경은 원수처럼 된 인물이었다.

“너도 그 새끼 한국 뜨고 나니까 살겠지?”

““……”

그 새끼가 한국을 떴어도, 네 새끼가 여전히 여기 있는데. 내가 살만하겠니?

모델 출신의 반질반질한 얼굴에 대고 그렇게 쏴주고 싶었지만, 최홍서는 대신 생수만 몇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말머리를 돌려버렸다.

“아까 그분은 연예인들 데리고 노는 거 안 좋아하나 봐요?”

“노는 거 안 밝히는 재벌이 어디 있어? 네가 취향이 아니었겠지.”

명 사장은 코웃음을 쳤다.

그런가. 내가 취향이 아니어서, 춤도 그만 추게 했던 건가? 관심이 없어서?

“뭐, 아예 남자한테는 관심 없는 스타일일 수도 있고.”

테이블 위 재떨이에 재를 털면서 명 사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연기한 다음에 반응 보니까… 영 꽝은 아닌 것 같긴 하던데…근데, 방에서 내보내 버린 게 마음에 걸린단 말이야. 아무래도 우리가 없는 사이에 다른 애를 주연에 앉히려고 강 감독을 꼬시려는 거 같거든. 강 감독이 그렇다고 캐스팅에서 남의 말 들을 사람은 아니긴 한데…”

“……”

“에잇, 씨발! 그니까 그 새끼는 거기서 왜 갑자기 끼어드냐고? 조사장이 너한테 거의 다 넘어온 타이밍이었는데!”

다 된 밥에 코라도 빠뜨린 것처럼, 명 사장은 아까워하고 억울해했다. 짧아진 담배를 아무렇게나 재떨이에 비벼 끄면서, 분이 풀리지 않은 목소리로 이죽거렸다.

“하여간에 누가 범생이 새끼 아니랄까 봐.”

“범생이요?”

명 사장은 담뱃갑에서 새로운 담배를 꺼내며 코웃음을 피식거렸다. “유명하지. 재벌 3세 판의 모범생, 이해성.”

어딘가 비꼬는 뉘앙스가 느껴지는 별명이었다.

“행여나 헛된 기대는 하지 마시고. 모범생이라고 해서 뭐 도덕, 윤리 이딴 게 훌륭하다는 게 아니라, 일밖에 모르는 FM이라는 얘기니까.”

새 담배의 필터를 입에 문 채로 명 사장이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중얼거렸다.

“이 바닥 길 만큼 기어봐서 알잖아? 대놓고 노는 놈과 숨어서 노는 놈이 있을 뿐이라는 거. 밖으로 새는 소문 없이 노는 놈들이 오히려 더 드러운 법이지.”

담배에 불을 붙인 명 사장이 다시 한번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며 자신 있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저거, 이서경 못지않은 상변태 새끼일 거다.”

대놓고 노는 놈과 조용히 노는 놈이 있을 뿐이라는 명 사장의 개똥철학에는 어느 정도 동의했다. 지금까지 최홍서가 보고 들은 경험이 그랬다.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은 결국, 지금 세상에서 억눌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특권층에 속해 있으면서도 이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은 없다. 특권층이면서도 특권을 누리지 않으려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 사람은 만나본 적이 없었다.

활짝 열린 폴딩 도어 너머, 정원의 수영장에서 가식적인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누군가 술에 떡이 된 높으신 분께서 사회적 체면과 나이도 잊으신 채 모델들이 가득한 수영장 속으로 뛰어드신 모양이었다.

어쨌든 오늘, 접대 안 해도 되는구나…

최홍서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며 수영장을, 수영장 너머 반짝거리는 서울의 야경을 쳐다보았다.

재벌 3세 판의 모범생.

ARA 전자의 이해성 부사장과 다시 마주친 것은 그로부터 사흘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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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으로 주말은 ‘레이어드’의 휴일이었다. 하지만 쉴 수 없는 예외는 상당히 자주 발생했다. 그날은 어느 회원제 지하 클럽을 통째로 빌린 파티에 공연이 잡혔다.

“다들 실수 없도록 해. 무대도 무대지만, VIP들 응대! 어? 무뚝뚝하게 뚱하게 서 있지 말고! 방긋방긋 잘 좀 웃으라고! 김영주, 네 얘기야, 인마! 듣고 있어?”

휴일 스케줄임에도 드물게 직접 동행한 명 사장은 같은 내용으로 몇 번이나 경고했다. 초조해 보이는 명 사장과 달리 최홍서 외의 멤버들에게서는 그다지 긴장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차피 그 사람들이 궁금한 건 홍서 형일 텐데요, 뭐. 우리한테 관심이나 있나?”

“그러니까 홍서 이름값 깎이지 않게 들러리 노릇이라도 잘 좀 하라고 이 새끼야!”

음악 방송에 출연할 때보다 더 공들인 헤어, 메이크업과 의상만 보더라도, 명 사장이 오늘 스케줄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가 분명히 드러났다.

고작 서른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어느 재벌가의 3세가 상무로 취임한 것을 축하하는 파티였다. 가까운 지인들만이 모여 즐기는 사적인 모임이었다. 그건 즉, 점잖은 파티가 아님을 의미했다. ‘접대’로 이어질수 있는 파티라는 생각에, 이동하는 자동차에서도 최홍서는 내내 말이없었다.

회원제 클럽 내부는 웬만한 호텔 클럽보다도 고급스럽고 화려하게꾸며져 있었다. 눈에 띄는 간판 하나 걸어두지 않은 외부만으로는 상상도 못 할 신세계였다.

무대에 오르기 전, 오늘의 주인공에게 인사를 먼저 드려야 했다. 여기서부터 보통 스케줄과는 달랐다. 가끔 관계자가 대기실로 찾아와서인사를 하고 함께 기념사진 촬영을 하는 경우는 있어도, 돈을 받고 일을 하러 온 가수가 주최자가 계신 자리로 찾아가 ‘인사를 드리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무대 바로 앞, 거의 침대처럼 넓고 푹신한 소파에 자리 잡은 주인공은 이미 어느 정도 취해 있었다.

“상무님, 오늘 저희 아이들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UB 엔터테인먼트에서 나온 ‘레이어드’입니다.”

명 사장의 굽실거리는 인사에 주인공이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래요. 요즘 인기 많은 분들이라고 우리 비서실에서 추천하던데… 와, 다들 진짜 멋있네. 바쁠 텐데 이런 아저씨가 주최하는 파티에도 와주고 고마워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상무님. 저희가 더 영광이죠. 승진 진심으로축하드립… 니… 다.”

명 사장의 청산유수 같은 입에 발린 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주인공은 최홍서의 앞으로 다가가서 손목을 슬쩍 붙잡았다.

“몸무게가 어떻게 돼요? 50킬로그램은 나가요?”

언뜻 다정하고 나긋한 목소리였지만, 물론 진짜 다정함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오히려 상대를 얕잡아보고 무시하는, 한 수 봐주는 듯한비아냥거림마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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