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명 사장님, 작품과 관련된 결정권은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감독님께 속해 있다는 걸 분명하게 해주셔야 해요.”
“네, 맞습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여배우의 훈계에 명 사장은 머리를 조아리며 물러섰다.
“오늘 여기 귀한 분들께 홍서도 인사시키고, 투자도 유치하는 좋은 자리잖아요. 명 사장님 도움 없이는 성사시키기 어려운 자리였던 것도 맞구요. 그러니까 감독님도 이제 마음 푸세요. 괜히 정지인 씨만 민망하겠어요.”
“배우분 잘못은 아니에요. 미안해요…”
작품에 대한 고집은 있어도 사람 자체는 그리 모질지 못한 강 감독이었다. 여전히 샐쭉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정지인을 힐끔 쳐다보며 미안한 듯 괜히 소파의 팔걸이만 문질러댔다.
여배우는 그런 강 감독의 등을 토닥이며 몇 마디 귓속말을 하고는 클러치백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정지인 씨하고는 제가 얘기 잘 마무리할게요. 지인 씨, 우리잠깐만 볼까요?”
명 사장도 정지인도, 그녀의 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최홍서는 그녀의 뒤를 따라 응접실을 탈출하는 정지인의 뒷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홍서야, 무슨 플라이였나? 너희 팀 그런 노래 있었잖아, 왜․ 골반기가 막히게 돌리는 노래. 그 춤 한번 보자.”
조 사장의 목소리에 최홍서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다시 정면을 향했다.
“네, 괜찮으시면 여기서 잠깐 보여드리겠습니다.”
이런 일을 요구당하는 것은 조금도 굴욕적이지 않고, 오히려 반가운 일이라는 듯이. 최홍서는 망설임 없이 즉각 대답했다.
“조 사장님께서 저희 아이들 노래도 다 알고 계시고, 영광입니다.”
명 사장 역시 조금 전까지의 어색함은 완전히 잊은 것처럼 실실거렸다. 그러고는 핸드폰을 만져 응접실 내의 블루투스 스피커와 연결했다. 최홍서는 춤을 추기 위해 턱시도의 단추를 풀었고, 곧 ‘레이어드’의최근 히트곡의 전주가 흘러나왔다.
무대도 아닌 곳에서, 조명도 없이, 혼자 춤을 춘다. 게다가 그건 공연도 아니었고, 하다못해 오디션도 아니었다. 그저 돈 많은 자들이 벌인 술자리의 여흥을 돋우기 위한 ‘재롱’이었을 뿐.
아니, 이렇게 재능 있고 매력 있는 나를 구매해 달라는 ‘상품 소개’라고 해야 할까.
“저거 봐요, 이사님! 저거, 저거… 골반 돌아가는 거 봐요. 저래도쟤가 귀여워요?”
골반과 어깨를 부드럽게 좌우로 흔드는 안무에서 조 사장이 흥분한목소리로 소리쳤다. 손에 들고 있던 잔에서 술이 흘러넘쳤다.
“내 눈엔 귀여운데요? 내 나이에 홍서 또래 남자애들이야 다 그냥귀엽지. 홍서도 실물을 보니까 탐은 나는데… 나는 지금 우리 애기가질투가 많아서.”
조 사장의 옆자리에 앉은 여자는 소파 등받이에 느슨하게 몸을 기댄 채 그저 흐뭇하다는 얼굴로 최홍서를 보고 있었다.
“이사님이 버릇을 잘못 들이셨네. 질투한다고 그걸 받아줘요?”
질투를 허용해 준다니. 조 사장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난 그런 게 귀엽더라구.”
“아… 이사님이 튕하시면 내가 홍서랑 조금 놀아줄까. 어릴 때는 영시큼하기만 할 것 같아서 먹을 맘이 안 들더니… 지금은 단물이 줄줄흐를 것 같네.”
조 사장의 핏발 선 붉은 눈이 춤을 추고 있는 최홍서를 훑어 내려갔다. 여자가 재미있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홍서는 스물다섯 넘지 않았나? 조 사장한테는 어리면 어릴수록 예쁜 거 아니었어?”
“뭐든 예외가 있는 법이죠.”
최홍서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조 사장이 잔 속의 술을 단번에비워냈다.
“명 사장님, 이런 춤을 추게 해도 됩니까? 이거 대놓고 흔들어대는것보다 야한데? 아니… 홍서가 춰서 더 야한 건가?”
그리고 비스듬히 턱을 괸 채 최홍서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술기운에 어눌해진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홍서야, 그 춤… 내 밑에서 춰볼래?”
오늘 ‘접대’해야 하는 VIP는 상석의 남자가 아니라 결국 조 사장이 되는 건가. 최홍서가 그런 생각으로 머리를 굴리며 명 사장을 힐끔거릴 때였다.
“음악은 그만 끄죠.”
지루하고, 한심하고, 비위에 거슬려서 못 들어주고 못 봐주겠다는 목소리가 VVIP로부터 새어 나왔다.
짜증스러움과 한숨이 묻어나는 느린 저음은 분명 요란한 음악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응접실 안의 모두가 그 목소리에 반응했다. 그가 고함이라도 지른 것처럼.
굳어버린 분위기에 최홍서의 춤 동작이 서서히 느려지다 멈추었다. 다른 귀빈들의 눈치를 살피던 명 사장도 음악을 중단시켰다.
내내 자세를 거의 바꾸지 않고 있었던 상석의 남자가 무릎 위에 놓여 있던 깍지를 풀었다. 그리고 두통이라도 느끼는 것처럼 눈썹 부근을 누르며 지압했다.
“투자 유치 설명회라고 해서 시간을 냈는데, 제가 잘못 알고 온 건가요?”
부정적 뉘앙스가 섞여 있긴 해도 어조는 부드러웠다.
생각만큼 화가 난 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조 사장이 비리게 웃으며 농담으로 받아쳤다.
“부사장님, 지금 주연을 맡을 배우의 역량을 검토하고 계시잖습니까.”
“저분이 맡을 역할이 화류계 접대부입니까?”
“……”
남자의 조용하고도 날카로운 격침에, 그때까지도 낄낄거리고 있었던 조 사장의 웃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조금 분위기를 가볍게 해보자는 거죠. 누가 접대부 취급을 했다고 그러십니까.”
남자의 기분을 크게 거스르지 않으려 분명 어떤 선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조 사장은 불쾌한 기색을 완전히 감추지는 않았다.
“지나친 건 조금 전의 그 분위기 아닙니까?”
“홍서야, 불편했어?”
조 사장의 시선이 문득 최홍서를 향했다.
이번에도 죄인처럼 서 있었던 최홍서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젓는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애초에 이 상황에서 최홍서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이것뿐이었다. 질문의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도 조 사장은 그것 보라는 듯, 문제 될 게뭐가 있냐는 듯 상석의 남자를 향해 말했다.
“당사자가 괜찮다고 하지 않습니까, 부사장님.”
“제가 불편하다는 이유로는 불충분하다는 말씀입니까?”
“……”
남자의 논리는 직접적이고 명료했다. 이렇게까지 얘기해도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듣겠냐고, 조용하고 분명한 시선으로 조 사장을 압박했다.
입매를 딱딱하게 굳혔던 조 사장은 남자를 마주 보고 있던 시선을떨어뜨리며 꼬리를 내렸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불편했냐는 조 사장의 질문에 최홍서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조 사장 역시 남자의 질문에 선택권이 없었다.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계급의 차이였다.
최홍서는 조 사장이 한 방 먹은 것에 통쾌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이상으로 상석의 남자 때문에 긴장이 됐다. 그간의 경험에 의하면, 저남자가 자기를 도와주기 위해 나섰을 리는 없었다. 그런 권력층은 본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었다. 그래서 더 저 남자를 알 수가 없었다.
연예인들과 권력층들이 얽히는 소위 고급 화류계 바닥에서는 구를만큼 굴렀고, 잔뼈가 굵어졌다 생각했는데. 저런 부류의 사람은 처음이었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정리됐음을 느낀 남자가 표정을 조금 편안하게바꾸었다. 그리고 강 감독을 향해 말했다.
“영화에 대한 정보는 미리 받아봤습니다. 주연 배우는 최홍서 씨로확실하게 정해진 건가요?”
“아직 확정은 되지 않았지만… 90% 정도는 그렇다고 보셔도 됩니다.”
“감독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지금껏 투자해온 작품들은 대부분 신인감독들의 저예산 영화라서요.”
남자는 너무 딱딱한 말투를 쓰지 않으면서도 신중한 어조를 택했다. 그리고 목소리를 작게 내는 편이었다. 상대방이 자신의 이야기를귀 기울여 듣는 것에 익숙한 사람 같았다.
강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잘 알죠. 부사장님이 투자금 회수는 개의치 않고 좋은 작품들후원해 오신 거, 이 바닥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인데요. 외부에 떠들썩하게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죠.”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물론 저 역시 강 감독님 작품세계를 존경하고, 힘을 보탤 수 있다면 영광입니다. 그래도… 그간 제가 참여해왔던 작품들과는 투자 금액의 규모 면에서 조금 신중해질 수밖에 없네요. 감독님과 배우분이 괜찮으시다면 연기를 조금 볼 수 있을까요?”
말을 마친 남자의 시선이 차분히 최홍서를 향했다. 목소리를 크게내지 않는 것처럼, 남자는 얼굴이나 시선도 빠르게 이동시키지 않았다.최소한의 움직임과 차분한 행동거지는 깊은 물의 느린 흐름처럼 우아해 보였다.
연기를 볼 수 있냐는 질문에 당황한 최홍서의 시선이 남자와 강 감독, 그리고 명 사장을 번갈아 쳐다보느라 바빴다.
“연기하시는 모습을 제가 본 적이 없는 배우분이라서요.”
남자가 약간은 미안한 투로 덧붙였고, 강 감독이 나서서 맞장구를쳤다.
“그럼요, 부사장님. 주연 배우가 어떤 연기자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투자를 결정하시기는 그렇죠. 홍서 씨, 지금 연기 가능하겠어요?”
“어떤… 장면으로 할까요.”
평소의 ‘접대’ 자리처럼, 웃음을 팔고 술을 따르고 분위기만 돋우면된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터라, 연기를 보자는 말에 최홍서는 머릿속이새하얘졌다.
맞은편 상석에서 이쪽을 바라보던 남자가 다리를 꼰 방향을 바꾸면서 느릿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