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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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할을 따내는 데에 아무런 접대가 없었음에도, 최홍서는 괜히 목소리가 작아졌다. 명 사장에게 발목 잡혀 여기까지 질질 끌려온 자기나현수와는 달리, 정지인은 접대로 일을 따는 배우가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원해서 하고 있는 일이 아닌데도 정지인에게 부끄러웠고, 그리고 아무런 약점도 잡히지 않은 자유로운 정지인이 부러웠다.

    “이번 일만 잘 끝나면 질질 끌려다니는 생활도 끝이야. 최홍서도 혹시 칸에서 레드 카펫 밟게 될지 누가 알아? 하하…”

    칸, 레드 카펫… 그런 단어들을 입에 담으면서도 자신에게 참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최홍서는 코웃음이 흘렀다. 그건 마치 오물 구덩이에서 바글거리는 구더기가 새하얀 날개를 가진 나비를 동경하며 지껄이는 헛소리 같았으니까.

    저 문으로 들어가고 나면 또 어떤 개 같은 상황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수십 번, 수백 번, 돌아서서 도망가 버리고 싶었다. 최홍서는 남창이라고, 걸레라고, 그렇게 세상에 다 폭로해 버리라고. 너도 죽고 나도 죽자고. 명 사장에게 마음대로 하라며 끝장을 내버리고 싶은 날도 수백 번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끌려왔는데. 어떻게 버텼는데. 그게 아까워서라도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끝이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믿었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정지인을 안심시키기 위해 최홍서는 애써 가벼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오늘 왜 부르신 건지 나도 거기까진 모르지만… 감독님이 형도 한번 보고 싶다고 하신 거 아닐까? 형은… 이런 자리 찾아다니면서까지 일 찾는 스타일 아닌 거, 사장님이 아시잖아. 아마 그쪽에서 보고 싶다고 한 거겠지.”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밝게, 정지인이 안심할 수 있도록, 철없는 동생처럼 웃어 보이며 덧붙였다.

    “같이 일하게 되는 거면 좋겠다. 그치?”

    정지인은 세상에서 최홍서가 좋아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고, 그 말은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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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우현 감독의 응접실은 유명 디자이너들의 가구와 미술품들로 꾸며져, 갤러리의 라운지 같은 분위기였다.

    커다랗고 묵직한 테이블 주변의 소파에는 예닐곱 명의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강우현 감독과 UB 엔터테인먼트의 명 사장, 최홍서보다 먼저 〈크림 맨션〉에 캐스팅 확정된 중견의 선배 여배우, 그리고 나머지는 분명 돈줄을 쥔 VIP들이었다.

    “감독님, 저희 UB 소속인 정지인 배우라고 합니다. 지인 씨, 인사드려요.”

    명 사장은 강 감독과 초면인 정지인을 먼저 소개해 올렸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음, 그래요, 반가워요. 그런데 나는 처음 보는 배우인데.”

    “네, 홍서처럼 아직 영화는 경험이 없습니다. 쭉 드라마에만 출연해왔습니다.”

    명 사장의 설명에 강 감독은 소파에 앉은 채로 정지인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보았다.

    “마스크가 좋네. 칼 댄 곳 있어요?”

    “없습니다. 깨끗합니다.”

    이번에도 명 사장의 대답이었다.

    명 사장이 강 감독에게 열심히 정지인을 영업하는 동안, 최홍서는 그 옆에 마네킹처럼 서서 웃고 있었다.

    예쁘게 차려입고 공들여 메이크업과 헤어를 하고, 소파에 편히 앉은 돈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방긋방긋 웃으면서, 그들이 선택해 주기를 기다리는 ‘초이스’의 시간.

    이름과 얼굴이 알려지고, 지금은 제법 인기도 있는 배우 겸 아이돌이 되었어도, 처음 호스트바에 발을 들였던 무렵과 상황은 크게 달라진게 없었다. 여전히 ‘초이스’를 기다리는 ‘상품’이었다.

    VIP 중 두 사람은 최홍서도 대강 아는 얼굴이었다.

    명 사장은 고급 유흥업계에 기웃거리는 VIP들에 대해 기본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파티나 접대에 불려 갈 때는 실수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중요 인사들을 미리 인지하도록 교육할 때도 있었다.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남자는 대기업 계열사인 대형 건설회사의 대표이사 사장이었고, 최홍서도 이런저런 자리에서 이미 인사를 한 적이 있었다. 남녀 가리지 않고 연예인들 끼고 놀기를 꽤나 좋아하는 남자였는데, 스물다섯이 넘은 ‘상품’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 옆의 중년 여자는 백화점과 몇몇 재단을 운영하는 재벌가 오너 패밀리 중 한 명이었다.

    “몇 번 스치듯 보긴 했는데, 명 사장네 아이였구나.”

    정지인에게 관심을 보이며 끼어든 건 건설회사의 사장이었다.

    “눈매랑 입술이 섹시하네. 올해 몇 살?”

    “서른하나입니다, 사장님.”

    일일이 자기가 나서서 대답하는 명 사장이 호스트바 마담 같다고, 최홍서는 그런 생각을 하며 속으로 쓰게 웃었다.

    “아쉬워라. 나이가 안 예쁘네, 나이가.”

    아깝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술잔을 빙빙 돌린 남자는 옆자리의 여자를 향해 물었다.

    “대표님 취향도 아니죠?”

    “난 홍서 군처럼 귀여운 타입이 더 좋지.”

    “홍서가 귀여워요? 쟤 무대 하는 거 못 보셨나 보네. 끼 부리는 게 보통이 아니에요.”

    최홍서가 귀여운 계열이 아니라는 증거라도 보여주려는지, 남자는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런 남자를 맞은편의 중견 여배우가 가볍게 핀잔했다.

    “조 사장님도 꽤나 밝히신다니까. 근데 홍서도 조 사장님한테는 안예쁜 나이 아닌가?”

    “그러게요. 내가 쟤를 너무 늦게 알았죠.”

    농담을 주고받는 거리감을 봐서는 두 사람이 이미 친분이 있는 관계 같았다.

    조 사장이란 작자는 미끈한 턱시도 차림의 최홍서를 슥 훑어보며 입맛을 다셨다. 수확할 시기를 놓쳐 지나치게 익어버린 과실을 바라보듯 아까워하는 눈길이었다. 최홍서의 팔뚝에 소름이 끼쳤다.

    입술에 경련이 일어날 것처럼 미소를 지은 최홍서는 조 사장의 시선을 피해 자연스레 눈을 돌렸다.

    VIP들 중 나머지 한 사람.

    상석의 일인용 소파에 홀로 앉아있는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에 대해서만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접대해 본 적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명 사장에게 귀띔을 받은 적도 없는 인물이었다.

    30대 초반쯤 됐을까? 아니면, 중반?

    굉장한 미남자들이 대부분 그렇듯, 남자의 생김새로는 좀처럼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차분한 분위기를 가진 삼십 대 초반이라고 하면 그런 것 같았고,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삼십 대 중반이라고 하면 그것도 납득이 되는… 그런 얼굴이었다.

    기분이나 성격을 전혀 읽을 수 없는 완벽한 무표정 때문에 더더욱 나이를 예상하기가 어려웠다.

    조 사장과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조 사장도 나이에 비해 관리가 잘된 미남 축에 들었지만, 상석의 남자와 같은 무게감은 갖고 있지 않았다.

    조 사장은 짓고 있는 표정이나 앉아있는 껄렁한 태도만으로도 그가 어떤 부류의 인물인지, 이 자리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바로 파악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상석의 남자는 액자 속 그림처럼 마치 무기질 같아서, 어떤 정보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다른 VIP들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데도 상석에 앉은 것으로 봐서 저 남자는 VVIP가 분명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아마 가장 잘 보여야 하는 상대일 것이다.

    그런 중요한 상대의 기분도 성격도 전혀 파악할 수가 없으니 최홍서는 긴장이 됐다.

    ‘영화가 크랭크인 되느냐 엎어지느냐, 이게 너한테 달려있다 생각하고 실수 없이 해. 오늘 아마… 오랜만에 VIP 접대가 있을 것 같으니까.’

    명 사장의 경고가 되살아났다. 어쩌면 오늘 접대해야 하는 사람이 저 남자일까.

    긴장감에 아랫입술을 이로 긁으려는 찰나, 남자의 깊숙한 눈과 마주쳤다. VIP들 앞에서 늘 하던 것처럼 예쁜 미소를 지으려 해봤지만, 어째서인지 잘되지 않았다. 입술 양 끝이 경련이라도 난 것처럼 어색하게 떨릴 뿐이었다.

    다리를 겹쳐 꼬고 무릎 위에서 두 손을 깍지 낀 남자는 시선만으로 사람을 꿰뚫어 보고 조종하는 지배자 같았다. 그런 거짓투성이 미소 따위에는 조금도 현혹되지 않는다고, 어디에서 써먹던 얕은 수작을 부리는 거냐고. 당장이라도 그 잘생긴 입술을 비틀며 가차 없는 모욕을 줄 것 같았다.

    그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게 무서웠다. 조 사장같은 인간들이 차라리 ‘접대’에는 더 편했으니까.

    “감독님, 정말 주제넘은 말씀이지만… 펫로스 증후군에 시달리는 동료 의사 역할에 정지인 배우가 어떨까 해서… 감독님께 선 좀 보이려고 제가 준비시켰습니다.”

    바로 옆에서는 명 사장이 정지인을 〈크림 맨션>에 출연시키기 위해 여전히 애를 쓰고 있었다.

    “명 사장님.”

    명 사장의 얘기를 들은 강 감독의 입매가 즉각 비틀렸다.

    “이번 영화 위해서 애써주신 건 내가 알고, 많이 의지하고 있긴 한데… 그건 어디까지나 작품 외적인 부분의 얘기죠. 이런… 작품에 이런 식으로 개입하려고 들면 제가 정말 곤란해요.”

    “개입이라니요, 감독님. 제가 어떻게 감히 감독님 영화에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펄펄 뛰는 강 감독을 달래려 명 사장이 진땀을 빼는 동안, 최홍서와 정지인은 그저 죄인처럼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서서 감정 없는 인형처럼 상황이 정리되기만을 기다렸다.

    “감독님, 조금 진정하세요. 손님들께 이런 모습 보이려고 만든 자리가 아니잖아요.”

    강 감독과 친분이 깊어 보였던 여배우가 나서서 상황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조금 분위기가 누그러지고, 최홍서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들었다.

    다시 한번 상석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버릇없이 VIP를 흘깃거렸다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아서, 곧바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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