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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현 감독 <크림 맨션>, 제작 재시동
주연 배우로 발탁되었던 故 최홍서 군의 사망 후, 한동안 진행이 중단되었던 영화 <크림 맨션>이 다시금 제작에 돌입한다.
제작사 ‘J 컴퍼니’는 오늘, 공석이 된 역할에 새로운 배우들을 캐스팅하기 위한 오디션 일정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최홍서 군으로 확정되었던 역할뿐만 아니라 여러 역할에 새로운 주인을 찾을 계획이다. 수개월간 제작이 지연되면서 기존에 캐스팅되었던 배우들이 이미 다른 작품에 출연 중인 경우가 다수 발생한 탓이다.
〈크림 맨션>은 해외 영화제에서 특히 사랑받는 거장 강우현 감독의 차기작으로, ‘크림 맨션’이라는 최고급 빌라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두고 입주민들 사이에 벌어지는 기묘한 갈등을 다룬 심리 스릴러 작품이다.
한편, 〈크림 맨션>은 한때 제작비 유치에 난항을 겪기도 했었다.
미적 완성도를 중시하는 강우현 감독의 야심작답게, 세트 제작에만 약 150억 원 이상이 필요할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대중성보다는 예술성에 중점을 두는 강우현 감독의 작품들이 그간 흥행과는 크게 인연이 없었던 점도 투자 유치에 불리하게 작용했으리라는 업계의 분석이 있었다.
영화 투자사 ‘히읗시옷’이 투자를 결정하면서 다행히 제작에 돌입할 수 있었지만, 주연 배우의 갑작스러운 사고로 이후 전망이 불투명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최근 ‘히읗시옷’ 측은 계약 파기없이 그대로 제작을 지원하겠다는 뜻을 전했고, 〈크림 맨션〉은 다시 한번 빛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최홍서 군의 뒤를 이어 주연을 맡게 될 배우가 누구일지, 벌써부터 국내외 영화 팬들의 관심과 기대를 모으고 있다.
어느샌가 잠이 들었었나 보다.
거실 쪽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눈을 떴을 때는 블라인드 너머의햇빛이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슬리퍼를 끄는 발걸음 소리,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무언가를 내려놓고 정리하는 소리. 사람이 만들어내는 그런 작은 소음들이 듣기 좋았다. 안심이 되었다.
부스스 몸을 일으킨 최홍서는 거실로 나가보았다.
괜찮다고 했는데도 간단하게 먹을 것을 사 왔는지, 용재가 주방의냉장고 앞에서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형 혹시 몸이 안 좋으세요? 안색이 별로인데.”
“괜찮아요. 조금 피곤해서 누워있었더니 괜찮아졌어요.”
“이것 좀 마시세요. 집에 와서 여태 물도 안 드셨죠?”
“고마워요.”
생수를 한 잔 건네는 용재의 말을 듣고 나니 갑자기 목이 말랐다.시원한 물을 여러 번에 걸쳐 나눠 마시면서, 최홍서는 아일랜드 식탁위에 올려진 이동장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이동장 안에서꼬물거리는 고양이를.
“이 녀석 이제 나오고 싶나 봐요. 티파니야, 집에 왔다. 형아도 집에오셨어.”
용재는 이동장을 바닥에 내려놓고 문을 열어주었다.
고양이는 이동장 안에서 바깥을 기웃거리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걸어 나왔다. 최홍서 앞으로 곧장 다가와 주위를 맴돌던 녀석은 그러나곧 미련 없이 돌아서서 용재에게로 쪼르르 달려가 버렸다. 용재의 종아리 사이를 돌면서 몸을 비비는 녀석의 작은 울음소리가 애처로웠다.
“인마, 형아잖아. 형아 보고맨날 울었으면서 왜 그래?”
당황한 용재는 고양이를 안아 들고 최홍서 쪽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녀석은 최홍서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어어? 이놈 진짜 왜 이러지?”
“낯설어서 그러나 보죠.”
“네? 낯설 리가요. 인마, 티파니, 자, 봐봐. 네가 좋아하는 형아라니까?”
가깝게 지내는 친한 친구 한 명 없어도, 기르는 고양이만큼은 그래도 윤혜안을 좋아했었나 보다.
용재는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듯 몇 번 더 고양이를 어르다, 계속해서 거부 반응을 보이자 할 수 없이 그만 내려놔 주었다.
“집에 오랜만에 돌아와서 그런가 봐요.”라는, 위로의 말과 함께.
해방된 고양이는 이번엔 소파 옆 자신의 방석 위로 도도도 달려가 몸을 말고는 느긋하게 앞발을 핥기 시작했다. 그런 녀석의 평화로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최홍서는 용재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용재 씨, 전 아직 ENA 소속인 거죠?”
“네.”
“계약 기간은 얼마나 남았어요?”
“내년까지니까 1년 조금 넘게 남았어요.”
“그럼 일단 이 집은 내놔 주세요. 계약 기간이 아직 남았을 테니까 중개 수수료는 제가 부담하겠다고 하면 집주인도 별말 없을 거예요.” “집을요?”
“통장 잔고도 바닥났고… 회사에 마이킹이 있잖아요. 빨리 갚아야죠.”
내키지 않는 표정의 용재에게 최홍서는 이번엔 자신의 핸드폰 액정을 내밀어 보였다.
“그리고 여기. 이 오디션 볼게요. 준비해 주세요.”
말할 것도 없이 〈크림 맨션〉의 오디션 공고였다.
“형 설마…”
최홍서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직도 내가 최홍서라는 그런 생각 안 해요. 그땐 갑자기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에 대한 아무 기억이 없어서 당황했나 봐요. 지금도 불안한 건 마찬가지긴 한데… 그래도 이젠 그런 정신 나간 생각은 안 해요.”
속으로야 어떻게 생각하든, 남들 앞에서 ‘나는 윤혜안이 아닌 최홍서’라고 우기는 건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우긴다고 먹힐 얘기도 아니었다.
경직되었던 용재의 표정이 다시금 밝아졌다.
“다른 일을 잡아드릴 수도 있어요. 사실 형 깨어나고 나서 여기저기서 섭외가 꽤 들어오고 있거든요.”
동호대교에서 뛰어내려 의식 불명에 처해 있다가 몇 개월 만에 깨어난 한물간 아이돌 출신 배우.
사람들이 흥미를 가질 소재이기는 했다. 하지만 섭외라고 해봤자 가십 위주의 저급한 토크쇼일 게 뻔했다. 그런 곳에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었다.
“아니요, 이걸로 할게요. 그리고 괜찮은 선생님으로 연기 수업도 잡아 주시구요.”
“근데요 형, 회사 빚을 왜 자꾸 마이킹이라고 하세요?”
“네?”
“호스트바 선수들이나 룸살롱 아가씨들이 가게에 진 빚이 마이킹이”그냥 가불이죠.”잖아요. 형이 회사에 빌려 쓰신
그것과 이것은 엄연히 다르다는, 마치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다는말투와 표정이었다.
“아니, 그게 그러니까… 형 말씀에 토를 달려는 게 아니라…”
“……”
“형을 그런 사람들하고 똑같이 취급하지 말라는… 그런 말을 하려던 거예요. 연예인하고 그런 사람들은 전혀 다르잖아요.”
최홍서의 침묵을 불쾌함으로 받아들였는지, 용재는 예전 윤혜안을대하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진땀을 흘리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마이킹이라는 말은 호스트 시절 입에 익은 그쪽 은어 중 하나였다.
그런데, 가불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다 결국은 회사에 진 빚에 종속되어 회사의 꼭두각시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연예계에도 꽤 많았다. 수십, 수백억의 안정된 수입을 거둬들이는 연예인은 전체 업계 종사자의5%도 채 되지 않았다.
빚을 지워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고 상대를 마음대로 조종한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연예계의 가불과 화류계의 마이킹은 별 차이가 없었다. 적어도 최홍서가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씁쓸하고 애매하게 웃고 서 있었던 최홍서는 물을 다 마신 컵을 들고 개수대 앞으로 걸어갔다.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용재의 목소리가 뒤를 따라왔다.
“그리고 이 집은 형이 무리해서라도 꼭 여기서 살겠다고 하셨던 거잖아요. 근데 진짜 이사 가시게요?”
개수대 안에 컵을 내려놓은 최홍서는 수도를 틀어 손을 씻었다.
“마이킹이든 가불이든, 이제 빚은 지긋지긋하거든요.”
“……”
가 아니었다.
“카드 할부도 싫을 만큼요.”
물기 묻은 손을 털며 돌아서서 농담인 척 씩 웃어 보였지만, 입가에는 쓴맛이 감돌았다.
내일 다시 들르겠다는 인사와 함께 용재가 돌아간 후, 최홍서는 고양이 방석 앞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자리를 잡았다.
창고 방에 있던 장난감 하나를 가져와 눈앞에 흔들어 보았다. 녀석은 장난감에 흥미를 보이면서도 방석 위에서 내려오려 하지는 않았다. 호기심과 경계심이 가득한 두 눈이 최홍서와 장난감을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고양이든 강아지든 동물은 한 번도 키워본 적이 없는데, 귀를 움찔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났다.
힘없이 피식거리며 장난감을 흔들던 최홍서는 세운 무릎 위에 턱을 괴고 한숨을 내쉬었다.
〈크림 맨션>의 제작을 지원하는 투자사 ‘히읗시옷’.
‘히읗시옷’은 ARA 그룹의 차기 수장이자, ARA 전자의 현 부사장인 이해성이 개인 자금으로 운영하는 영화 투자사였다. 이전에는 하나의 회사라기보다는 이해성의 개인적 활동이었다. 그러다 〈크림 맨션〉에 투자를 결정한 뒤, 이해성은 제대로 사업체를 설립해 ‘히읗시옷’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해성과 홍서의 초성을 딴 작명이었다.
【“영화 투자는 이미 결정됐고, 홍서 씨가 어떤 대답을 들려주든 투자를 번복하는 일은 없어요. 그럼 영화를 인질로 해서 홍서 씨랑 잠자리를 가지려 한다는 의혹은 없어진 거잖아요. 그렇죠?”】
만나는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거짓말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곁에 한 명만 있어도 세상은 버틸 만했고, 버틸 가치가 있었다. 그렇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다시 되돌아와 모든 것을 잃어버렸음을 눈으로 확인한 지금에야 알 것 같았다.
나를 싫어하지 말아 달라고, 그에게 무릎 꿇고 애원하는 것이 차라리 더 쉬운 일이었고, 차라리 더 가치 있는 일이었음을.
장난감에 대한 호기심과 윤혜안의 탈을 쓴 최홍서에 대한 경계심 사이에서 갈등하던 고양이는 경계심을 유지하는 쪽을 택했다. 쿠션에 완전히 엎드려버린 녀석 앞에서 최홍서는 이번엔 간식을 흔들어 보였다.
“간식 줄까?”
투명한 원통에 든 열빙어를 본 녀석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드디어 방석에서 내려오는가 싶었지만, 최홍서의 손에서 간식을 낚아채고는 곧바로 방석으로 돌아가 버렸다.
녀석은 능숙한 솜씨로 머리에서부터 야무지게 열빙어를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주인의 모습을 한 사람을 힐끔거리며 경계하는것도 잊지 않았다. 무릎을 세우고 앉아 그 위에 팔을 걸치고 턱을 괸 최홍서는 녀석의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어느덧 기울어진 저녁 해가 거실 바닥 위에서 주황빛으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래도 넌 아는구나.”
고양이가 작은 혀로 입맛을 다시며 이쪽을 쳐다보았다.
“내가 윤혜안이 아니라는 걸.”
곁에 와주지 않는 고양이가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
자신이 윤혜안이 아니라는 걸 적어도 이 녀석만큼은 알아주는 것같아서.