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발치의 녀석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하고는 소파 쪽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아무래도 오디션 관련 전화일 것 같아서 그 짧은 순간에 손바닥에 땀이 배어났다.
발신인은 용재였다. 하나, 둘, 셋… 심호흡과 함께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다섯까지 세고는 전화를 연결했다.
“네, 용재 씨.”
[형, 캐스팅됐어요! 황지우 역할, 형이 하게 됐다구요!]
전화를 받기가 무섭게 용재의 흥분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조금 전에 제작사에서 연락 왔어요. 형이 하는 걸로 완전히 확정됐대요!]
“오디션 더 안 보구요?”
[그렇다니까요. 그냥 형으로 최종 확정이래요!]
9명이 최종 후보로 추려졌다 해도, 그 안에서 다시 두세 명을 남겨 추가 오디션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에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추가 오디션이 있을 거라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종 합격 소식이 얼떨떨했다.
[강우현 감독님 영화에 주연이라니… 이게 가능해요? 우리한테 이런 날이 오다니 믿기지가 않아요! 발연기로 맨날 욕만 먹던… 형…이…]
흥분했던 용재의 목소리가 점차 느려지고 작아지다가 마지막에는 완전히 사그라졌다. 그리고 풀 죽은 목소리가 곧 뒤를 이었다.
[죄송합니다, 형․ 제 말은 그게 아니라…]
“괜찮아요. 무슨 말인지 알아요. 사실 저도 실감은 별로 안 나거든요.”
[근데 연습하실 때부터 진짜 예전하고는 다르구나 싶었어요! 회사에서도 형이 사고 겪고 나더니 성숙해졌다고 다들 놀라고 있거든요. 제가 보장하는데, 형은 더 이상 예전의 윤혜안이 아니에요! 강우현 감독님 영화에 주연이라니! 제가 다 자랑스럽다니까요!]
용재의 들뜬 목소리를 듣고 있는 사이, 최홍서도 점점 실감이 들기시작했다. 누군가 이렇게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는 사람이 있으니, 기쁨도 전염되는 기분이었다.
내면과 외면이 일치하지 않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기쁘다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래도 기쁜 건 기쁜 거였다. 그를볼 수 있는, 조금이라도 가까이에 있을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거니까.
주방에서 뒤따라온 티파니가 발부리 부근에 앉아 울어댔다. 간식을주려다 말고 딴짓을 하고 있어 심기가 불편해지신 모양이었다. 최홍서는 주방으로 다시 걸음을 옮기면서 감정을 다잡고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대표님이 오늘 축하 자리 만들어 주신다고 하는데, 형 뭐 먹고 싶은 거 있으세요? 아, 아직 술 마시면 안 되나? 제가 병원에 전화해 볼까요?]
“용재 씨.”
[네, 형.]
식탁 부근에서 최홍서의 걸음이 다시 느려졌다.
“오늘은 좀… 개인적인 일정이 있어서요.”
[어디 가시는데요? 제가 차 가지고 갈까요?]
“괜찮아요. 택시 타고 다녀오면 되는 거리예요.”
[몸도 아직 다 회복 안 됐는데 왜 혼자 움직이려고 하세요? 그러다일 생기면 어쩌려고. 아니면, 다른 로드 매니저라도 보낼까요?]
“정말 괜찮아요. 몸은… 사실 아픈 것도 아니니까요.”
윤혜안은 개인 일정에도 반드시 매니저가 운전해 주는 차를 이용했던 것 같았다. 매번 ‘모셔다드리고, 모셔 오고’ · 용재가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걸 보면 충분히 예상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최홍서는 그런 배려가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숙소 앞 편의점을 나갈 때도 매니저에게 보고해야 했던 아이돌 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고 있다는 갑갑함은 꼭 아이돌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알겠습니다, 그럼 사장님한테도 그렇게 전할게요. 근데 형! 다음주 월요일은 꼭 비워 놓으셔야 돼요. 감독님하고 몇몇 관계자분들한테인사하는 자리가 있대요.]
“관계자…분들이요?”
[아마 오디션 심사 보셨던 그분들 아닐까요? 영화 관련 공식 스케줄은 아니어도 중요한 자리니까 꼭 스케줄 신경 써주세요, 형. 꼭이요.]
“네, 알았어요. 걱정 마세요.”
최홍서의 몸으로 캐스팅이 확정됐을 때도 같은 자리가 마련됐었다. 주연 배우들과 영화 관계자들이 모여 비공식적으로 서로 인사하고 영화를 잘 만들어보자는 의지도 다지는, 회식에 가까운 미팅이었다.
아무리 본인이 투자하는 영화더라도 ARA 전자의 부사장인 이해성이 이런 자리에까지 얼굴을 내밀겠냐고. 모두가 그렇게 예상했었다. 하지만 그는 예상을 깨고 자리에 참석했었다.
오실 줄 몰랐다는 최홍서의 말에 그가 어떻게 대답했었는지도 기억한다.
‘거기 가면 홍서 씨 볼 수 있잖아요. 그럼 가야죠.’
이번에도 그가 와줄까. 최홍서가 없어도?
전화를 끊고도 멍하니 서 있던 최홍서는 티파니의 울음소리에 퍼뜩정신이 들었다. 발치의 녀석은 이번엔 아주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약 올리려던 건 아닌데. 미안. 지금 바로 줄게.”
스틱 형태의 비닐 꼭지를 개봉한 최홍서는 주방 바닥에 웅크리고 앉았다. 흥분한 티파니는 츄르를 쥐고 있는 최홍서의 손에 앞발을 얹은 채로 정신없이 간식을 흡입했다. 츄르 타임은 유일하게 녀석이 먼저 접촉해 주는 소중한 순간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녀석의 귀여운 모습을 눈에 담고 카메라에 담느라 바빴을 텐데, 오늘 최홍서는 멍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녀석을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윤혜안의 몸으로 깨어난 뒤, 줄곧 오디션에만 매달렸었다. 지금 처한 상황을 파고들다 보면, 이번에야말로 사람이 정말 미칠 수도 있겠다 싶어서 일부러 더 오디션에 합격하는 것만 생각했다.
〈크림 맨션〉과 관련된 몇몇 기사에서 故 최홍서라는 표현을 봤기 때문에, 최홍서가 이 세계에 더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나는 누구란 말인가?
윤혜안의 몸속에서 스스로를 최홍서로 인식하는 나는 대체 뭐란 말인가?
황지우 역할을 따내면, 그때 최홍서의 죽음과 대면하겠다고 마음먹었었다.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두려워도, 이 상황을 하나씩 받아들여나가야만 했으니까.
이제는 자신의 죽음을, 적어도 자신이라고 믿고 있는 인물의 죽음을 마주해야만 한다.
티파니에게 간식을 주고 난 뒤, 비교적 담담한 마음으로 외출 준비를 했다. 윤혜안의 명품 옷을 걸치고, 가장 덜 화려해 보이는 명품 가방에 간단히 소지품을 챙겼다. 윤혜안의 옷장에는 전부 명품뿐이라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티파니, 잘 놀고 있어.”
간식을 먹자마자 캣폴로 복귀한 티파니는 가장 높은 보드에서 좋아하는 장난감에 빠져 있었다. 신발을 다 신을 때까지도 아무 관심을 보이지 않던 녀석이 행동을 멈추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가지 말까? 섭섭해?”
티파니가 말을 할 줄 알았다면 아마도 착각하지 말라고 면박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으로 씁쓸히 웃으며, 최홍서는 좁아지는 문틈으로 손을 흔들었다.
“금방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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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안당 건물 주변으로는 녹지 공원도 잘 조성되어 있어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볕은 따뜻하고, 공기는 쾌적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기온에 말끔히 잘 닦인 하늘. 맑고 화사한, 전형적인 가을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대에는 어딘가 서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죽음을 기록하고 보관하는 장소 특유의 어쩔 수 없는 그늘이었다. 그림같은 평화를 깨고 곧 불행이 닥쳐올 것만 같은 예감, 뒷목을 쭈뼛하게 만드는 섬뜩한 불길함이 발소리를 죽인 채 뒤를 바짝 쫓아오는 기분이었다.
산책로를 따라 건물을 향해 천천히 걸으면서 최홍서는 씁쓸히 웃었다. 아무리 예쁘게 꾸며놓아도 죽음의 그림자를 떨치지 못하는 이 장소가 이전의 자신을 닮은 것 같았다.
화려한 옷과 메이크업, 꾸며낸 웃음으로도 자신의 어둠은 온전히 가려지지 않았었다.
눅진하게 들러붙은 어둠을 알아챈 사람들은 최홍서에게 그늘이 느껴져 꺼림칙하다고 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슬픔이 짙게 밴 것 같은 처연함이 최홍서의 매력이라고도 했었다.
하나의 특징을 두고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게 싫어하는 이유가 되었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좋아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당시의 최홍서는 싫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야 한다는 강박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지금이라면, 모든 것을 다 잃어본 지금이라면, 좋아해 주는 사람들의 관심에만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이제 ‘최홍서’ 앞으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부질없는 생각을 털어내며 건물 내부로 들어서자, 서늘함은 더욱 분명해졌다. 시간이 흐르지 못하고 고여있는 장소 같았다. 외부 세계와 단절된 듯한 기묘한 감각이 걸음을 느려지게 했다.
최홍서의 유골함은 건물의 안쪽, VIP실에 안치되어 있었다.
한쪽 벽면 전체가 통창이라 환한 자연광이 가득 쏟아지는 방이었다. 고급스러운 나무 바닥이 깔려있고, 호텔 라운지처럼 안락해 보이는 소파 세트가 홀 중앙에 놓여 있었다.
누가 나를 이런 곳에 안치했을까.
일단 내 가족은 절대 그럴 사람들이 아니지. 최홍서는 씁쓸히 조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