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그렇게 명 사장과 이서경의 눈에 띄었을 때 최홍서는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갓 스무 살이었다. 법적으로는 성인이어도 사회적으로는 어린애나 마찬가지인 시기였다. 칼을 들이댄 폭력적 협박보다 더 끔찍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선생님. 저는 이서경이 시킨 대로 했을 뿐입니다! 어떻게 보면 홍서와 같은 피해자라구요! 제발… 제발 부사장님께 말씀 좀 잘 해주십시오. 예?’
감히 자신이 최홍서와 같은 피해자라고, 강 실장에게 선처를 호소하는 명 사장의 목소리를 듣다 말고 이해성은 녹취를 중단시켜 버렸었다. 최홍서와 관련된 얘기가 아니라면 개가 짖는 소리일 뿐이었다.
여하튼 당시 그 외의 조사 목록에서도 윤혜안이라는 이름을 본 기억은 전혀 없었다.
그사이 자동차는 ARA 전자의 사옥이 있는 역삼으로 향하기 위해 동호대교로 진입하고 있었다. 이해성은 몇 모금 피우지도 않았는데 필터에 닿을 듯 짧아진 담배를 훅 빨아들이고는 미련 없이 재떨이에 목을 꺾어버렸다.
“혹시 홍서의 주변인에 대해서 조사가 덜 된 부분이 없는지 추가적으로 알아보세요. 그리고 윤혜안 배우 자체에 대해서도 간단히 확인해 주시구요.”
“자세히 들어갈까요?”
“아니요, 지금은 기본적인 걸로 충분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구미 공장에서 돌아오는 날이 언제였죠?”
“목요일입니다.”
“그날 올라오는 길에 하남에 들를 테니 시간 확보해 줘요.”
강 실장이 놀라는 기색을 숨기며 룸미러로 이해성의 기색을 살폈다.
하남이라면, 최홍서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는 추모공원을 의미했다.
이해성은 그간 한 번도 그곳에 방문한 적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봉안당 건물 내부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사람을 보내 매주 새로운 꽃으로 관을 장식하고 있었고, 추모공원 입구까지 간 것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차에서 내리는 데에 성공한 적이 없었다.
뒷좌석에서 여러 개비의 담배를 피우며 남한산을 배경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건물을 한참 바라보다 돌아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홍서를, 홍서의 죽음을 마주하기로 마음을 굳힌 사람 같았다.
드디어 그가 긴 그림자에서 벗어날 결심이 든 것일까, 강 실장은 반가움을 느끼면서도 내색하지 않으려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글쎄… 오늘은 괜히 기분이 이상하네.”
“……”
“지금이라면 가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요.”
이해성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좌석에 머리를 기댔다. 창밖으로는 가을의 한강이 수십, 수백만 조각으로 부서진 태양의 파편처럼 화려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기는 했으니까요. ‘그 일’도 결국은 극복하실 겁니다.”
“홍서 군이 반가워하겠네요.”
최홍서가 남긴 흔적이 옅어져 가고 있다고, 강 실장은 그렇게 오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해성은 그저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많은 사람들 틈에서 혼자만의 비밀을 되새기며 흐뭇해하는 내성적인 소년 같은 미소였다.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흐른다 하더라도, ‘이 기억’들과 ‘이 감정’들이 저만큼 멀어지고 흐려져, ‘그 기억’과 ‘그 감정’으로 바뀌는 일은 없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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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옮길 때는, 앞발 겨드랑이만 잡으면 안 되고… 음, 한 손은 가슴, 한 손은 배… 나눠서 받쳐 들고 옮겨 준다…”
침대 옆 자그마한 2인용 소파에 앉아 웅얼웅얼 소리 내어 책을 읽던 최홍서는, 잠시 고개를 들어 고양이 쳐 갔다
캣폴의 투명 해먹 안에서 동그랗게 몸을 만 티파니가 이쪽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을 수 있는 기회를 줘야 말이지… 티파니, 언제 안게 해줄래?”
제법 애절한 질문에도 녀석은 무심한 얼굴로 입맛을 다실 뿐이다. 최홍서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궁디 팡팡을 해줄 때 야옹 소리를 크게 내면서 엉덩이를 낮추면…아, 이건 강도를 낮추라는 표현…”
고개를 끄덕거리며 진지하게 내용을 되새기던 최홍서는 다시금 고양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읽고 있던 페이지 그대로 잠시 책을 뒤집어 두었다.
“궁디 팡팡? 안게 해주지도 않는데, 궁디 팡팡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긴 할까? 어떻게 생각해, 티파니.”
냐옹.
녀석은 이번엔 하품하듯 입을 벌리며 소리를 냈다. 어림도 없다고 대답이라도 해주는 것 같아서 싱거운 웃음이 났다.
논현동 오피스텔을 정리한 후, 강남구를 벗어나 용산구로 옮겨온지 2주 정도가 지났다.
‘레이어드’의 마지막 숙소였던 이해성의 빌라와도 멀지 않았고, 그 이전에 오랫동안 지냈던 허름한 숙소와는 더 가까웠다. 골목으로는 차가 들어가지도 못하는 비좁은 다세대 주택단지와 이국적인 부촌이 서로 지척에 닿아 있는 흥미로운 이 지역은 다행히 최홍서의 기억 속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윤혜안이 살던 오피스텔에 비할 수는 없어도 새집은 원룸치고는 좁지 않은 편이었다. 거실이랄 것도 따로 없는 다세대주택에 이층 침대를 꽉꽉 채워놓고 숙소 생활을 오래 했던 최홍서에게는 이 정도만 해도 만족스러웠다.
창가에는 침대를 놓았고, 침대의 맞은편 발치에 캣폴을 설치했다.직사각형의 긴 집안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고, 바깥 구경을 하면서햇볕도 될 수 있는 위치였다. 캣타워나 캣폴은 그런 자리에 놓아주면좋다고 책에서 읽은 대로 해보았는데,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약 한 달사이 완전히 녀석의 아지트가 되어버렸다.
녀석에게도 최홍서는 외모만 주인과 같을 뿐인 수상한 인물이겠지만, 최홍서에게도 고양이가 낯선 생명체인 건 마찬가지였다. 반려동물을 키워본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녀석과 함께 생활하기 위해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배우고 익혀야만 했다. 덕분에 넓지 않은 집안 곳곳에는 〈고양이 집사 업무 일지〉,〈야옹야옹 고양이 대백과〉, 〈지금, 당신의 고양이는 어떤가요?〉 같은책들이 굴러다녔다.
“티파니.”
반원형의 투명한 아크릴 안에서 녀석의 작은 귀가 움찔거렸다.
“넌 어떨 것 같아? 〈크림 맨션〉 오디션, 내가 될 것 같아?”
여전히 간식이 없으면 곁에 다가오지 않고, 쓰다듬거나 안는 것도허락해 주지 않아 빗질을 할 때마다 애를 먹어야 했다. 시간을 쪼개가며 고양이의 습성에 대해 공부까지 해야 했지만, 그래도 녀석과의 동거는 싫지 않았다.
아니, 녀석이 있어 줘서 다행이었다.
혼자뿐이었다면 이 불안한 상황을 더욱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집안에 붙어있지 못하고 밤마다 불안을 달래기 위해 거리를 돌아다녔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녀석은 지금처럼 말을 걸면 이쪽을 쳐다봐 주었다. 가끔은귀를 움찔거리기도 하고, 작은 울음소리를 내기도 하고, 꼬리를 흔들기도 했다. 마치 듣고 있으니 계속 얘기하라는 것처럼.
물론, 쓰다듬게 해주고 안게 해준다면 더 좋겠지만…
최홍서는 다리를 소파 위로 끌어 올리고 무릎 위에 턱을 괴었다.“오늘 오디션 결과 나온다고 했는데, 왜 아직 연락이 없을까?”갸우뚱. 티파니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아직 1시도 안 됐는데 내가 너무 마음이 급한 거겠지?”다시 또 갸우뚱.
“캐스팅 안 되면… 그 사람, 다시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이제 나는 그 사람에게 아무것도 아니니까. 연락할 수도 없고, 찾아갈 수도 없는, 아무 상관도 없는 모르는 사람이니까. 아니, 연락해서도 안 되고, 찾아가서도 안 되는 사람이니까.
고양이는 이번엔 아무 반응도 없다. 갸우뚱조차도 해주지 않았다.
다시 만날 수 있게 되면 어쩔 거냐고. 지금의 네가 그 사람 앞에서 뭘 할 수 있냐고. 그런 지적을 하는 것만 같았다. 도둑이 제 발 저린 제멋대로의 해석이겠지만.
“티파니, 간식 줄까?”
오디션 결과를 기다리느라 초조해지는 마음을 환기하려고 최홍서는 목소리 톤을 밝게 끌어올렸다. 간식이라는 말에 녀석이 머리를 들고 귀를 세웠다. 소파에서 일어난 최홍서가 주방을 향해 걸어가자, 녀석은 캣폴에서 폴짝폴짝 뛰어 내려왔다.
다른 때는 절대 따르지 않으면서 오직 간식에 한해서만 경계를 허무는 녀석의 솔직함이 귀여워서 웃음이 새었다.
“그래, 지금 줄게. 티파니, 츄르 줄까?”
액상 형태의 츄르는 녀석이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츄르라는 말에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졌는지 뒤따라오는 녀석의 울음소리가 높아졌다.
간식을 보관하는 수납장을 막 열려고 할 때, 소파에 두고 온 핸드폰이 울렸다.
“잠시만. 전화받고 금방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