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자유연기로 부탁해도 될까요? 배우분이… 원하시는 거라면 뭐든 괜찮으니까요.”
차라리 뭘 해보라고 콕 집어줬으면 좋았을 텐데.
“뭘 우물쭈물거려? 아무거라도 좀 해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명 사장은 목소리를 죽여 윽박지를 뿐이었다.
최홍서는 강 감독의 허락을 받고 뒤쪽 테이블 앞의 의자를 하나 가지고 왔다. 상석의 남자와 마주 보는 자리에 의자를 두고, 턱시도 재킷을 벗어 등받이에 걸쳐두었다. 그리고 보타이를 풀어 그 위에 얹고 셔츠의 단추를 두어 개 풀어 내렸다. 흠흠, 목을 풀면서 오른손의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나갔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어떻게 이런 일이! 분장실에서 잠이 들다니, 이런 화상 같으니라고!”
늙은 남자의 자조적인 목소리가 최홍서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지나치게 노인을 흉내 내려는 과장된 목소리가 아닌 말투와 행동으로 캐릭터의 특징을 자연스럽게 잡아내는 연기였다.
“공연은 오래전에 끝났고, 사람들은 다 극장을 떠났는데… 그렇게 평온하게 코까지 골면서 잠에 곯아떨어져? 이 늙다리! 쓸모없는 늙은개야, 네놈은!”
안톤 체호프의 〈고니의 노래〉의 시작 장면이었다.
“예고르카, 빌어먹을! 페트루쉬카! 악마 같은 놈들, 죄다 잠들었구먼. 백 마리의 악마와 마녀 하나가 네놈들 아가리에 숨을 내쉬고 있다, 예고르카!”
재킷과 보타이를 걸쳐둔 의자 앞으로 걸어가는 최홍서의 걸음은 미묘하게 절뚝거렸다. 노쇠하여 몸뚱이가 천근만근인, 허벅지와 무릎이 말을 듣지 않는 노인처럼, 삐걱거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안개 속에서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가늘게 눈을 뜨고, 턱을 앞으로 비죽이 내민 최홍서는 개탄스럽게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군… 오직 메아리뿐이야…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아…”
게슴츠레 눈을 뜨고 먼 허공을 바라보면서, 최홍서는 대사를 계속이어 나갔다.
“오, 그런데 프롬프터 박스는 조금 보이는군… 그래, 바로 이게 문자로 표시된 특별석이고, 음, 이건 악보대로군… 나머지 다른 것들은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죽음 자체가 숨겨져 있는 무덤처럼 캄캄하고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구덩이라고! 이런, 얼어 뒈지겠군!”
〈고니의 노래〉1장 전체를 채우는 스베틀로비도프의 독백을 막힘없이 길게 늘어놓은 최홍서는 무릎을 짚고, 팔걸이에 겨우 의지해가며엉거주춤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의자 뒤로 돌아가면서 고약하게고함을 질러댔다.
“예고르카! 페트루쉬카! 어디 있나, 이 악마 같은 놈들아! 오, 하느님! 불결한 말과 술에 찌든 낯짝, 이런 우스꽝스러운 광대 의상! 꼴도보기 싫다! 어서 가서 옷을 갈아입어야겠어. 기분이 아주 추잡해!”
응접실 내의 다른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연기하고 있던최홍서는, 일순, 그들 한 명 한 명을 차례대로 천천히 쳐다보았다. 의도적이라기보다는 그저 즉흥적인 판단이었다.
명 사장, 강 감독, 조 사장, 어딘가의 이사장… 그리고 마지막으로상석의 남자를 고루 둘러본 최홍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이런 식으로 여기서 밤을 새운다면… 죽어버릴 수도 있겠어…”그러고는 의자에 앉았을 때처럼 절뚝거리며, 뒤를 돌아 그들로부터멀어졌다.
그렇게 몇 걸음 걸어가던 최홍서는 곧 정상적인 빠른 걸음으로 제자리에 돌아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박수나 찬사가 터져 나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홍서의 내면에서는 감정이 들끓었다.
왜냐하면 이건… ‘재롱’이나 ‘상품 소개’가 아니었으니까.
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재능을 증명하기 위한 오디션이었고, 자그마한 하나의 공연이었다. 비록 이 역시도 선택받기 위한 자기 증명이라 해도, 이것은 엄연히 면접이나 오디션이었다.‘초이스’와는 달랐다.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이 VIP들 앞에서, 일방적으로 희롱당하고 무시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갈고닦은 재능을 증명했다는 것. 그 사실이 최홍서를 괜히 뜨겁게 만들었다.
가장 정면에서 최홍서를 마주하고 있던 상석의 남자는 빠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관심한 느낌은 아니었다. 최홍서와 계속해서 눈을 맞추고 있었으니까.
“평소에 체호프를 즐겨 읽습니까?”
그게 남자의 첫 번째 질문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건 아닙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그다지 책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니라서. 방금 그 장면은 제 연기 선생님과 같이 연습했던 장면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요… 그럼, 특별히 그 장면을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까?”
“현장에서는 성실함도 연기력만큼 중요한 가치라고 배웠습니다. 저에게 뛰어난 연기력은 조금 부족할지 몰라도 성실함 만큼은 자신 있습니다. 특히나 황지우 역할은 길고 현학적인 대사가 많고, 힘든 씬도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긴 독백도 매끄럽게 소화할 수 있을 만큼 성실히 임할 준비가 됐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성실함…”
연기력보다 오히려 성실함을 어필한 것이 의외라는 듯, 남자는 최홍서의 말을 되풀이하며 곱씹었다.
“그렇게 딱딱한 말투로 대답할 필요는 없는데. 잘 봤어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남자의 분위기와 표정이 한결 온화해진 느낌이었다. 처음부터 최홍서에게 날카로웠던 건 아니긴 했지만.
“전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네요. 다른 분들은 더 궁금하신 점 없으신가요?”
남자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나 조 사장도 그 옆의 여자도 관심 없는 표정으로 술잔을 비울 뿐이었다. 그들은 파티의 흥을 깨버린 남자에게 불만이 많아 보였는데, 남자는 그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투자 문제를 배우분 앞에서 논의하기는 껄끄러우니, 먼저 보내드리죠.”
“쟤를 먼저 보내자구요?”
심드렁하게 술을 마시고 있던 조 사장이 남자의 말에 펄쩍 뛰었다. 남자는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조 사장 쪽을 천천히 돌아보았다.“더 궁금하신 점도 없다면서요.”
“아니, 그게…”
“궁금하신 게 있으면 말씀을 하세요.”
“……”
술이라도 따르고, 비위라도 맞추라고 해야 할 것 아니냐고. 저런 놈들이 우리한테 투자를 받으려면 발가락이라도 핥아야 하는 거라고.
조 사장은 차마 그렇게 말은 못 하고, 명 사장과 최홍서만 노려보았다. 상석의 그 남자를 노려볼 배짱은 없는 모양이었다.
흠… 뭔가 마음의 결정을 내린 것 같은 한숨을 내쉰 남자가 다시 한번 최홍서를 쳐다보았다.
“연기 잘 봤습니다. 나가보셔도 될 것 같아요.”
“아, 네…”
“이번 일이 잘 성사돼서 다시 뵙길 바라겠습니다, 최홍서 씨.”
“네, 감사합니다.”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굽실거리고 실실거리는 명 사장과 함께응접실을 벗어나면서, 최홍서는 생각했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내 이름도 정확히 불러줬네?
문을 닫기 전 돌아본 곳에서, 남자는 액자 속의 그림처럼 앉아 이쪽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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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접실을 벗어난 명 사장과 최홍서는 말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앞장선 명 사장의 뒷모습은 굉장히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씨발… 술 좀 마시려고 했더니. 저건 또 왜 저기서 얼쩡거리고 있어?”
정원의 바(bar)로 직행하려던 명 사장이 멈칫하더니, 욕설을 중얼거리며 방향을 틀었다.
바 앞의 높은 의자에 앉아있는 정지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정지인을 응접실에서 데리고 나갔던 선배 배우는 어디로 가고, 웬 커다란 미남과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방향을 트는 명 사장을 따라 최홍서는 거실에 마련된 바로 걸음을옮겼다. 명 사장은 독주를 한 잔 달라고 한 뒤 인적이 드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최홍서는 생수를 한 병 챙겼다.
거실 구석, 두 사람이 마주 앉을 수 있는 작은 소파 세트에 명 사장이 털썩 주저앉았다.
“하아… 이해성 저 씹새끼.”
잔 가득 담긴 술을 단번에 반 이상 비워낸 명 사장이 걸쭉하게 욕설부터 쏟아냈다. 가슴팍을 더듬어 담뱃갑을 찾아낸 그는 필터를 입에 문채로도 계속해서 누군가를 욕해댔다.
“조 사장이라도 잡을 수 있는 기회였는데, 그 개새끼 때문에. 아, 씨발, 지 혼자 투자금 다 대기라도 할 거냐고?”
꽤나 열이 받았는지 담배에 불도 제대로 붙이지 못하고 몇 번이나헛손질을 해댔다.
명 사장의 기분이 뭐 같건 말건, 최홍서는 그곳을 빠져나와 바깥 공기를 마시니 숨통이 트여 살 것 같았다.
“그럼 오늘… 접대는 없어요?”
“내 말이 그 말이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담배를 한 모금 더 깊이 빨아들인 명 사장은 정돈된 머리카락을 마구 흩트렸다.
“아까 그분, 누구예요?”
“누구? 오늘 일 망친 그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