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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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연습생 시절 내내 최홍서에게 반찬 한 번 보내지 않은 가족들이었다. 연예인이 되겠다니, 한 푼이라도 돈을 벌 생각은 안 하고 헛바람만들었다며 집을 나가라고 핏대를 세운 부모 때문에, 최홍서는 모처럼 주어지는 휴일에도 집에 돌아가지 못했었다. 데뷔 후에도 무명 생활이 길었기에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돈을 가져다주기 시작하자 그제야 겨우 아들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최홍서를 돈으로밖에는 보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다.

명 사장? 그 인간이라면 내 주검에 칼질을 해댔으면 해댔지, 멀쩡히 화장해서 봉안당에 안치? 그것도 VIP실에? 어림도 없는 얘기였다.

자신을 VIP로 대우해 줄 사람은 세상에 한 사람뿐이었다. 깊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누구의 입김이 닿은 일인지 안다.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의 눈높이와 가장 비슷한 일곱 번째 단. 가장 정성껏 장식되어 눈에 띄는 유리관 앞에서 최홍서의 걸음이 서서히 멈췄다.

“……”

순백의 유골함 옆에 세워진 위패에 새겨진 이름을 똑똑히 보았다.

최홍서.

그러나 유골함에서도 위패에서도, 어디에서도 故라는 글자는 찾을 수 없었다. 이 봉안단을 준비한 누군가가 그 글자를 사용하기를 극히 꺼렸던 것이겠지…

최홍서는 가슴을 가로질러 크로스로 맨 가방끈을 저도 모르게 꽉붙들었다. 그리고 유리관 안의 장식들을 하나씩 천천히 눈에 담았다.

화사한 생화와 최홍서의 솔로 앨범, 팬들이 직접 그린 초상화와 최홍서의 애칭이었던 홍시를 모티프로 한 귀여운 캐리커처 등이 유골함과 위패 주변을 아기자기하게 꾸미고 있었다. 쿠키를 먹고 있는 홍시캐릭터에는 팬이 손으로 쓴 메모도 함께였다.

우리 리더 홍시, 그곳에서는 살찔 걱정 없이 좋아하는 쿠키도 마음껏 먹고, 모든 것을 다 잊고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만을 기억하길.

산처럼 쌓인 쿠키를 먹고 있는 그림 속 홍시는 포근한 파스텔 빛의 주황색을 띠고 눈을 반쯤 감은 채 만족스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말랑말랑하고 부드럽고, 그리고 마냥 행복해 보였다. 우울하거나 서글픈 그늘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가방의 끈을 쥐고 있던 최홍서의 손에 더 강한 힘이 들어갔다. 손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

‘X군 스캔들’이 완전히 까발려지면, 아무리 오랫동안 지지해 줬던 팬이라 해도 자신에게 등을 돌릴 거라고 완전히 겁을 먹었었다. 아무도나를 피해자로 봐주지 않을 거라고.

그런 식으로 떠난 자신을 용서해 주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렇게 행복한 모습으로 기억하고 그려줄 사람이 있을 거라고도 생각 못 했었다.

홍시 캐릭터 옆쪽으로는 환하게 웃는 최홍서의 초상화 액자가 세워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그림 속 최홍서가 움직이면서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릴 것 같은 생생한 작품이었다. 그림의 아래쪽에도 역시 짧은 메모가 곁들여져 있었다.

팬 사랑 지극한 우리 홍리더.

우리 걱정은 말고 제발 좀 편히 쉬어.

우리는 너를 믿고, 네가 준 행복만 기억할 거니까.

그대로 한참을 서 있었다. 최홍서가 그 자리에 서서 절감한 것은 그저 후회였다. 전신을 울리고 뼈를 저리게 하는 지극한 후회.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짓을 저질렀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의 몰매를 피하자고, 또, 사랑하는 사람에게 경멸당하는 것이 두렵다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최악의 고통을 주었다. 그런 건 사랑이 아니다. 나는 나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가방끈을 두 손으로 꽉 붙잡은 채 아랫입술을 연신 짓씹어댔다.

병신, 병신, 병신, 병신…

“윤혜안 씨?”

“……”

뒤쪽에서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최홍서는 물고 있던 입술을 놓쳤다.

등 뒤의 목소리는 이곳에 있을 리가 없는 사람을 발견하고 의아해하고 있었다. 이 만남이 당황스럽기는 최홍서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의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쭈뼛쭈뼛 몸을 돌려세운 곳에는 예상대로 이해성이 서 있었다. 손에는 봉안단을 새롭게 꾸밀 생화를 쥐고 있었다.

“여긴 무슨 일입니까?”

딱딱한 쇠붙이끼리 부딪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호, 홍서한테… 한번 들르려고 왔습니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마주침이었기에 즉흥적으로 대답할 수밖에없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이해성은 의심스러운 얼굴이었다. 최홍서가 연예계에서 친하게 지낸 사람이라고 해봤자, 같은 회사 소속이었던 정지인과 이현수 정도뿐이라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홀 중앙의 소파 세트를 사이에 두고, 그가 좀 더 앞으로 걸어 나왔다. 비난하는 것 같은 차가운 눈이 피부를 찔러댔다.

“최홍서 씨와 가까웠습니까?”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떠보고 있었다. 다 알고 있는 그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가방끈을 쥔 최홍서의 두 손이 이제는 거의 끈을비틀어 쥐어짜고 있었다.

“아니요… 그건 아닌데… 그냥 인사만 몇 번 한 정도였습니다.”

“……”

그런 당신이 여길 왜 온 거냐고, 그는 표정으로 묻고 있었다. 망자를 찾아온 뜻밖의 손님을 반가워하는 표정은 전혀 아니었다.

“홍서가 맡았던 역할을 제가 하게 된 거니까, 그래서… 인사라도 하려고…”

“호칭이 이상하네요.”

“……”

“그쪽이 최홍서 씨보다 한 살 연하 아닌가요? 게다가 친하지도 않았다면서.”

취조하는 형사를 연상시키는 말투.

최홍서는 알지 못하는 이해성이었다. 그의 거부가 아프면서도, 본적 없는 모습의 그를 보고 싶었다. 용기를 내서 고개를 들었다.

일터에서 바로 왔는지, 그는 특별히 튀는 구석 없는 흠 없이 깔끔한슈트 차림이었다. 뉴스 속에서 볼 수 있는 ARA 전자 부사장으로서의모습이었다. 대신 표정만큼은 살아있었다. 도무지 감정을 읽을 수 없다며, 기자들마다 불평하던 포커페이스의 무표정이 아니었다.

말없이 눈을 오래 맞추는 것이 불쾌했는지, 그의 미간이 노골적으로 찌푸려졌다.

“죄송합니다.”

기어드는 목소리로 겨우 그렇게 말한 최홍서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인사를 하러 왔다는 사람치고는 꽃 한 송이도 준비 안 한 것 같고.”

“……”

스스로의 죽음을 꽃으로 추모하는 것도 우스운 일 같아서 빈손으로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그대로 말할 수도 없었다.

입술이 붙어버린 최홍서를 이해성의 눈이 싸늘하게 훑어 내려갔다.온통 명품으로 치장한 윤혜안이 그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상상하기는어렵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미처 생각을 못 해서…”

아랫입술에 일어난 껍질을 이로 마구 잡아 뜯으면서 최홍서는 가방끈에만 매달렸다.

미간이 찡하게 울리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질 것 같았다. 울고 싶지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최홍서는 그런 놈이 아니었다. 서러움을 느낄기회가 없었던 것처럼, 눈물을 흘리며 감상에 빠져있을 여유도 허락되지 않았었다. 톱스타가 되는 것만 생각했다. 죽도록 노력했고, 악착같이, 독하게 살아갔었다.

그런데 그의 앞에서만큼은 독해지는 게 어려웠다. 그게 잘 안됐다.이 사람 앞에서는 독해질 필요가 없었으니까. 내 독기를 다 녹여내던 사람이었으니까.

“투자를 했더라도 작품 자체는 온전히 감독의 것이니 캐스팅에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습니다. 난 윤혜안 씨가 그다지 적역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감독님 의견이 그렇다면 따라야겠죠.”

“……”

“하지만 흉내는 그만둬 줬으면 좋겠습니다.”

가방끈을 비트는 최홍서의 손끝이 구부러져, 손톱이 살 안을 파고들었다.

어지러웠다. 등줄기에서 힘이 쑥 빠지면서 순식간에 식은땀이 전신에 배어 나왔다. 몇 발자국 앞에 놓인 의자를 향해 비틀비틀 걸어가 등받이를 움켜쥐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그 안에서 윤혜안의 모습을 발견하고, 여전히 그때마다 매번 소스라친다. 하지만 그에게 자신을 최홍서라고 말할 수 없는 이 순간의 고통이야말로, 자신의 죽음과 이 기막힌 환생을 가장 생생히 실감하게 하는 증거였다.

너는 정말 죽었다고. 그가 사랑하는 너는 이제 없다고.

“이제 원하는 대로 배역도 따냈잖아요?”

“……”

“여길 찾아온 목적이 대체 뭡니까.”

그는 이제 불쾌함을 완전히 드러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성큼성큼걸어와 멱살을 잡고 여기서 끌어내기라도 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지나치거나 모자란 부분은 조금도 없이, 수학적으로 보일 만큼 완벽한 비율을 가진 그의 얼굴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조금 마르고 꺼칠해져 있었다. 그리고 최홍서가 본 적 없는 표정만 짓고 있었다.

“세상에 없는 아이라고 해서 당신 같은 사람들이 멋대로 이용해도된다는 뜻은 아니야. 알겠습니까?”

이렇게 화난 모습은 처음이었다.

뉴스 기사도 아닌, 위패에 적힌 이름도 아닌… 다름 아닌 그를 통해서, 자신의 죽음을 몇 번이고 확인당한다. 그에 의해서 존재를 부정당한다. 너는 최홍서가 아니라고. 최홍서가 아닌 너를 나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나는 정말 죽어버린 것이다.

옷이 축축하게 젖을 정도로 땀이 흘렀다. 바닥이 파도처럼 구부러지며 울렁거렸다. 병원에서 그의 기사를 처음 찾아봤을 때처럼 구토감이 치고 올라왔다.

그러나 어떻게든 이 장소를 벗어날 때까지는 정신을 붙잡고 싶었다. 여기서 쓰러지기라도 했다가는 쇼라도 한다고 생각할 게 뻔했다. 지금 그에게 윤혜안의 눈물이나 실신 따위는 가증스러운 수작질로밖에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안아주고 달래주는 그런 일 따위는 없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가 달라고 용재 씨한테 부탁하는 건데…

입술을 짓씹은 최홍서의 이 사이로 쌉싸름하게 피의 맛이 배어들었다.

“뭐 하는 겁니까. 이봐요, 윤혜안 씨.”

불쾌하게 일그러진 그의 표정이 시야 속에서 명멸하다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내가 만약 정말 윤혜안이고, 반쯤 미쳐 자신을 최홍서라고 믿고 있을 뿐이라면. 그래서 내가 기억하고 있다고 믿는 이해성과의 시간도 전부 착각일 뿐이라면.

그랬다면, 망상에 불과한 거짓 연애의 상대를 보면서 이렇게 많이 아플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감정과 이 고통이 가짜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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