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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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재미있네요. 장면 해석은 본인이 한 거예요?”

“네.”

“니콜라이를 설득하려는 레베데프를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배우는 못 본 것 같은데. 대부분 니콜라이의 열정을 끌어내기 위해서 더 뭐랄까… 연설하는 것 같은 느낌으로 빠지잖아요. 그런데 윤혜안 씨는 오히려 안타깝게 표현한 게 특이하네요.”

“가장 뜨겁고 순수한 사샤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니콜라이는 계속 무기력에 빠져 있잖아요. 삶의 어떤 기쁨도 니콜라이를 구원할 수 없다는 생각에… 어쩌면 레베데프는 깊은 측은함을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음… 그래요, 잘 봤어요. 다른 분들은 질문 없으세요?”

다행히 감독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안톤 체호프를 좋아합니까?”

이번엔 이해성의 질문이었다. 그리고 최홍서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공격적으로 덧붙여 말했다.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

“좋아한다고까지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 작가의 작품을 많이 연습했습니다. 저 말고 다른 배우들도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많이 다루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워낙… 유명한 작가니까요.”

대답을 들은 그의 얼굴에는 눈에 띄는 변화가 없었다. 그 변화 없음이 오히려 그의 저조한 기분을 드러내 주고 있었다. 그는 앞에 서있는 ‘윤혜안’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최홍서처럼 손가락을 접어가며 긴장을 푸는 것도. 최홍서처럼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선택한 것도.

“이 역할의 원래 주인이 최홍서 군이었다는 건 사전에 알고 있었죠?”

“…네.”

“그래서 최홍서 군을 참고했습니까?”

“……”

“쉽게 말해서, 흉내를 내면 유리할 거라고 계산했는지를 묻는 겁니다.”

그는 상당히 강경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절대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았지만, 그가 느끼고 있는 불쾌감이 충분히 전해져왔다.

그에게 미움받고 있다는 실감에 그제야 전신이 다 아팠다.

겉모습은 윤혜안이어도, 그 외 모든 것은 최홍서였으니까. 기억도, 습관도, 취향도, 실력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런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해성을 본 적이 없어서.

언제나 조심스럽고, 따뜻하고, 너그럽고, 애정을 갈구하는 구애의 눈빛밖에는 그에게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가 주는 이 아픔이 너무나 낯설었다.

“제 느낌대로 연기했을 뿐입니다. 흉내 내지 않았습니다.”

그의 눈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대답하려 노력했지만, 서러움을 억누르느라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입술을 다문 그의 눈빛이 너무 쉽게 최홍서를 벗어났다. 더 이상 어떤 관심도 흥미도 없다는 듯. 그럴 가치도 없다는 듯. 그는 펜을 내려놓고 상체를 뒤로 물리며 단단히 팔짱을 꼈다. 그리고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분들이 더 궁금한 게 없으시면 지정 연기로 넘어가죠.”

서러움이라니.

무관심했던 부모가 자신이 벌어들이는 돈에만 반응을 보였을 때도, 명 사장에게 이용당하고 협박당하면서도, 그런 감정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최홍서에게 서러움이란, 넘칠 정도의 사랑을 받는 아이들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적 감정이었다. 자신을 향한 관심과 애정이 아주 잠깐 다른 곳을 향하는 것조차 허락 못 할 만큼. 그만큼의 사랑을 당연하게 받아온 아이들만의 어리광.

그래서 이해성의 차가움에 태어나 처음으로 서러움을 느꼈다. 그는 최홍서에게 서러움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자동차가 호텔의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가자마자, 이해성은 암레스트에 보관되어 있는 담뱃갑을 찾았다. 그 안에서 한 개비를 꺼내는 이해성의 손길이 여느 때보다 더 느릿했다. 어떤 생각에 깊이 사로잡혀있는, 홀려있는 사람처럼.

닮았다니.

그런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이마나 뺨은 부드럽지만 턱선은 날카로운 얼굴형, 온순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강렬함도 가지고 있는 눈매, 희다기보다는 투명한 피부. 개별적 특징들을 굳이 하나하나 꼽아가며 비교하자면 닮았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연예계에 그런 특징을 가진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다.

창밖을 향하고는 있지만 거기에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 이해성의 눈이 가늘게 찌푸려졌다. 평소보다 담배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이는 호흡에 양 뺨이 길게 파였다.

심호흡을 하며 하나씩 접히는 손가락을 봤을 때. 이미 평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최홍서의 오랜 습관이었고, 그 때문에 이해성에게도 옮아버린 습관.

팬들 사이에도 널리 알려진 최홍서의 유명한 루틴이었고, 굳이 따지자면 굉장히 특이한 습관도 아니기는 했다. 충분히 겹칠 수 있는 일이라고 스스로 설득하려 했을 때, 윤혜안은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연기하기 시작했었다.

최홍서와 비슷한 게 아니라, 최홍서를 일부러 흉내 내고 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내가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는 건가?

처음 만났던 그날, 최홍서가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연기했었다는건 그 응접실에 있던 사람들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 사람들 중 누군가에게서 정보가 새 나갔을 수도 있지만, 그래, 우연에 우연에 우연이 겹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려 애써보지만, 불쾌함은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가 않았다.

최홍서 고유의 개성을 그 배우가 빼앗아버린 것처럼 화가 났었다. 추억까지 뺏긴 것 같았고, 아까워서 차마 손대지도 못하고 쳐다보기만 했던 귀한 케이크를 누군가가 아무렇지도 않게 포크로 헐어버린 기분이었다.

그사이 반이나 타들어 간 재를 털면서 이해성은 피곤한 목소리로입을 열었다.

“실장님.”

“네, 부사장님.”

조수석에 탑승하고 있던 강 실장이 반쯤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윤혜안 배우 말입니다.”

“네.”

“홍서와 가까운 사람이었던가요?”

“아니요. 그런 분의 성함은 리스트에서 보지 못했습니다.”

강 실장이 자료를 잘못 기억할 리는 없었다.

‘X군 스캔들’과 관련된 사람들의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검찰 수사와 별개로 이해성은 최홍서와 그 주변을 꼼꼼히 조사하도록 강 실장에게 지시했었다. 혹시라도 재판이 최홍서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 경우를 대비해 되도록 충분한 증거를 확보해 놓으려는 목적이었다.

가족들과의 관계, 몇 안 되는 가까운 지인이나 과거에 함께 일했던동료들까지.

그리고 구속 상태로 재판 중이었던 UB 엔터테인먼트의 명 사장과도 접촉했었다. 당시 이서경 전무에게도 완전히 배신당하고 비빌 언덕이 없었던 명도훈은 이해성 측에 순순히 정보를 내놓았었다. 이해성이원하는 정보를 주면 혹시라도 형을 줄이는 데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는기대감도 있었을 것이고, 이렇게 된 이상 혼자 죽을 수는 없다는 이서경 전무에 대한 복수심도 있었을 것이다.

‘부모라고 다 같은 부모가 아니잖아요. 싸질러놓고 신경도 안 쓰는부모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아요. 선수들한테 주변에 그런 애가 있다는 얘길 들으면 한번 데려와 보라고 해요. 부모의 관심 밖에 있고, 얼굴은 반반하고, 별생각 없이 어슬렁거리면서 사는 어린 애들.’

명 사장은 그렇게 입을 열었었다.

그 바닥에선 드물지도 않은 수법이라고 했다. 일하겠다고 스스로찾아오는 일명 ‘선수’들은 넘쳐나도, 그중에서 진짜 돈이 되는 ‘팔리는선수’는 극소수였다. 진흙 속의 진주를 찾기 위해 그들은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다.

‘처음엔 그냥 놀러 오라고 하죠. 친구들 한번 데려와서 가게에서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놀라고. 그리고 그중에 큰돈 될 것 같다 싶은 애가 있다 싶으면 잘해줘요. 호스트바 사장이 아니라 그냥 친근한 형처럼. 그렇게 가게에 드나드는 거에 대한 거부감부터 없애는 거죠.’

명 사장의 눈에 띈, 큰돈 될 것 같다 싶은 애 중의 하나가 최홍서였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렇게 화류계에 대한 저항감이 없어졌을 때쯤 급하게 선수가 부족하다면서 한 번만 임시로 도와달라고 하는 거죠. 그냥 머릿수만 채워달라고. 그럼 친한 형의 부탁이니까, 그 형이 곤란해하니까 들어주는 거예요, 처음에는. 그러고는 걔들이 일주일 내내 카페 서빙해야 벌 수 있는 돈을 고맙다고 용돈하라고 쥐여주는 거죠.’

그렇게 차근차근, 한 발씩, 계획적으로 쳐놓은 덫 속으로 유인되는 줄도 모르고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아무한테나 그렇게 공 안 들여요. VIP들 상대로, 말 그대로 골수까지 빼먹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고급진 애들을 골라내는 거죠. VIP가 이아이라고 확실하게 찍으면 그때 공사에 들어가는 게 아무래도 안전하니까요. 불법도 아니고, 겉으로 보기엔 강제적이지도 않아서 VIP들이 선호해요. 표면적으로는 지들 발로 화류계에 걸어 들어와서 알아서 입안으로 굴러떨어지는 거니까, 불법이 될 건덕지가 없죠.’

그리고 강 실장이 가져왔던 녹취 속에서 명 사장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었다.

‘이서경이 찍은 애가 홍서였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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